주간동아 731

2010.04.13

女기수 잇단 자살 … ‘경마장 잔혹사’

부경경마장, 냉혹한 경쟁 버텨내기 힘든 곳 … 차별과 폭언까지 “기수가 불쌍해”

  •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입력2010-04-08 13: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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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女기수 잇단 자살 … ‘경마장 잔혹사’
    “경마장은 내 기준으로는 사람이 지낼 곳이 못 되는구나.”

    3월 12일 박진희(28) 기수가 자신의 오피스텔에서 목을 맨 채 발견됐다. 유서에는 부산경남경마장(이하 부경경마장) 생활의 고달픔이 담겨 있다. “부산경마장은 기수들이 최고 힘들고 불쌍해” “도대체 부산에서 몇 번의 자살 시도를 한 거야” “왜 모두 더 힘들게만 하는 거야.”

    박 기수는 2008년 16승을 올릴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고, 그룹 ‘소방차’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했을 만큼 미모도 뛰어난 인기 기수였다. 그러나 2009년 3승에 그치며 성적이 곤두박질치자 출주 기회가 줄어들었다. 한 번 놓친 기회는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경주마 ‘북극성’은 박 기수가 데뷔시켜 함께 5연승을 거뒀지만, 그 뒤 딱 한 번 2위를 하자 바로 외국인 기수에게 넘어갔다. 박 기수는 다시 어렵게 북극성을 탈 기회를 잡긴 했으나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고, 결국 일본인 여자 기수가 북극성을 탔다.

    한국경마기수협회(이하 기수협회) 한 관계자는 박 기수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전했다.

    “한때 박 기수와 함께 5연승을 했던 북극성이 공교롭게도 그가 자살한 날 일본인 여자 기수에게 배당됐어요. 상금이 걸린 문제고 기수들이 경쟁하는 건 당연하지만 말을 타지 못하는 기수의 열패감을 달래줄 장치가 필요합니다. 자신이 아꼈던 북극성을 외국인 기수에게 넘겨준 박 기수의 실망감을 일반인이 이해하기는 어려워요.”



    참기 힘든 열패감과 구겨진 자존심

    또 다른 기수도 “기수는 자신이 타던 말을 다른 사람에게 내주게 될 때 말할 수 없이 자존심에 상처를 받는다. 말을 뺏겼다고 생각한다. 망아지 때부터 탄 말이라 더 애착이 갔을 것”이라고 말한다.

    기수협회 오영일 부산회장은 “부산 기수는 서울 기수에 비해 차별 대우가 심하다”고 주장했다. 사실 부경경마장 기수의 자살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5년 3월에는 박 기수와 동기인 이명화 기수(당시 26세)가 자살했다. “난 타살 아닌 자살을 한다. 고통도 없고 편히 숨 쉴 수 있는 곳엘 가기 위해” “모가(뭐가) 그리 무섭다고 죽는지”라는 말을 유서에 남기고 죽었다. 당시 임상심리학자 이모 박사는 이 기수의 유서에 대한 심리분석 결과를 이렇게 기록했다.

    “말을 타는 것이나 기수 생활에 대한 두려움이 심한 상태였으며 해야 한다는 강박적 압박과 두려움의 양가감정(책임감과 실제 정서의 불일치)이 강했고 이를 수용, 극복하지 못했다.”

    부경경마장에서 기수로 활동하다 2006년 은퇴한 김서진(27) 씨는 “진희 언니가 서울에서 기수 생활을 했더라면 달랐을 것”이라며 부경경마장이 기수에게는 매우 열악한 환경임을 지적했다. 부경경마장은 (사)한국마사회의 ‘경마선진화’ 정책에 따라 만들어졌고 이 정책에 따라 외국인 기수를 데려왔다. 오영일 회장의 말이다.

    “서울은 기수 60명 중 외국인이 1명인데, 부산은 41명 중 3명이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부경경마장이 외국인 기수를 더 늘릴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외국인 기수에게는 숙소, 자동차, 보험료 등 각종 편의를 제공하고 말을 탈 기회도 더 챙겨주죠. 물론 국내 기수에게는 없는 혜택입니다.”

    이런 지적에 KRA 부산경남경마공원(이하 부경경마공원) 측은 “부경경마장 개장 당시 국내 기수는 대부분 경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경주 전개의 안정성을 확보하고 국내 기수의 말 타는 기술을 향상시키려고 외국인 기수를 데려왔다. 한국 경마는 외국에 비해 상금이 전반적으로 적기 때문에 외국인 기수를 영입하려면 각종 편의를 제공할 수밖에 없다”고 해명했다.

    외국인 기수가 들어오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한국 기수에 대한 배려는 줄었다. 부경경마장에서 활동하는 한 기수는 그 설움을 이렇게 말했다.

    “다른 지역은 조교(새벽훈련)를 한 사람에게 그 말을 타도록 암묵적인 배려를 해주었습니다. 기수가 몸 다쳐가며 경주마를 만들어놓으면 우선적으로 그 말을 타게 해주는 거죠. 그런데 부산은 그런 도의가 없어요. 열 마리를 훈련시키고 한 마리도 못 타는 기수가 있으니까요.”

    조교사들 푸대접에 더욱 큰 상처

    기수는 실력에 따라 경주에 출전하는 기수와 경주마를 훈련만 시키는 기수로 나뉜다. 훈련을 맡은 기수는 자연히 경주 경험이 부족해 날이 갈수록 기술이 떨어져 영영 출전 기회를 얻지 못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하지만 부경경마공원 측은 “경주마는 훈련과 컨디션 조절을 위해 한 달에 한 번밖에 경주에 나가지 못한다. 마주들이 성적이 안 좋은 기수에게 말을 주지 않아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즉 한국마사회의 경마선진화 정책에 따라 경쟁성을 높였을 뿐, 부경경마공원의 잘못은 없다는 주장. 부경경마공원 측은 “경쟁성 상금을 서울보다 많이 높였다. 경쟁성 상금이 없으면 경마가 죽는다. 그럼 누가 말을 열심히 타려고 하겠는가. 동기 부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렇지만 부산경남 기수들의 피해의식은 크다. 서울경마장은 경주협력금을 모아 기수협회사무국도 운영하고 기수 간 친목도모도 하는 등 기수들의 복리후생에 최소한의 성의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부경경마장은 경주협력금을 따로 운영하지 않고 이를 모두 상금에 반영시켰다. 즉 성적이 좋은 기수에게만 경주협력금이 지원되도록 한 것이다. 결국 이처럼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기수의 스트레스는 커져만 갔다. 김서진 씨는 기수 생활의 어려움과 자살한 박 기수에 대한 미안함을 이렇게 말했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기수예요. 경주 결과에 대한 책임은 모두 기수에게 돌아오게 돼 있으니까요. 거기에다 가장 노릇도 해야 하니…. 오래 함께 고생했는데 레이스를 펼치는 단 몇 분 만에 모든 것이 결정 나니 부담감이 클 수밖에요. 성적이 연이어 안 나오면 주변 사람들에게 미안하고 종국에는 인생이 무너져내리죠. 기수 생활 당시 저도 오피스텔에서 투신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어요. 진희 언니를 (부경경마장에) 혼자 남겨놓고 나와서 미안해요. 같이 나오자고 할 걸 그랬어요. 강한 사람인데, 버티고 버티다 오죽했으면 그랬을까요.”

    다른 기수도 기수 생활의 특수성을 말했다. “연간 1억 원 상금이 1000만 원으로 추락하기도 해요. 결과가 바로 나오니 순위에 집착하게 되죠. 승부욕이 강한 우리에게 말을 못 타는 스트레스는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지나친 경쟁에 따른 기수들의 심리적 압박을 덜어주는 문제에 대해 부경경마공원 측은 강경하다.

    女기수 잇단 자살 … ‘경마장 잔혹사’

    고(故) 박진희 기수와 경주마 ‘북극성’의 행복했던 모습.

    “경마도 일종의 상품인데 실력이 안 되는 기수를 내보내는 건 고객을 우롱하는 처사지요. 성적이 나쁜 선수의 생활 안정을 위한 제도를 더 마련해줄 수는 없습니다. 2009년 기준으로 연간 상금액이 1억 원 넘는 기수가 15명에 이릅니다. 잘하는 선수는 충분히 소득을 얻고 있어요.”

    박진희 기수의 죽음에 부경경마장의 기수 푸대접 행태 외에 기수에 대한 교육과 말 배정을 담당하는 조교사의 관행적 폭언도 한몫했다는 주장이 있다. 박 기수의 유서에는 조교사의 폭언을 암시하는 대목이 있다.

    “철없이 혼자 견뎌내고 있는 나를 또라이 같은 ×라며 손가락질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조교사가 왜 그 나이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철없이 사람의 상처를 주는 건지도….”

    기수들에 따르면 경마장에서는 폭언이 일상화했다. 기수협회 김동균 회장은 “기수와 조교사 관계는 운동선수와 감독의 관계라고 생각하면 된다. 힘든 운동인 데다 안전문제도 있어 조교사는 싫은 소리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 기수의 자살 유서를 분석한 임상심리학자 이모 박사는 심리분석 결과서에 “여성은 처벌이나 질책에 민감하다”라고 썼다.

    “마사회 견제 세력이 필요하다”

    남자 기수는 폭언에 구타까지 당하는 경우도 있다. 한 기수는 “헬멧 쓴 머리를 때리거나 경마예상지 책자로 얼굴을 때리는 일은 흔하다. 다른 기수들이 보는 앞에서 ‘조인트’를 까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기수를 말에 태울 권리를 갖고 있는 조교사는 기수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 이는 서울경마장이나 부경경마장이나 마찬가지다. 기수협회 김형석 부장은 “서울은 기수가 훈련 중 부당한 일을 당하면 협회 차원에서 도움을 주지만 부경에는 도와줄 사무국이 없다”고 말했다.

    기수협회 관계자들은 박진희 기수의 자살을 단순히 조교사-기수의 문제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김 회장은 “한국마사회는 서울경마장이 실패했다고 공공연하게 말해왔다. 부산은 ‘경마 선진화를 하겠다’며 마사회를 견제할 단체를 만들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 선진화 정책에 따라 부경경마장이 만들어진 것이 박 기수 죽음의 원인이라는 얘기다. 반면 부경경마공원 관계자는 “기수협회를 만들려면 운영비, 인건비를 합해서 몇십억 원이 든다. 그 돈은 마사회가 지원해야 한다. 기수협회가 없다고 사무국 기능을 안 하는 것은 아니다. 행정지원팀에서 기능을 대신한다”고 해명했다.

    부경경마공원의 한 관계자는 “하위 20%에 대한 배려심이 부족한 건 사실이다. 실력이 부족한 기수는 전담교육을 시킬 생각이다. 조교사 폭언, 폭행에 대해서도 면허갱신 및 마방임대 때 반영해 제재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부경경마공원의 ‘기수 간 경쟁과 경마 선진화’에 대한 생각은 확고하다. 부경경마공원이 최근 낸 보도자료에서 경마 기수는 “모든 프로 운동선수 중 가장 성공 확률이 높고 안정적 생활이 보장되는 프로 스포츠의 꽃”이라고 선전했다. 그러나 경마문화의 선진화 기치 아래 젊은 기수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현실을 더 이상 외면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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