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26

2010.03.09

세종시 논란, 예송논쟁에 불과할 뿐

백성의 실생활과 무관한 공리공론 … 하루빨리 결론내고 국가 발전에 진력해야

  • 이영철 목원대 겸임교수 hanguksaok@hanmail.net

    입력2010-03-04 16: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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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시 논란, 예송논쟁에 불과할 뿐

    예송논쟁의 중심에 섰던 우암 송시열.

    그는 조선 숙종 15년(1689) 1월, 숙종이 아들이 없다가 총희(寵姬) 숙의 장씨의 아들인 윤(畇, 후일의 경종)이 원자(元子)로 책봉 받는 문제로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자 세자 책봉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로 유배됐다. 그해 6월 서울로 압송되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게 되자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두 번 절하고 금부도사가 건네는 사약 두 사발을 마신 뒤 “천지만물이 생긴 까닭과 성인이 만사에 응하는 길은 오직 곧은 직(直)자 한 자뿐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당시 전국에서 수천 명의 유생이 그를 애도하기 위해 정읍에 모여들었고 수제자 권상하(權尙夏 1641~1721)가 수차례 눈을 감겨주었으나 끝내 감지 못했다.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당파 간에 칭송과 비방이 무성했으나 ‘조선왕조실록’에 그의 이름이 3000번 이상 언급돼 있고 그를 향사하는 서원이 당파를 초월해 전국에 70여 개 설립됐다.

    그는 누구인가. 조선 후기 붕당정치의 절정인 환국기에 83세의 노령으로 사약을 받고 생애를 마감한 노론의 영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다. 그는 효종과 현종의 사부로 조광조(趙光祖), 이이(李珥), 김장생(金長生)으로 이어진 기호학파의 학통을 계승·발전시킨 거유(巨儒)로 ‘정직으로써 기상을 기르는 일(以直養氣)’을 수신(修身)의 기초로 삼았다.

    그의 강인한 도덕률, 근면과 추진력은 정직이라는 무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반대 당파인 남인 윤휴(尹)는 송시열보다 10년 연하인 라이벌이었으나 우암의 실력을 인정해 “30년간의 나의 독서가 참으로 가소롭다”라고 하면서 그를 칭찬하는 솔직함을 보였다.

    효종 승하 후 복상논쟁에서 승리한 송시열

    물론 독선적이고 강직한 성품 때문에 교우관계가 화합하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가장 아끼던 제자인 윤증(尹拯 1629~1711)과의 불화도 그렇고 평생의 동반자인 송준길(宋浚吉 1606~1672)마저도 결국 뜻을 달리하고 말았다.



    병자호란 이후 존주대의(尊周大義)와 복수설치(復讐雪恥·복수하여 치욕을 씻음)를 주장한 그의 기축봉사(己丑封事)는 효종의 북벌의지와 부합해 국시(國是)로 채택됐다. 두 차례의 예송논쟁(禮訟論爭)에서 보여준 그의 왕사동례(王士同禮·왕실에 적용되는 예와 사대부에 적용되는 예가 같아야 한다)의 예론은 예의 기준이 계층에 따라 달라지면 사회통합이 어려워진다는 인식을 깔아 산림의 위상을 높여주었다.

    이는 조선시대 복상논쟁(服喪論爭)으로 이어진다.

    효종이 재위 10년 만인 1659년(현종 원년) 얼굴에 퍼진 종기의 독기를 빼내기 위해 침을 맞다 갑자기 승하했다. 효종은 인조의 적자이지만 장남인 소현세자가 죽고 차자로서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적통 여부를 따지는 예송논쟁이 발생했다. 효종의 승하에 따른 조대비(趙大妃·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의 복상문제와 관련해 일어난 논쟁으로, 왕세자 현종은 상례에 대한 일체의 문제를 당시 효종의 신임과 산림의 중망을 함께 받고 있던 김장생의 제자인 송시열, 송준길 양송(兩宋)에게 일임하도록 했다. 그러자 송시열은 궁궐 밖에서 대기하던 윤휴, 박세채 등에게 사람을 보내 의견을 물었는데 이때 윤휴는 자신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장자(長子)를 위해서는 상하 구분 없이 삼년복을 입으며 임금을 위해서는 동성·이성의 친척 모두가 참최(斬衰·아버지나 할아버지 상에 입는 복장)를 입는다. 왕조례와 사대부례는 다르며(王士不同禮) 대통을 이은 군주라면 곧 그에게 종통과 적통이 돌아가므로 그를 장자로 간주하여 참최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연려실기술’ 권 31, 현종조 고사본말 기해년 자의대비 복제)

    그러나 송시열의 견해는 달랐다. 그는 “효종은 ‘서자가 뒤를 이었을 경우’로 체이부정(體而不正)이 되므로 기년복(1년복)이 적당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서자를 첩자가 아닌 중자(衆子·적장자를 제외한 적처소생)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1차 예송논쟁인 기해예송(己亥禮訟)이 이렇게 발발했고, 서인의 기년설이 채택돼 서인들이 계속 집권했다.

    송시열 지지파인 서인들과 윤휴·허목 지지파인 남인들의 의론이 분분한 가운데 현종은 하는 수 없이 예론 시비에 결말을 짓지 못하고 금지령만 내렸다. 현종은 “예송에 관한 유생들의 반대·지지 상소가 있을 시 과거에 응시 못하게 하는 벌칙을 내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소현세자의 막내아들이 죽자 기해예송은 일단락됐다.

    송자(宋子) vs 개 이름, 극명한 대조

    한동안 잠잠한 듯했던 예송논쟁은 효종이 죽은 지 15년 만인 현종 15년(1674) 2월23일에 효종비 인선왕후가 죽자 재연됐다. 1차 예송논쟁 발단 주인공인 조대비의 상복이 또다시 문제가 됐다. 대왕대비에게 인선왕후는 과연 ‘장자부(長子婦)인가, 중자부(衆子婦)인가’가 대두됐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불가피하게 효종이 장자인지 중자인지를 규명하지 않으면 안 됐다. 1차 예송논쟁 때의 결정은 이제 더 이상 최선책이 될 수 없었다.

    당시 서인 쪽에서는 1차 예송논쟁 때와 같이 중자부로 다루어 대공설(大功說, 9개월복)을 주장했고, 남인들은 장자부로 다루어 기년설을 주장했다. 이것이 2차 예송논쟁인 갑인예송(甲寅禮訟)이다. 이 갑인예송에서 조대비의 복제는 기년상으로 정해지고 정권은 허적(許積)을 비롯한 남인에게 넘어가 서인과 남인의 운명이 뒤바뀌었다.

    그 후 조야에서 송시열은 송자(宋子)로 일컬어졌고 당시 산림의 중론에 따라 정조대에 ‘송자대전(宋子大典)’이 간행됐다. 현존하는 문집 중 ‘자(子)’가 붙은 것은 조선 후기 실학자 이익(李瀷)이 영조 29년(1753)에 엮은 퇴계 이황의 문집인 ‘이자수어(李子粹語)’와 ‘송자대전’인데 이로써 송시열은 주희와 동일선상에 놓여 현자(賢子)의 반열에 들게 됐다. 실로 그는 학자로서 최고의 명예인 문묘에 모셔졌을 뿐 아니라 정치인으로서 최대의 명예인, 그가 섬기던 효종의 묘(廟)에 배향되는 영광을 얻었고, 조야에 걸쳐 ‘대로(大老)’라는 극존칭도 얻었다. 그러나 이러한 명성과 달리 낙동강 동쪽 경상좌도 안동지방에서는 송시열을 송자가 아닌 견명(犬名)인 ‘시열아’라고 호칭해 실로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최근 세종시 논쟁이 미생지신(尾生之信)을 거쳐 ‘강도’ 논쟁으로 비화되는 등 국론 분열이 도를 넘어서고 있다. 조선시대 예송논쟁은 지배층에게는 예치(禮治)가 행해지는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성리학 이념 논쟁이었지만, 대다수 백성에게는 실생활과 무관한 공리공론에 불과했다.

    오늘날의 세종시 논쟁은 국가대사라는 본질을 벗어나 현재 권력과 미래 권력, 주류와 비주류 간 벌이는 치졸한 파워 게임으로 비생산적인 정치적 대립일 뿐이다. 대다수 시민은 지난해 9월 이래 반년 가까이 끌어온 세종시 문제에 무관심과 짜증을 보이고 있다. 세종시 원안이든, 수정안이든, 절충안이든 빨리 갈등의 와중에서 빠져나와 매듭짓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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