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13

2009.12.01

‘계수’의 처세술이 돋보이는 이유

형제들 왕권다툼 실리+명분으로 해결 … 아집과 독선 난무하는 우리 현실에 큰 교훈

  • 목원대 겸임교수 hanguksaok@hanmail.net

    입력2009-11-30 11: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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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수’의 처세술이 돋보이는 이유

    황해도 고구려 유적인 안악3호분에 그려진 왕과 왕비(오른쪽). 왕은 안에 쓴 내관과 밖에 쓴 백라관이 뚜렷이 구분된다. 당시 고구려인은 이중관을 썼는데 흰 비단 관인 백라관은 왕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풍만하면서도 당당한 올린머리의 왕비는 화려한 머리장식과 통통한 얼굴을 가리는 화장법이 눈에 띈다.

    재야의 을파소(乙巴素)를 국상으로 기용해 춘대추납(春貸秋納)의 구휼책인 진대법을 실시한 고구려 제9대 고국천왕(故國川王·재위 179∼197)이 세상을 떠났다. 왕은 후사가 없었고 발기(發岐), 연우(延優), 계수(須) 세 아우만 있었다.

    그때 왕후 우씨(于氏)는 발상(發喪)하지 않고 즉시 발기에게 가서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천연한 태도로 “숙씨(叔氏), 지금 왕의 후사가 없는데 나는 아들 낳을 가망이 없으니 숙씨가 종사를 이으시오”라고 했다. 발기는 아직 왕이 살아 있는 줄 알고 “왕후께서는 걱정 마시오. 춘추가 왕성하신데 무슨 걱정이 되겠소. 하늘의 운수는 다 때가 있는 것이오. 어찌 가볍게 의논하리오. 더구나 지금 밤이 깊었는데 부인의 몸으로 홀로 다니는 것이 어찌 예(禮)라 하리까”라며 불쾌하게 대답했다. 우씨는 무안을 당한 것이 분하고 부끄러워 아무 소리도 않고 다음 아우인 연우에게 갔다.

    산상왕 등극으로 ‘형제의 난’ 발생

    연우는 형수인 왕후 우씨가 우는 것을 보자 의관을 정제하고 대문까지 마중 나와 영접하며 좌정한 뒤 주안상까지 마련했다. 비로소 안정을 찾은 우씨는 매우 감격해 “숙씨, 오늘 저녁에 대왕이 돌아가셨소. 아들이 없으므로 응당 왕위가 발기 숙(叔)에게 갈 것으로 생각하고 그의 처소로 갔었소. 그랬더니 나에게 여자가 야반에 다닌다고 꾸짖으며 무안을 줬소. 그런 법이 어디 있소”라고 했다. 이에 연우는 우씨를 더욱 우대하고 손수 칼을 들고 고기를 썰어 대접했다. 그런데 연우가 너무 좋아 허둥지둥 칼질하다 손을 다쳤다. 우씨는 이것을 보고 자기 치마끈을 풀어 손가락을 싸매줬다.

    우씨의 고운 손이 닿을 때마다 그 촉감은 연우의 마음을 야릇하게 만들었다. 다 싸매준 뒤 우씨가 돌아가면서 연우에게 “밤이 깊어 홀로 돌아가기 무서우니 나를 궁까지 데려다주오”라고 부탁했다. 궁문 앞에 다다르자 우씨는 연우의 손을 잡고 궁궐 안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왕후 우씨가 선왕의 유명(遺命)이라고 속여 여러 신하로 하여금 연우를 왕으로 세우게 했다. 이로써 차례를 어기고 연우가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제10대 왕인 산상왕(山上王·재위 197∼227)이다.



    이에 화가 난 발기는 전 왕족인 소노부 세력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왕궁을 쳤으나 패퇴하고 요동으로 건너가 고구려의 적이던 공손씨(公孫氏)와 손잡고 재도전했다. 이때 막내 계수는 형인 산상왕의 명을 받고 발기의 군대를 물리쳤다. 궁지에 몰린 발기가 “네가 이 늙은 형을 죽이려느냐”라고 소리치자 계수는 “비록 연우 형님이 나라를 양보치 않은 것은 대의가 아니나, 그렇다고 한때의 분을 참지 못하고 나라를 전복하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죽은 뒤에 무슨 얼굴로 선인(先人)을 대하려 하십니까”라고 응수했다.

    계수는 차마 형 발기를 죽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발기는 너무나 당당한 동생의 일갈에 잘못을 뉘우치고 제 손으로 목을 찔러 죽었다. 형의 죽음 앞에서 계수는 통곡하고 시신을 거둬 후히 장례를 치른 뒤 고구려로 돌아왔다.

    계수가 개선하자 산상왕은 기쁘면서도 한편 심기가 좋지 않았다. 계수가 발기의 죽음을 애도한 것은 자신의 무도함을 탓하는 뜻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왕의 진노가 터지자 계수는 “대왕께서 왕위를 사양치 않은 것은 분명 형은 우애하고 아우는 공손해야 하는 의가 없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신은 대왕의 미덕을 드높이고자 형의 시신을 장례지낸 것인데, 이로 말미암아 대왕의 노여움을 살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대왕이 만약 어짊으로써 악을 쫓고 예로써 형을 장례지낸다면 누가 대왕을 불의하다고 하겠습니까. 신은 할 말을 다 했으니 비록 죽더라도 산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형리(刑吏)의 처형을 받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산상왕은 자기의 허물을 뉘우치고 왕례(王禮)로써 발기의 장례를 치렀다.

    “신들도 질투, 묘소에 나무를 심어라”

    ‘계수’의 처세술이 돋보이는 이유

    11월10일 서울역 광장에서 세종시 건립 원안 이행을 촉구하는 충남 연기군 주민들. 1800년 전 계수의 인간적인 처세술을 본받아 이러한 국가적 난제를 풀어보는 건 어떨까.

    골육상쟁 끝에 왕이 된 산상왕은 다시 왕후를 맞아들이지 않고 형수 우씨를 왕후로 삼았다. 시동생과 형수의 결혼은 당시 형사취수혼(levirate)으로 왕통 계승의 한 방법이었다. 그 후 우씨는 형제간의 비극적인 말로에 대해 늘 자신이 한 일을 꺼림칙해했다. 그러던 중 산상왕이 재위 31년 5월에 죽고, 그가 후궁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 동천왕(東川王·209∼248, 재위 227∼248)이 즉위했다.

    세월이 흘러 동천왕 8년(234년) 9월 태후 우씨는 자신의 명(命)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알고 유언하기를 “내가 실행(失行)했으니 죽어서 무슨 면목으로 선왕(고국천왕)을 대할 수 있겠소. 내가 죽거든 어느 귀퉁이에 버려주오. 다행히 장사지내려거든 선왕의 능으로 가지 말고 산상왕릉 옆에 묻어주오” 하고는 세상을 떠났다.

    동천왕은 태후 우씨의 유언대로 산상왕릉 옆에 묻어주고 동분(同墳)을 만들었는데, 산상왕의 능과 고국천왕릉은 마주보고 있었다. 그 후 나라에 병이 유행하고 여러 사람이 죽자 동천왕은 이상스러운 일로 여겨 산천에 기도드리며 무녀를 불러 굿을 했다. 며칠 후 무녀가 임금 앞에 나와 아뢰기를 “근자에 고국천왕의 영이 신의 몸에 부접해 말씀하시기를 ‘수일 전 우씨의 혼이 천상에 돌아와 산상왕에게 가는 것을 보고 분에 못 이겨 쫓아가 싸우다 나중에 생각하니 차마 나라 사람 볼 낯이 없다. 네가 조정에 말하여 내 능을 보이지 않도록 가리어다오’ 하셨습니다”라고 전했다.

    그러자 임금은 “과연 그럴듯한 말이다. 신들도 서로 질투하고 싸우는구나. 그러니 산 사람인들 오죽하겠느냐” 하고는 신하들과 능 가리는 문제를 의논했다. 며칠을 두고 생각해 능 앞에 소나무를 한 그루 심었으나 역시 능과 능이 마주보여 나중에 일곱 그루나 심었다. 그러자 두 능 사이가 보이지 않게 됐고, 그때부터 백성들이 안심하고 살았으며 병도 나돌지 않았다. 그 후 이것이 유례가 되어 왕릉은 물론 어느 산소든지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이상은 ‘삼국사기’ 권 16 고구려 산상왕, 동천왕 본기에 수록돼 전하는 일화다.

    우리보다 1800여 년 먼저 산 발기, 연우, 계수. 이들 3형제가 보여준 처세와 포용은 아집과 독선이 난무하는 오늘날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서로의 허물을 인정하고 명분을 쌓으며 갈등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특히 막내 계수가 보여준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처세술이 돋보인다. 이러한 슬기가 세종시 법안, 4대강 살리기 사업, 친일인명사전 발간 등으로 서로의 주장이 극한대립 양상을 보이며 얽히고설킨 대한민국의 난제를 푸는 해법이 될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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