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73

2009.02.17

폭설 내리던 날 주차장에서 낄낄 댄 사연

  • 이기호 antigiho@hanmail.net

    입력2009-02-11 12: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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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설 내리던 날 주차장에서 낄낄 댄 사연
    이번 겨울, 이사 와 처음 살게 된 호남은 눈이 많이 내리는 고장이다. 고향인 강원도도 ‘눈’ 하면 남부럽지 않은 곳이었지만, 이곳 역시 만만치 않다. 지금은 날이 많이 풀려 눈이 모두 녹아내렸지만, 설 전까지만 해도 염화칼슘으론 어찌해볼 수 없는 눈이 도로 가득 쌓여 있었다. 그래서 오늘은 자동차 얘기를 해보고자 한다.

    ‘눈과 자동차’ 하면 언뜻 어울리지 않는 조합처럼 보이지만, 우리의 적나라한 일상은 그렇게 어울리지 않는 조합에서 의외의 결합을 드러내 보이는 경우가 잦다. 폭설이 내리는 날, 자동차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유심히 바라보면 우리의 현재가 보이기도 한다. 내 경우엔 분명 그랬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주차공간이 지상과 지하 두 군데로 나뉘어 있다. 지하주차장은 한 층으로 돼 있고, 지상에도 딱 그만큼의 주차공간이 있다. 사이좋게 반반씩 주차하면 아무 문제 없이 입주자들의 자동차를 모두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다. 퇴근하는 순서대로 착착, 지하와 지상 순으로 주차하면 될 일인데… 문제는 폭설이 2~3일 연속 쏟아지던 날부터 벌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차가 모두 지하주차장으로만 내려가려 했다. 지하주차장이 이미 포화 상태인데도 출구나 입구, 코너를 가리지 않고 꾸역꾸역 사람들은 차를 몰고 내려갔다. 그러니 어떻게 되었겠는가. 아무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 차가 차로 가로막힌 상태가 돼버린 것이다.

    물론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아침마다 눈으로 뒤덮인 차 유리를 닦아내는 것이 여간 버거운 일이 아니고(대부분 눈이 꽝꽝 얼게 되니까요), 걸핏하면 빙판길에 걸려 헛바퀴질을 하니 밤새 뽀송뽀송, 안전하게 차를 보호해주는 지하주차장을 선호하는 것은 이해되고도 남는 일이다. 한데 그게 무언가 ‘관계의 역전’으로까지 이어지는 것 같아 마음이 좀 씁쓸해졌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바로 앞집에 사는 나와 동년배인 남자는 폭설 기간 내내 아예 차를 몰고 다니지 않았다. 이유인즉슨 좋은 자리를 남에게 빼앗기기 싫기 때문이란다.

    ‘후진 차’를 모는 덕에 느낀 남다른 행복

    “아, 내가 그 자리 잡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한번 몰고 나왔다가 자리 없으면 어떡하라고요.”

    그래서 남자는 며칠 동안 계속 버스를 타고 다녔다. 늘 자신이 차로 유치원까지 데려다주던 아이도 덩달아 아빠와 함께 눈을 맞고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 눈치였다. 아, 뭐 꼭 그렇게까지.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남자에게 말끝을 흐리며 웃어 보였지만, 남자는 단호했다.

    “거, 아직 할부도 안 끝난 차인데…, 염화칼슘이 차엔 쥐약이거든요. 형씨도 웬만하면 이런 날씨엔 차 몰고 다니지 말아요.”

    남자는 그러면서 자신의 손을 꼭 붙잡고 있는 아이에게 “사람은 모름지기 자기 물건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하는 거야”라는 말을 덧붙였다. 덕분에 나는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내내 앞집 아이에게 ‘자기 물건을 함부로 다루는 위인’으로 낙인찍혔다. 뭐, 그럴 수도.

    같은 라인에 사는 또 다른 중년남자는 폭설이 내린 기간 내내, 자신의 아내를 퇴근 시간에 맞춰 지하주차장에 대기시켰다. 30분 전에 미리 공간을 확보하라는 지시를 내린 모양이었다. 지하주차장을 통해 음식물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온 아내는 혀를 끌끌 차며 내게 말했다.

    “세상에, 좋은 자리 못 잡았다고 아내를 볶는데…. 그 남잔 아내보다 차가 더 소중한 모양이야.”

    나는 책을 읽다 말고 아내에게 물었다.

    “만약 내가 그런 부탁을 하면 넌 어떻게 할 건데?”

    “나? 그냥 뭐…. 이삿짐 트럭을 먼저 부르겠지.”

    아내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나도 그런 아내의 반응에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게 농담으로만 들리지 않은 까닭이었다.

    설 연휴 전날엔 늦은 약속을 끝내고 자정 무렵 집으로 돌아왔다. 역시나 폭설이 내리고 있었고, 지하주차장은 포화 상태였다. ‘자기 물건을 함부로 다루는 위인’인 나는 곧장 주차구획선도 다 지워진 지상주차장으로 차를 몰고 갔다. 넓은 지상주차장에는 달랑 차 3대만 주차돼 있었다. 나는 크게 코너를 돌아 지상주차장 한가운데 차를 세웠다. 그리고 눈을 맞으며 담배를 한 대 피웠다.

    그러고 있으려니까, 차 한 대가 내 옆으로 다가와 주차하는 것이 보였다. 11층에 사는 아는 남자였다. 남자와 나는 악수를 나누고, 담배를 한 대 더 나눠 물었다.

    “눈이 오니까 주차장이 썰렁하네요.”

    남자는 휘 주차장을 둘러보며 말했다.

    “저기, 우리가 좀 잘못된 걸까요?”

    나는 남자에게 웃으면서 물었다.

    “좀 잘못된 것도 있겠죠.”

    남자는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으면서 말했다.

    “어떤 점이…?”

    “거 뭐, 자본주의적이지 못한 탓 아니겠습니까?”

    남자는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다시 말했다.

    “에이, 뭐 그렇게 거창하게까지야.”

    나는 불 꺼진 아파트 단지를 둘러보며 덧붙였다.

    “아무래도 우리 차가 후지니까.”

    내 말에 남자는 낄낄거리면서 웃기 시작했다. 덩달아 나도 소리내어 웃었다.

    폭설이 내리는 주차장에서 다 큰 어른 두 명은 그렇게 오랫동안 웃고 있었다. 눈은 금세 차를 덮어, 우리의 차가 ‘후지다’는 사실을 포근히 가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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