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69

2009.01.13

88만원 세대 ‘포크’를 노래함

비루한 현실 담은 넋두리 가사에 다양한 표현 인기몰이

  • 구가인 기자 comedy9@donga.com

    입력2009-01-07 17: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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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8만원 세대 ‘포크’를 노래함

    최근 큰 인기를 얻고 있는 포크록 밴드 ‘장기하와 얼굴들’.

    2008년에 대박을 터뜨린 ‘가요계의 버락 오바마’는 장기하였다. 장기하가 이끄는 밴드 ‘장기하와 얼굴들’의 ‘싸구려 커피’는 지난 5월 발표된 이후 UCC(사용자 손수제작물)를 중심으로 알려지기 시작해 현재 다량의 앨범 판매와 온라인 음원 판매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장기하의 소속사인 붕가붕가레코드의 집계에 따르면 2009년 1월 현재 ‘싸구려 커피’가 수록된 싱글 음반 판매는 1만 장 돌파를 앞두고 있다. 지난해 원더걸스의 음반 판매가 6만 장에 못 미친 것에 비하면 인디 출신 뮤지션의 이러한 인기는 이례적인 ‘현상’이다. 붕가붕가레코드 관계자조차 “처음엔 약 500장 팔릴 것으로 예상했다”고 말할 정도(직접 CD 라이터로 굽고 라벨을 손으로 붙이는 ‘가내수공업’으로 제작된 ‘싸구려 커피’ 음반은 밀려오는 주문에 한동안 품절 소동을 빚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장기하의 성공 요인으로 ‘재미’와 음악적인 ‘독특함’을 꼽는다. 대중문화평론가 조원희 씨는 대중이 장기하에게 열광하는 이유에 대해 “70년대 산울림이 보여줬던 신선함과 닿아 있다”고 평했다.

    ‘인디신의 빅뱅’ 장기하

    “우선 음악이 독특하죠. 완전히 새로운 형식이라기보다는 오래된 한국 대중음악 전통을 계승하고 있어요. 거기에 기존의 엄숙함이나 권위주의에서 벗어난 장기하의 태도에 열광하는 거죠.”



    노랫말 역시 인기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대중음악평론가 김작가 씨는 장기하의 노래가 담고 있는 ‘이야기의 힘’을 강조했다. 김씨는 “동네 실업자 아저씨가 내뱉는 넋두리 같은 가사들은 한국 대중음악에서 사라졌던 해학을 되살린다”며 “세밀하고 기발한 묘사에 무릎을 치고 쓴웃음을 짓게 된다”고 평했다.

    주목할 점은 장기하와 얼굴들이 자신들의 음악을 ‘포크록’이라고 칭한다는 것이다. 1960~70년대 유행한 포크록은 저항성을 생명으로 하는 노래지만, 이들의 음악에서 드러나는 저항은 이전 세대의 그것과 닮은 듯 다르다.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 미지근해 적잖이 속이 쓰려온다/ 눅눅한 비닐장판에 발바닥이 쩍 달라붙었다 떨어진다/ 이제는 아무렇지 않어 바퀴벌레 한 마리쯤 슥 지나가도/ 무거운 매일 아침엔 다만 그저 약간의 기침이 멈출 생각을 않는다.

    우리는 느리게 걷자 걷자 걷자/ 우리는 느리게 걷자 걷자 걷자/ 그렇게 빨리 가다가는 죽을 만큼 뛰다가는/ 아 사뿐히 지나가는 예쁜 고양이 한 마리도 못 보고 지나치겠네.

    장기하의 노래에는 싸구려 커피를 마시고 습한 반지하 방에서 뒹굴거리는 21세기형 룸펜 혹은 ‘88만원 세대’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언뜻 애수를 자아내기도 하지만, 비참한 상황보다는 이를 견디는(받아들이는) 유머가 앞서 부각된다. 적극적인 저항정신이 담긴 것도 아니다. 대신 ‘싸구려 커피’를 마셔야 하는 처지에서도 ‘느리게 걷자’고 이야기하는 이 정서에는 일종의 ‘루저 스피릿’이 담겨 있다. 웹진 가슴네트워크 박준흠 대표는 장기하의 음악이 이전에는 잘 드러나지 않던 루저의 감정을 색다른 방식으로 표현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기본적으로 장기하 음악의 정서는 주류와 절연하겠다는 낙오자 정신이죠. 이는 기존 인디신의 펑크 뮤지션들이 보여준 정서와 유사해요. 하지만 펑크 뮤지션들에 비해 장기하는 이런 정서를 담은 가사가 특히 돋보이죠.”

    장기하처럼 어쿠스틱한 음색에 가사를 중시하는 포크 음악은 최근 인디신을 중심으로 ‘88만원 세대’라 불리는 젊은 층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조원희 씨는 “2000년대 초중반까지 연주력을 최고 가치로 생각하던 인디신의 분위기가 2000년대 중반부터 하나의 범주로 묶기 어려울 만큼 장르가 다양해지고, 기존 포크의 표현법을 가진 음악인들이 등장했다”고 설명했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이나 ‘불나방스타 쏘세지클럽’, ‘하찌와 TJ’ 등은 모두 포크를 주 장르로 내걸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노래 역시 루저 스피릿이 저항을 대신한다. 이들의 노래에는 치킨 배달을 하고, 지푸라기 잡듯 장사를 해야 하는 정글 같은 현실이 블랙유머와 함께 배어 있다.

    88만원 세대 ‘포크’를 노래함

    7080세대 포크의 대표주자인 양희은과 배철수(왼쪽). 인디신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어쿠스틱 음악과 서정성에 주목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배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더군/ 난 부끄러워/ 키 작고 배 나온 닭 배달 아저씨/ (중략)/ 내 인생의 영토는 여기까지/ 주공 1단지는 그대의 치킨런/ 세상은 내게 감사하라 하네/ 그래 알았어/ 그냥 찌그러져 있을게.

    정글숲을 헤쳐나가자 엉금엉금 기어나가자/ (중략)/ 나는 악어떼가 너무 두려웠지만 이 정글을 떠날 수가 없었네/ 나 이 정글을 떠나 살 수 없었기에 그들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네/ 나는 악어떼가 너무 두려워 알아서 길 수밖에 없었네.

    도대체 누구를 믿어야 하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지푸라기도 잡고 싶습니다/ 알라, 하느님, 부처님이여/ 장사하자 장사하자 장사하자 먹고살자/ 오늘도 방실방실 밝은 대한민국의 하늘.

    1970년대의 한국 포크 스타로 분류되는 김민기 양희은 송창식 서유석 조동진 등의 스타일을 하나로 묶을 수 없듯, 요즈음의 뮤지션들 역시 특징이 제각각이다. 현재의 청년문화를 담은 루저 스피릿류의 포크와 별개로 포크의 서정성에 주목하고 어쿠스틱 음악을 선보이는 이들도 있다. 최근 대중적으로 관심을 받고 있는 재주소년, 한희정, 루싸이트 토끼 등은 자신의 주 장르를 포크 혹은 포크 스타일이라고 규정한다. 물론 이들의 음악을 포크로 규정하는 것에 대해 반대 의견도 많다. 대중음악평론가 임진모 씨는 “포크는 사회적인 저항을 담고 있어야 한다”면서 “최근 포크를 내세운 젊은 뮤지션들의 음악은 포크의 일부 특징을 음악의 소재로 사용할 뿐 저항이라는 알맹이가 빠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70년대 군사정권의 암흑기에서 포크송 가수들의 노래가 청년들의 가슴을 적셔주었듯, 획일적인 아이돌 문화와 88만원 세대의 비루한 현실을 이들의 21세기형 포크가 달래주고 있다는 사실만은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70년대는 사회 전반뿐 아니라 대중음악계도 굉장히 비루한 시기였죠. 하지만 그러한 암흑기에 대한 고민이 음악에 담겨 수준 높은 음악도 많이 나왔어요. 그 음악들이 80, 90년대 대중음악 전성기를 만드는 데 기여했고요. 지금 가요계가 전반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지만 그 못지않게 좋은 음악이 많이 나올 거라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요.”(조원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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