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69

2009.01.13

죽음도 뛰어넘은 석사학위

만학도 故 신천삼 씨, 고려대 논문 통과 … 하늘에서 꿈 실현

  • 배수강 기자 bsk@donga.com

    입력2009-01-07 17: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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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도 뛰어넘은 석사학위

    2006년 고려대 대학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한 신씨 (맨 좌측). 고(故) 신천삼 씨 부인 김광연 씨와 아들 명호 씨, 대학원 동기생 이병한 씨(왼쪽부터)(가운데사진).신씨의 논문 앞부분. 심사위원회를 통과했다는 지도교수의 설명이 실려 있다(맨 우측).

    “남편은 매일 아침 돌아가신 어머님께 기도했어요. 조금만 더 살게 해달라고, 좀더 공부하게 해달라고. 논문을 완성하려 했는지….”

    남편이 생각날 때마다 입술을 깨무는 김광연(56) 씨는 옆에 있던 아들의 손을 꼭 잡았다. 옷소매로 눈물을 훔치고는 남편의 대학원 석사 논문집 겉표지를 닦아냈다. 검은색 논문 표지 위로 이슬 같은 눈물이 떨어졌다. 그렇게 인터뷰는 중간중간 쉬어 가야 했다.

    김씨의 남편 신천삼 씨는 지난 11월7일 골수이형성증후군과 간암 등으로 세상을 떴다. 향년 61세. 만학도로 고려대 정책대학원에서 석사학위 논문을 쓰고 있던 그는 고대하던 석사모를 이승에선 쓰지 못했다. 미완성 논문은 그렇게 컴퓨터에 저장된 채 잊혀갔다.

    “행여 가족들이 ‘몸도 좋지 않은데 괜한 신경 쓴다’며 걱정할까 알리지도 않은 거 같아요. 그래서 논문에 대해선 전혀 몰랐어요.”

    그런데 그가 2009년 2월 정식 정치학 석사학위 수여자 명단에 이름이 올랐다. 논문심사도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등진 그가 어떻게 석사학위를 받았을까. 고인(故人)이 마술이라도 부린 것일까.



    신씨는 서울 동북고교를 졸업하고 외국계 회사와 삼성전자를 다녔고 무역회사와 패스트푸드점, 통신네트워크회사 등을 운영했다. 부인 김씨의 말을 빌리면 ‘앞만 보고 달린 인생’이었다.

    “15년간 삼성에 근무했는데 그땐 새벽까지 현관문을 잠그지 못했어요. 새벽 3시 퇴근이 기본이었거든요.”

    패스트푸드점 입점을 반대하는 용산전자상가에 구청장과 직원들을 모아놓고 입점 이유를 브리핑한 일화는 유명하다. ‘외국인들에게 달러를 쓰게 하려면 휴식 공간이 있어야 하고, 그래야 입점 업체들의 매출도 오른다’는 논리였다. 결국 현장에서 ‘오케이’를 받았고 2001년 11월 패스트푸드점을 열었다. 전자상가를 찾은 외국인들의 안내와 통역도 그의 몫이었다.

    절치부심 끝에 찾아온 병마

    40여 년을 일에 묻혀 산 그는 2002년 서울사이버대 국제무역물류학과에 입학해 만학도가 됐다. 내친김에 2006년에는 고려대 대학원에 입학했다. 고3 때 서강대 영문과에 합격했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잇지 못한 아쉬움도 큰 동기가 됐다. 대학원에 들어가서는 각종 발표와 토론을 도맡았고 출석률도 100%였다. 백혈병과 간경변 등으로 병원을 오가면서도 수업은 ‘필참(必參)’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을 만나기는 어려울 겁니다. 매번 맨 앞줄에 앉아 메모를 하면서 날카로운 질문을 쏟아냈죠. 그 때문에 교수들도 수업 준비를 많이 해야 했어요.”

    고려대 엄상윤 연구교수는 신씨를 그렇게 기억했다.

    그런 그에게도 시련은 왔다. 2008년 4월 논문심사 전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종합시험에 낙방한 것. 논문심사도 한 학기 연기해야 했다. 당시 코피가 계속 흘러 제대로 시험을 준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때부터 10월 2차 종합시험 때까지 정치학 원서를 읽어가며 공부를 하시더라고요. 충격이 컸던지 병원 가는 날도 잦아졌고요. 8절지 앞뒤로 빽빽이 예상문제들의 답을 써가며 대비했거든요.”

    대학원 동기생인 이병한(44·농협중앙회 NH 카드분사 차장) 씨는 혹여 건강이 악화될까 한 학기 휴학하라고 수차례 권했다고 한다.

    절치부심(切齒腐心). 결국 신씨는 10월21일 종합시험에 합격했고, 25일에는 고려대 이신화 지도교수(정치학)와 논문 세미나도 거쳤다. 하지만 병마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31일 수혈을 받고 다음 날 전남 순천 어머니 산소를 다녀온 뒤부터 식사 후 소화가 되지 않았고 결국 11월5일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유품을 정리하다 1988년 신체검사 결과지가 나왔어요. 헤모글로빈 수치가 낮게 나왔는데 그때부터 가족에게도 숨기고 통원 치료를 받으셨더라고요. 그때 제대로 건강관리를 하셨더라면….”

    심사자 없는 눈물의 논문심사

    신씨의 아들 명호(34) 씨는 말을 잇지 못했다.

    평소 자신의 사무실에서 조용히 논문작업을 하던 그였기에 직원이나 가족들도 논문 생각을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생전에 신씨와 함께 논문자료를 찾았던 이병한 씨는 그의 모범적인 학교생활과 논문에 대한 열정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학교 측에 고인의 사정을 알렸고, 유가족에게는 신씨의 논문이 있는지 알아봐달라고 했다. 다행히 신씨의 컴퓨터 속에는 ‘내·외부적 급변사태가 체제변화 및 붕괴에 미치는 영향 : 북한 사례와 한국의 대응방안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71쪽 분량의 논문이 발견됐다. 본론 일부와 결론 부분은 미완성이었다. 이씨는 논문을 들고 이 교수와 상의했고, 이 교수는 전례 없는 ‘심사자 없는 논문심사’가 가능한지 등을 학교 측과 논의했다.

    이씨는 고인의 논문을 마무리하기 위해 자료를 찾는 등 논문 준비를 도왔다. 이씨로서도 논문의 나머지 부분을 자신이 쓸 경우 자칫 고인의 뜻을 훼손할 수 있어 조심스러웠다.

    다행히 며칠 뒤 유가족이 이씨에게 전화를 했다. 책상서랍에서 깨알 같은 글씨의 논문 나머지를 찾아낸 것. 건강이 갑자기 악화되면서 미처 워드작업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결국 신씨의 아들이 워드작업으로 논문을 마무리했고 12월13일 부인 김씨가 남편을 대신해 논문심사를 받았다. 이 교수 등 심사위원들이 30여 분간 논문심사를 할 때 김씨는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이 교수는 심사위원들에게 신씨의 성실한 대학원 생활을 얘기했고 심사위원들도 논문에 무리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고인의 이름이 석사학위 수여자 명단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이 교수는 “열심히 노력한 논문”이라고 평가했다. 유가족은 12월26일 신씨의 49재 때 111쪽 분량의 논문을 바쳤다.

    “남편은 6·25 전쟁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랐어요. 그래서 공부도 일도 뭐든 열심이었죠. 오늘따라 학교 갈 때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던 얼굴이 자꾸 떠오르네요.”

    부인과 아들, 동기 3명은 12월29일 그가 다니던 고려대 정경관 건물을 둘러보며 그를 추억했다.

    고인이 생전에 온몸으로 실천해 보인 성실함이 교수와 학우들의 마음을 움직여 마술을 부린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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