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51

2008.09.02

“올림픽 金 이어 인생 금메달도 따야죠”

한국 역대 금메달리스트들의 현주소 상당수가 지도자의 길 걷거나 사업가·샐러리맨 변신

  • 기영노 스포츠평론가 younglo54@yahoo.co.kr

    입력2008-08-25 14: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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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림픽 金 이어 인생 금메달도 따야죠”

    서울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김영남 씨(오른쪽)와 파올렛 씨는 카자흐스탄에서 함께 비즈니스를 한다. 파올렛 씨는 카자흐스탄에서 장관을 지냈다.

    “내가 이겨서 일본의 국기가 올라가고

    일본의 국가가 울릴 것을 알았다면

    나는 올림픽에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고(故) 손기정 선생

    8월18일 ‘뉴욕타임스’ 인터넷판은 ‘역대 올림픽 메달리스트 중에는 운동을 그만둔 뒤 새로운 삶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공황장애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고 보도했다. 미국의 스티븐 운게르라이더 박사팀이 수영 하키 펜싱 등 12개 종목에 참가한 미국 올림픽 대표선수 57명을 조사한 결과, 이들 중 40%가 올림픽 이후 적지 않은 문제를 겪었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올림픽 메달리스트 가운데 상당수가 이직에 성공해 성공적인 삶을 누리고 있다. 한 예로 1980년 레이크플래시드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에서 5개의 금메달을 싹쓸이한 미국의 에릭 하이든 씨는 외과의사로 변신해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여자 금메달리스트인 우크라이나의 옥사나 바이울 씨는 알코올 중독 등 여러 문제를 겪으면서 힘든 시절을 보냈다.

    양정모·하형주는 대학교수로 재직

    1984년 LA올림픽과 88년 서울올림픽 남자 다이빙에서 각각 2개의 금메달을 획득해 올림픽 4관왕에 빛나는 미국의 그레그 루가니스 씨는 “모든 것을 올림픽에 맞춰 생활하다 보면 가족, 직업, 취미 등 포기하는 가치가 너무 많다”고 술회했다.

    한국은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양정모 선수가 레슬링 자유형 페더급에서 금메달을 딴 이후 2004년 아테네올림픽까지 하계올림픽에서만 55개의 금메달을 획득했다. 1936년 고(故) 손기정 선생이 일본 국가대표로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것을 포함하면 56개다. 배드민턴이나 탁구 복식, 단체종목인 여자 핸드볼의 금메달리스트를 포함한다면 하계올림픽 금메달리스트는 90명에 달한다.

    대부분의 금메달리스트는 보통의 생활인답게 결혼하고 자녀를 낳고, 직장생활을 하거나 가사를 돌본다. 아직 결혼하지 않았거나 이혼한 사람도 있다. 그리고 파란만장한 삶을 사는 사람도 있다.

    몬트리올올림픽에서 건국 이후 최초로 금메달을 딴 양정모(55) 씨는 동아대 스포츠과학대학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며, 2008 함평나비곤충엑스포 홍보대사 등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어무이, 고생 끝났심더.” 하형주(46) 씨는 LA올림픽 유도 남자 -95kg급에서 금메달을 딴 후 전화통화에서 억센 경상도 사투리로 어머니를 찾았다. 이후 그는 동아대를 졸업하고, 모교의 스포츠 과학대학 교수로 일하며 체육계를 노크하고 있다. 고(故) 민관식 전 대한체육회장이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중에서 나와야 한다”며 그의 뒤를 밀어준 바 있다. 그는 IOC 위원을 꿈꾸고 있으나 주변 상황이 여의치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원기 보험 비즈니스로 성공 … 김영남도 자원개발업 진출

    LA올림픽 때 양궁 여자 경기에서 첫 금메달을 딴 서향순(41) 씨는 어머니와 이름이 똑같은데, 이는 태몽 때문이라고 한다. 그가 태어난 지 이레째 되던 날 어머니의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자신의 이름과 딸 이름을 똑같이 지으면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해 ‘향순’이라 지었다고 한다. LA올림픽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62kg급에서 금메달을 딴 김원기(47) 씨는 특이하게도 보험업을 시작해 업계에서 베테랑으로 군림하고 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끈기로 보험 비즈니스에서도 성공한 셈이다.

    서울올림픽에서 양궁은 남녀 개인, 단체전에 걸린 4개의 금메달 가운데 3개를 획득했다. 양궁 여자 개인전과 단체전에서 2관왕을 차지한 김수녕(38) 씨는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도 출전해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땄다. 그는 4개의 금메달로 하계올림픽 최다관왕이다. 서울올림픽에서 그와 함께 금메달을 목에 건 윤영숙 씨는 결혼해 미국으로 이민 갔고, 왕희경 씨는 양궁계를 떠나 주부로 산다. 서울올림픽 양궁 남자 단체전 금메달리스트인 전인수 씨는 울산 남구청, 이한섭 씨는 동서대, 박성수 씨는 인천 계양구청에서 후배들을 가르치고 있다.

    서울올림픽에서 한국 선수단에 첫 금메달을 안겨준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74kg급 김영남(49) 씨는 카자흐스탄에서 사업가로 변신했다. 올림픽 결승전에서 그에게 패한 옛 소련의 파올렛(48) 씨가 카자흐스탄에서 기반을 잡은 뒤 그를 불러 사업 파트너로 삼았다. 김씨는 카자흐스탄에서 건설업체 ‘천산개발’과 자원개발업체 ‘카즈너지’를 거느린 성공한 기업인이다.

    “올림픽 金 이어 인생 금메달도 따야죠”

    1.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손기정. 2.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레슬링 양정모. 3. 1984년 LA올림픽 레슬링 김원기. 4. 1984년 LA올림픽 양궁 서향순.

    한명우·김재엽 사업 실패로 시련 겪기도

    “둘이 닮았어요? 전생에 형제였나 봐요. 마치 텔레파시가 통하는 것 같을 때가 있어요, 이 친구랑은. 카자흐스탄에서 처음 3년은 흔들렸어요. 동물의 왕국에서 저는 초식동물이었죠. 하지만 10년을 보고 갔기 때문에 크게 절망하진 않았어요. 레슬링을 시작하고 10년 만에 금메달을 땄거든요. 사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10년을 미쳐서 매달린다면 못 해낼 게 없다고 자신해요.”(김영남 씨)

    “올림픽의 궁극적 의미는 스포츠로 평화와 우정을 나누자는 것이지, 감정을 갖고 싸우는 것이 아니잖아요. 물론 경기에서 졌을 땐 서운했지만, 그것이 우정을 맺는 데 걸림돌이 되진 않았습니다. 이 친구와 저의 목표는 둘이 함께 카자흐스탄에서 최고 기업을 일구는 것입니다.”(파올렛 씨)

    그러나 가장 무거운 체급인 레슬링 자유형 82kg급에서 아시아 선수로는 처음으로 금메달을 딴 한명우(52) 씨는 김씨와 달리 사업에서 실패했다. 현재 레슬링협회 전무이사를 맡고 있는 그는 지금도 수십억원을 투자한 사업 파트너와 연락이 끊겨 전전긍긍하고 있다. 1993년 말레이시아에 대표팀 감독으로 간 한씨는 한국을 공급처로 삼아 현지에서 숯불공장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97년 외환위기가 터져 빚만 떠안은 채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레슬링협회 훈련이사라는 직책을 맡았지만 봉급은 거의 없었다. 밖에 나갈 차비조차 만만치 않던 시절이었다.

    서울올림픽에서 유도는 금메달 2개를 따는 등 선전했다. 당시 가장 낮은 60kg급에서 금메달을 딴 김재엽(44) 씨는 동서울대 교수, 66kg급을 제패한 이경근(46) 씨는 유도 명문인 한국마사회 수석 코치로 재직 중이다. 동서울대 경호학과 교수로 일하는 김씨는 금메달을 딴 직후 대한민국의 아들이요, 영웅이었다. ‘금메달리스트 김재엽’은 연일 언론에 오르내렸고 못할 일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런 기분도 잠시, ‘영광의 88년’이 지나고 김씨가 부딪힌 세상살이는 끔찍할 만큼 냉정했다. 선수생활을 접고 시작한 유도팀 코치는 소속 선수들이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미끄러진 게 문제가 돼 계속할 수 없었다. 유도가 아닌 다른 삶을 떠올려본 적 없던 그는 방황했다. 그의 방황은 결국 이혼으로 이어졌다. 금메달 커플로 화제를 모은 핸드볼 선수 출신의 아내 김모 씨와 헤어진 것이다. 이후 ‘제2의 인생’을 꾸리고자 시작한 사업에서도 연거푸 실패의 쓴잔을 마셨다. 인터넷 전자상거래, 일식집, 제조업, 광고사업 등을 하면서 빚만 남긴 것이다. 사업 파트너에게 사기당하고 부모님 재산까지 날릴 무렵, 그는 “차라리 금메달리스트라는 꼬리표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털어놨다.

    복싱은 역대 올림픽에서 금메달 2개를 획득했는데, 서울올림픽 플라이급 금메달리스트 김광선(44) 씨는 ‘다이어트 복싱’을 고안해 서울 강남과 강북에 2개의 체육관을 열었다. KBS에서 해설위원으로도 활약 중이다. 판정 논란 끝에 서울올림픽 라이트미들급에서 금메달을 딴 박시현(43) 씨는 국가대표 상비군 코치로 일한다.

    “올림픽 金 이어 인생 금메달도 따야죠”

    1. 1984년 LA올림픽 유도 하형주. 2. 1988년 서울올림픽 양궁 김수녕. 3. 1988년 서울올림픽 유도 김재엽. 4.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배드민턴 방수현.

    탁구 양영자, 남편과 함께 몽골서 선교활동

    서울올림픽 탁구에선 2개의 금메달이 나왔다. 여자 복식에서 금메달을 딴 양영자(44) 씨와 현정화(39) 씨는 지금도 연락하며 친하게 지낸다. 양씨는 목회하는 남편을 따라 몽골에서 전도하며 살고 있고, 국가대표와 마사회 팀을 맡은 현씨는 베이징올림픽에서 여자 단체전 동메달을 견인했다. 지난해 늦깎이로 결혼한 남자 단식 금메달리스트 유남규(40) 씨는 현씨와 마찬가지로 국가대표팀을 맡아 베이징올림픽 남자팀을 이끌었다.

    서울올림픽과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여자 핸드볼 금메달리스트들은 정기 모임을 여는데 김명순, 김춘례 씨처럼 목사와 결혼해 전도의 삶을 사는 이도 있고, 이미영(안산시청 도서관) 박현숙(부안여중 체육교사) 임미경(병원 근무) 씨처럼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도 많다. 손미나 씨는 무릎수술 뒤 고생하고 있으며, 송지현 씨는 유일하게 미혼이다.

    바르셀로나올림픽 사격 소구경 소총 복사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이은철(41) 씨는 미국으로 건너가 자신의 전공을 살려 컴퓨터 관련 업체에 입사했으며, 2006년 한국에 돌아와 사업에 성공했다. 사격 여자 공기소총에서 금메달을 딴 여갑순(35) 씨는 사격 선수와 결혼해 초등학교 2학년 아들을 뒀는데,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9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은메달을 따는 등 대구은행에서 현역 선수로 활약 중이며, 베이징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에도 참가했다. 바르셀로나올림픽 유도에서 금메달을 딴 김미정(37) 씨는 용인대 교수로 일하며 경기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2000년부터는 A급 국제유도심판 자격증을 따 국제심판으로도 활약하고 있다. 그는 세계유도선수권대회 동메달리스트인 김병주 씨와 결혼했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과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2연패한 레슬링의 심권호(36) 씨는 베이징올림픽 SBS 레슬링 해설자로 관심을 모았고, 애틀랜타올림픽 여자 배드민턴 단식 금메달리스트 방수현(36) 씨는 국제배드민턴연맹(IBF) 총회이사로 일하면서 베이징올림픽 때는 방송해설자로 활약했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 금메달리스트는 대부분 현역 선수로 활동하고 있다.

    동계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은 지금?

    김기훈 교수로 재직, 김동성은 미국 유학 중


    “올림픽 金 이어 인생 금메달도 따야죠”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출전 당시의 김동성.

    동계올림픽은 쇼트트랙과 스피드스케이팅에서만 금메달이 나왔다.

    1992년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김기훈(41) 씨는 울산과학대 교수(사회체육과)로 일한다. 이 대회에서 김씨와 함께 5000m 계주 금메달을 딴 이준호(43) 씨는 경기대에서 레저스포츠 박사과정을 밟고 있고,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에서 미국의 안톤 오노(26) 씨에게 금메달을 빼앗겨 유명해진 김동성(28) 씨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2010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위원회에서 활약한 동계올림픽 4관왕 전이경(33) 씨는 부산에서 어린이들을 지도하고 있으며, 미녀 스케이터로 소문난 김소희(32) 씨는 지난해 결혼해 전업주부로 산다. 동계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가운데 기혼자는 5명뿐이다. 꼬마 스케이터로 유명하던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원혜경 씨는 결혼을 했고, 남자 선수로는 모지수 송재근 김기훈 씨가 백년가약을 맺었다.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채지훈(34) 씨는 심판이 되고자 교육받고 있으며, 안현수(성남시청) 진선유(단국대) 변천사(고양시청) 이호석(경희대) 씨는 2010년 밴쿠버올림픽을 목표로 현역으로 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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