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33

2008.04.29

한자의 오만과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

Weekly 理·知 논술

  • 노만수 서울디지털대 문창과 교수

    입력2008-04-23 17: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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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의 오만과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

    은나라가 은허(殷墟)로 천도하기 전 상족(商族)이 쓰던 갑골문자. 한자는 5000여 년 전,황제의 사관인 창힐이 새와 짐승들의 발자국을 보고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옛날 창힐(蒼·#38945;)이 처음으로 문자를 만들어내자 하늘은 속우(粟雨)를 뿌렸고 귀신은 밤에 통곡을 했다. 또 백익이 처음으로 우물을 파자 용은 흑운(黑雲)을 타고 사라졌으며 신(神)은 곤륜(崑崙)으로 피하여 살게 되었다. 이런 일들은 지능이 증대되어감에 따라서 덕이 박해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중국 전한(前漢)시대 회남왕 유안(劉安, B.C.179?~B.C.122)이 편찬한 ‘회남자(淮南子, 명문당)’에 나오는 구절이다. 흥미로운 것은 뜻밖에도 문명의 주춧돌인 문자의 발명이 칭찬일색이지 않다는 점이다. 도대체 ‘동아시아의 문명도구’인 한자가 발명되자 귀신은 왜 통곡한 것일까.

    문자를 다루는 사람들이 문자를 교묘하게 악용하는 곡학아세(曲學阿世)로 세상을 어지럽게 했다는 말일까. 백성들이 문자를 알자, 본래 해야 할 농사일을 버리고 문자를 새기기 위해 펜촉의 연마에 몰두해 결국 식량이 부족해지는 상황으로 치달은 것일까. 이에 더해 문자가 위조문서를 만들고 무고한 이들을 죽이는 데 악용되자, 귀신조차도 언제 세상으로부터 탄핵될지 몰라 큰 소리로 울었던 것일까. 아니면 한자를 만든 데 감동한 하늘이 축복의 곡식을 내려주었단 말일까.

    동아시아 문명의 주춧돌 … 습득에 엄청난 고생

    후한(後漢) 3세기경 고유(高誘)는 ‘회남홍렬해(淮南鴻烈解)’에서 이렇게 주석을 달았다. “창힐은 처음으로 새의 발자국 모양을 보고 문자를 만들었다. 그러자 사기와 허위가 생겨나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뒤쫓으며, 농사를 버리고 송곳과 칼을 날카롭게 연마하는 데 힘을 쏟게 되었다. 하늘은 인간이 굶주리게 될 것을 알고서 곡식을 뿌렸다. 귀신은 문서로 탄핵받을까 두려워서 밤새 울었다.”



    고유의 주석은 연암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에서, 허생이 유토피아 섬을 세우는 데는 ‘지적 사기와 싸움’을 일삼는 지식인들이 쓸모없다면서 그 섬에 머물지 못하게 한 까닭과 같을 성싶다. 그런데 또 하나의 의문이 든다. 백익이 우물을 파는 기술을 발명하자, 물이 있는 곳에 서식하는 용이 지상에서 쫓겨나 곤륜산으로 도망을 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홋카이도대학 다케다 마사야(武田雅哉) 교수(문학부)는 ‘창힐의 항연’(이산)에서 “물이 있는 곳에 서식하는 용이 인류의 문명으로 인한 이른바 ‘자연환경 파괴’ 때문에 지상에서 쫓겨나 곤륜산으로 탈출했다”는 말이고, “창힐의 문자 발명은 덕성을 감소시키는 기능·기술의 예로서 거론되었다”고 한다. 중국 신화 속 황제(黃帝)의 사관인 창힐이 문자를 만든 이야기는 ‘성서’의 창세기에 나오는 바벨탑에 필적하는 언어의 원죄에 대한 전설이다. 또 한자의 폐해에 대한 담론은 단지 근대의 역사적 산물이 아니라 한나라 때부터 유행했던 것이다.

    비근한 예로 글자 하나하나가 뜻을 갖는 표의문자인 한자는 축복인 동시에 억압이었다. 중국어를 할 수 없을지라도 그 뜻만 알면 필담으로도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한자는 뛰어난 언어가 분명하다. 하지만 최소 수천 자는 외워야 기본적인 소통이 가능한 탓에 사용자들에게는 보통 부담이 아니었다. 한자를 만든 네눈박이 창힐 같은 신화적 존재라면 몰라도 두눈박이 보통사람들은 한자를 능란하게 다루기 버거웠고, 이후 수천 년 동안 보통사람들은 한자 때문에 엄청난 고생을 해야 했다. 예컨대 창힐이 여자 귀신들을 달랜 전설로도 여성들이 당한 봉건적 억압을 짐작할 수 있다.

    창힐은 식사와 수면도 생략한 채 쉴새없이 한자를 만들어냈다. 드디어 ‘계집 녀(女)’자를 이용해 많은 글자를 만들었다. 간사할 간(奸), 시기할 질(嫉), 질투할 투(妬), 싫어할 혐(嫌), 요망할 요(妖), 망령될 망(妄), 기생 기(妓), 아첨할 미(媚), 계집종 비(婢), 간음할 간(姦), 종 노(奴) 등.

    한자의 오만과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

    3000년 전쯤 중국인들이 쓰던 상형문자. 이 같은 상형문자들이 오늘날 한자의 기원이 됐다.

    중화문명 외 모두 오랑캐 취급 이분법적 사고

    이처럼 ‘계집 녀(女)’가 들어간 글자들은 하나같이 부정적인 뜻이었다. 여자 귀신들이 이 사실을 알고 크게 화를 내며 창힐에게 달려와 항의했다. 할 수 없이 창힐은 ‘좋을 호(好)’자를 만들어주고 여자 귀신들을 내심 비웃었다. 남자(子)가 있어야만 ‘좋을 호(好)’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여자 귀신들은 ‘여(女)’와 ‘자(子)’가 모여야 ‘호(好)’가 된다는 것은 여자들에게도 남자와 동등한 지위를 주신 거라며 기뻐했다. 창힐은 그제야 여자들의 고통을 깨닫고 ‘여(女)’자로 좋은 뜻의 한자들도 만들었다. 평온할 타(妥), 예쁠 연(娟), 예쁠 주(姝), 예쁠 요(姚) 등. 하지만 이 또한 요즘 기준으로는 여자는 예뻐야만 참된 여자인가라는 반박을 들을 만한 부분이다.

    비단 한자의 폐해는 여기에만 머물지 않는다. 예를 들면 한자는 화하족(華夏族)이 아닌 이들을 모두 곡해했다. 먼저 자신들을 ‘중화(中華)’나 ‘중국(中國)’이라며 중심에 놓고, 사방의 이웃들은 동이(東夷), 남만(南蠻), 서융(西戎), 북적(北狄)이라 부르면서 미개한 ‘오랑캐’ 취급을 했다. ‘개사슴록변( )’을 보자. 이는 개(犬)를 뜻하는데, 이것을 부수로 삼는 글자는 ① 짐승이거나 ② 짐승의 성격이나 행동과 관련된 의미다. ①의 예로는 개 구(狗), 여우 호(狐), 고양이 묘(猫), 원숭이 원(猿), 노루 장(獐), 사자 사(獅) 등이 있고 ②에는 범할 범(犯), 교활할 교(狡), 미칠 광(狂) 등이 있다. 그래서 오랑캐에 대한 한자는 북적(北狄)처럼 짐승과 관련된 한자가 많다.

    예를 들면 부여인들은 ‘갖은돼지시변(豺)’을 부수로 한 ‘맥(貊, 담비 초[貂]와 같은 뜻)’자에 ‘오물 예(濊)’자를 붙여 예맥족(濊貊族)이라 불렀고, 동이족의 신인 치우(蚩尤)는 ‘더욱 우(尤)’자와 ‘어리석을 치(蚩)’자를 합했다. 흉노(匈奴)는 ‘흉(凶)한 노비(奴)’, 연(燕)과 북위(北魏)를 세운 선비(鮮卑)족은 ‘비천(卑)한 물고기(魚)’, 후월(後越, 311~334)을 세웠던 갈(乫)족은 ‘불깐 양떼’, 몽고(蒙古)는 ‘예(古)부터 어리석은(蒙) 놈들’, 티베트의 장(藏)족은 원래 ‘낮은 놈들(?)’, 삼국지에 나오는 마초의 강(羌)족은 양(羊) 떼였으며 남쪽엔 남만(南蠻, 남쪽 벌레)이 있고 광서자치구의 장(壯)족은 원래 ‘노루 장(獐)’자를 써서 기록했다. 지금도 중국어에는 후쒀(胡說·허튼소리)라는 욕이 있다. 직역하면 ‘오랑캐 말’이다.

    이처럼 중원 바깥 민족에 대한 한자의 오만이 진짜로 허튼소리이고 회남왕 유안이 ‘회남자’에서 우려했던 문자의 폐해 아닐까. 중화(中華)주의는 중화문명과 그 밖의 문명을 우월함과 열등함으로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일 뿐이다. 예로부터 동아시아에는 다원적인 문화권이 형성돼 있었다. 다산 정약용은 그래서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을 노래했던 것이다.

    “나는 조선 사람이네/ 조선시를 달게 짓겠노라/ 그대들은 마땅히 그대들의 법을 따르시게/ 남의 글 두고 감 놔라 배 놔라 따지는/ 이는 누구신가/ 구구한 그대들의 격과 율을/ 먼 곳에 사는 우리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명나라 때 문장가 李모씨란 이는/ 오만하게도/ 우리를 조롱하여 동쪽 오랑캐라 불렀다/ (…) 배와 귤은 제각기 독특한 맛을 지니고 있지 않던가/ 자기 입맛에 맞는 게 좋은 맛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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