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75

2017.02.15

경제

미국산 원유가 몰려온다

트럼프 통상 압력, 美 원유 수입으로 대응…석유 수송 인프라 건설 기회 잡아야

  • 김재경 에너지경제연구원 부연구위원 fisherkjk@keei.re.kr

    입력2017-02-13 16: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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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20일 도널드 트럼프 제45대 미국 대통령의 취임식 당일 백악관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미국 우선 에너지 계획(America First Energy Plan)’이란 제목의 글이 게시됐다. 이는 신(新)행정부가 추진하려는 에너지 정책의 큰 틀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 영토에 묻힌 50조 달러(약 5경8800조 원) 규모의 석유 및 천연가스 매장지를 본격 개발하고, 이를 통해 얻은 수익으로 도로와 학교, 다리 등 사회간접자본을 건설하겠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미국 내 석유 및 천연가스 생산으로 에너지 자원의 해외 의존도를 낮추겠다는 것이 목표다. 간명하게 표현하자면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향한 트럼프 행정부의 ‘에너지 독립(energy independence)’ 선언인 셈이다.

    사실 미국의 에너지 독립 선언이 처음은 아니다.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인 욤 키푸르(Yom Kippur) 전쟁을 빌미로 OPEC의 전신인 아랍석유수출국기구(OAPEC)가 원유 감산 및 수출 금지 조치를 단행했다. 당시 국제유가가 4배 이상 치솟자 미국에선 석유 등 에너지 자원의 해외 의존이 국가 안보를 위협할 수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같은 해 12월 25일 닉슨 대통령은 크리스마스 특별담화를 통해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석유 등 에너지 자원의 자급자족을 주창했다. 75년에는 미국 에너지 정책 기본법인 ‘에너지정책 및 보존법(Energy Policy and Conservation Act·EPCA)’이 제정됐다. 특히 EPCA 제103항은 미국 땅에서 생산된 원유의 역외 수출을 전면 금지하고 역내에서만 소비되도록 했다. 이러한 기조는 40여 년 동안 이어져왔다.

    하지만 2011년 들어 상황이 급변했다. 소위 ‘셰일 혁명’의 여파로 저유황 경질원유를 중심으로 미국 내 원유 생산이 급격히 증가한 것. 미국의 원유 생산은 2008년 하루 평균 500만 배럴에서 2015년 925만 배럴까지 증가했다. 미국은 러시아와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치고 세계 최대 원유생산국으로 부상했다. 





    40여 년 만에 미국산 원유 수출 자유화

    그러나 생산이 급격히 증가한 저유황 경질원유는 미국 정유산업이 선호하는 유종이 아니었다. 유종은 보통 황 함유량(저유황, 고유황)과 비중(경질, 중질)에 따라 품질이 구분되며 가격도 다르다. 고도화된 대규모 정제시설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보유한 미국 정유산업은 그동안 캐나다, 멕시코, 베네수엘라, 중동 등에서 저렴한 고유황 중질원유를 도입해 높은 정제 마진을 향유해왔다. 결국 저유황 경질원유는 미국 내에서 남아돌았고 급기야 가격이 폭락했다.

    미국산 원유를 대표하는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의 가격은 2011년 이후 국제시세보다 배럴당 10달러 이하로 떨어졌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미국 원유 생산업계를 중심으로 ‘에너지 독립’ 정책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남아도는 원유를 수출할 수 있게 금지 규정인 ‘EPCA 제103항’을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진 것. 결국 2년간 진통 끝에 2015년 12월 18일 해당 조항이 폐지돼 40여 년 만에 미국산 원유의 수출 자유화가 실현됐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면 트럼프 행정부의 ‘에너지 독립’ 선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욱 선명해진다. 적어도 1975년 ‘에너지 독립’ 선언과는 차이가 있다. 먼저 수세적 방어에서 공세적 전환, 한마디로 OPEC을 향한 선전포고라 할 수 있다. 75년 이후 ‘에너지 독립’은 단지 OPEC으로부터 원유 수입 의존도를 낮추려는 노력이었다면, 이번엔 미국 내 원유 생산 부양을 통해 국제 석유시장에서 OPEC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저유가 기조를 타개하고자 지난해 말 이룬 OPEC의 감산 합의도 와해될 개연성이 한층 높아졌다. 현재 배럴당 50달러(약 5만7850원)대 초반인 국제유가는 당분간 60달러를 넘기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한편 미국은 조만간 각 나라와 경제협상에서 자국 원유를 주력 수출상품으로 내세울 것으로 예상된다. 현 원유시장에서 미국 저유황 경질원유 생산업체가 수익을 창출하려면 박리다매가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원유 판매를 세계시장으로 확대하는 정책 방향은 트럼프 행정부의 ‘모든 미국인을 위한 무역협정(trade deals working for all Americans)’과도 맥을 같이한다. 결국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재협상 착수를 시작으로 이어질 연쇄적인 재협상 과정에서 원유가 주된 논의 대상으로 협상 테이블에 오를 가능성이 높아졌다.



    한미 FTA 협상 주제가 될 듯

    특히 미국의 원유 수출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걸린 우리로서는 무시하고 넘어가기 어려운 문제다. 한국과 (상품) 교역으로 발생한 미국의 적자 규모는 2015년 말 기준 283억 달러(약 32조7289억 원)로 최근 몇 년간 적자폭이 더욱 커지는 추세다. 더욱이 한미 FTA 발효 후 3년간 무역수지 적자폭이 380억 달러로 미국과 FTA를 체결한 17개국 중 가장 크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선거 유세 기간 한미 FTA로 미국인의 일자리 약 10만 개가 사라졌다고 주장하면서 재협상 의지를 강력히 밝힌 바 있다.  

    눈앞에 닥친 트럼프 행정부의 통상 압력에 대응하려면 미국산 원유의 국내 도입을 적극 추진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방위비 분담 문제 등으로 갈등 우려가 있는 한미관계를 부드럽게 풀어나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국내 정유사들은 경제성을 이유로 미국산 원유 도입에 소극적일 가능성이 높은 만큼 정부나 한국석유공사가 먼저 물꼬를 터야 할 것이다. 현재 건설 중인 동북아오일허브 저장시설에 미국 석유회사나 트레이더를 이용사로 유치하는 것도 방법이다. 또한 중동산 중질원유가 98.7%인 전략비축유의 구성을 다각화하는 차원에서 미국산 원유(특히 콘덴세이트)를 한국석유공사 비축시설에 도입하는 방안도 생각해볼 수 있다. 중·장기적으로는 중동 도입선 중 일부를 미국으로 전환해 대규모 장기계약 형태의 미국산 원유 도입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미국 내 원유 수출 인프라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 현재 주요 셰일오일 산지와 파이프라인으로 연결된 멕시코만 원유 수출항에는 대형 유조선 접안시설이 거의 없다. 따라서 지리적으로 우리와 가까운 미국 북서부 연안 등에 미국산 원유를 선적할 수 있는 수출 인프라를 건설해야 한다. 이때 셰일오일 주산지인 노스다코타 주 바켄(Bakken) 지역을 연결할 수 있는 파이프라인 건설이 병행돼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파이프라인이 통과하는 주정부는 물론, 연방정부의 지원이 필수적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오바마 행정부에서 좌초시킨 키스톤 XL 파이프라인 건설을 재승인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등 석유 수송 인프라 건설에 우호적이다. 이러한 분위기를 잘 활용한다면 국내 업체가 미국 내 석유 수송 인프라 건설에 참여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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