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09

2007.11.06

대륙에 뜨는 별 … 차기 대권 ‘0순위’

공산당 서열 6위 정치행보 부각… 부인 펑리위안은 중국 최고 인기 가수

  • 하종대 동아일보 베이징 특파원 orionha@donga.com

    입력2007-10-31 13: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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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륙에 뜨는 별 … 차기 대권 ‘0순위’
    ‘소박하고(平實) 자신을 남에게 자랑하지 않으며(低調) 온화한 가운데 겸허하고(謙和) 나서야 할 때는 대범하면서도 당당하다(大氣).’

    중국 공산당 제17차 전국대표대회 직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새로 진입한 시진핑(習近平·54) 상무위원을 두고 하는 말이다. 시진핑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를 입이 마르도록 칭찬한다. 벌써부터 후진타오(胡錦濤) 총서기 겸 국가주석이 퇴진하는 2012년 이후 중국을 이끌어갈 차세대 지도부의 최고지도자로도 거론된다.

    그는 이번 제17기 중앙위원회 제1차 전체회의에서 일찌감치 후계자 소리를 들어온 경쟁자 리커창(李克强) 랴오닝(遼東)성 당서기를 제치고 중국공산당 권력서열 6위에 올랐다. 일각에서는 아직도 경쟁해야 할 기간이 5년이나 남았다고 지적하지만, 앞으로 시진핑이 국가 부주석 자리와 중앙군사위 부주석 자리를 차지한다면 차기 총서기 자리는 예약해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예의·성실·겸허 당당한 품성 갖춰

    시진핑을 여기까지 오게 만든 것은 그의 몸가짐이다. 예의 바르면서도 성실하고, 겸허하면서도 당당한 그의 품성을 차세대 지도자군 중에는 따라올 자가 없기 때문이다.



    중국 고위 지도부에서 회자되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시진핑은 미래가 밝을 수밖에 없다는 것. 왜냐하면 그의 이름 속에 조력자가 3명이나 포진해 있기 때문이다. 시(習)-윗세대의 장점을 배우는(習) 데 뛰어나고, 진(近)-중앙 지도부와 지방 인민 사이의 심리적 거리를 좁히는(近) 데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며, 핑(平)-간부로서 평소에 소박하고(平) 온화하며 대범하고 당당하다는 것.

    그래서 정치분석가들은 그가 ‘4대 천왕(天王)’ 가운데 가장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다고 말한다. 4대 천왕은 이번에 중앙정치국에 진입한 5세대 선두주자들로 시진핑, 리커창과 리위안차오(李源潮) 장쑤(江蘇)성 당서기, 보시라이(薄熙來) 상무부장을 가리킨다.

    정치분석가들에 따르면 시진핑의 이런 장점은 중국 정치무대에서 매우 중요하다. 중국 정치는 ‘1인 독주체제’에서 점차 ‘집단 지도체제’로 옮겨가고 있다. 탁월한 최고지도자 한 명의 지도 능력보다 합리적인 다수의 지도력이 더 낫다는 게 오랜 경험을 통해 얻은 중국 공산당의 결론인 것. 이번에 시진핑이 차세대 지도자군 가운데 선두를 차지하게 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시진핑에게는 유리한 점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중국 공산당 중앙선전부 부장과 정무원 비서장, 국무원 부총리, 전국인민대표대회 부위원장을 지낸 아버지 시중쉰(習仲勳·1913~2002)의 후광이다. 시중쉰은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주요 조력자이자 ‘중국 개혁개방의 설계자’ 덩샤오핑(鄧小平)의 절친한 친구였다.

    그렇다고 시진핑이 고위 관리의 자제를 일컫는 태자당처럼 온갖 혜택을 누리며 자란 것은 아니다. 제1 야전사령 출신으로 펑더화이(彭德懷) 계열이었던 부친은 1962년 마오쩌둥(毛澤東)에 의해 반(反)혁명분자로 몰려 산시(陝西)성 오지로 하방됐다. 그래서인지 시진핑에게선 오만함이나 자만심을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서민적 정서가 물씬 풍긴다. 그는 다른 태자당과 비교되는 것을 싫어한다.

    1975년 마오쩌둥이 세상을 뜬 뒤 시중쉰은 복권됐다. 널리 알려진 바는 아니지만, 시중쉰은 경제특구 구상의 아이디어를 처음 내놓은 인물이기도 하다. 광둥(廣東)성 서기 겸 성장으로 재직하던 79년 초 특구 설치의 필요성을 덩샤오핑에게 강력하게 제기했고, 덩샤오핑은 이를 받아들여 선전(深?) 주하이(珠海) 등 4곳에 특구를 설치했다.

    굳이 따지자면 중국 개혁개방의 진정한 총설계자는 시중쉰인 셈이다. 고향 사람들은 그런 시중쉰을 자랑스러워한다. 그의 고향 산시성 푸핑(富平)현의 고속도로 입구에는 ‘시중쉰의 고향’이라고 적혀 있을 정도다.

    1975년 부친의 복권과 함께 베이징으로 돌아온 시진핑은 칭화대학 공정화학과를 졸업한 뒤 국무원 판공청에서 겅뱌오(耿彪) 부총리의 비서로 배치됐다. 겅뱌오는 당시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이자 국무원 부총리로 중앙군사위원회 비서장까지 겸하고 있었다. 부친 덕분에 배치를 잘 받은 것이다.

    또한 그는 29세에 허베이(河北)성 정딩(正定)현 부서기에 임명됐다. 결혼도 하기 전인 32세엔 샤먼(廈門)시 부시장이 됐다. 이어서 연해 지역의 푸젠(福建) 성장과 저장(浙江) 성장을 잇따라 역임했다.

    칭화방 출신 동부에서 경력 쌓아 … 한국과 깊은 인연

    1997년 보시라이를 포함한 5세대 태자당 인사들이 중앙위원회 중앙위원과 후보위원 선거에서 대거 탈락했지만, 그는 덩샤오핑의 장남 덩푸팡(鄧樸方)과 함께 중앙위원회 진입에 성공했다.

    허베이(河北)에서 연마하고

    푸젠(福建)에서 하늘로 올라

    저장(浙江)에서 날개를 펴고

    상하이(上海)에서 날다

    시진핑의 경력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는 1985년부터 무려 18년간 푸젠성에서 일했다. 이 시절 대만 자본을 많이 끌어들여 푸젠성의 부(富)를 크게 올려놨다. 저장성 서기로 있을 때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을 전국 최고인 3000달러까지 끌어올렸다. 대만을 사이에 끼고 있어 중국이 중시할 수밖에 없는 푸젠성과 저장성, 금융 중심지 상하이 등 중국 동부의 노른자위에서만 경력을 쌓은 셈이다.

    이런 탓에 2002년 말 중국 공산당 제16차 전국대표대회를 앞두고 그가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승진할 것이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이때부터 많은 사람들은 그가 장래에 ‘대임(代任)’을 맡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기 시작했다. 당시 소문은 정말 소문에 그쳤지만, 5년 뒤 그는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진입이라는 성과를 이뤄냈다.

    칭화대학을 나온 시진핑은 같은 대학 사회과학대학에서 법학박사를 취득했다. 칭화대학을 고리로 후진타오와 연결되지만 단파(후진타오의 정치적 기반인 ‘중국공산주의청년단파’)와의 관계는 껄끄럽다. 2002년 그가 푸젠 성장에서 저장 성장으로 옮긴 것을 두고, 단파 쑹더푸(宋德福)가 서기로 내려온 데 따른 정치적 피난이라는 분석이 나왔을 정도다. 쑹더푸는 후진타오의 후임으로 공청단 제1서기를 역임한 단파 출신의 핵심인물이다.

    시진핑은 2002년 저장성 서기가 된 뒤 5년 만에 저장성을 중국에서 민간기업이 가장 발전한 성으로 키웠다는 공로를 인정받았다. 이에 따라 천량위(陳良宇) 전 상하이 당 서기가 비리 혐의로 축출되면서 지난 3월 후임으로 임명됐다. 상하이 당서기로 재직하는 동안에는 대외적으로 중국 성장의 견인차로 상하이의 동력을 유지하면서 내부적으론 물갈이 인사 등 부패척결에 강한 면모를 보였다.

    그는 또 민생문제에 집중했다. “인민이 생각하는 것을 먼저 생각하고, 인민이 급하게 여기는 일을 먼저 처리하라.” 상하이에 도착하자마자 당정 주요 간부를 모아놓고 했다는 그의 말이다. 그는 특히 취업, 사회보장, 교육, 의료, 주택 등의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태생적으로 성장우선주의자다. 그가 성장과 당서기를 지낸 푸젠성, 저장성, 상하이시는 모두 동부 연안으로 중국의 성장을 견인해온 곳이다.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한국에 지인이 거의 없는 리커창과는 이 점에서 차이가 난다. 시진핑은 저장성 서기로 있을 때 항저우(杭州) 임시정부 청사 복원을 승인했고, 중앙정부의 승인을 받는 데 기여했다. 2005년 7월 공산당 친선방문단 단장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한 데 이어 같은 달 18일엔 한국을 방문했다.

    부인 펑리위안(彭麗媛· 45)은 중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인기가수다. ‘중국 당대 민족성악의 대표가수’로 꼽히는데, 민족성악이란 민요 창법을 현대적으로 되살린 중국 특유의 음악 장르다. 인기 가도를 달리던 펑리위안은 1986년 푸젠성 샤먼시 부시장이던 시진핑을 만났다. 평리위안은 처음에 ‘늙어 보이고 촌티나는’ 시진핑에 실망했지만 대화를 할수록 마음이 끌렸다고 한다.

    시진핑 프로필



    ·한족

    ·1953년 6월생

    ·산시(陝西)성 푸핑(富平) 출신

    1975~1979년 칭화대학 화공계 기본유기합성 전공

    1979~1982년 국무원 판공청, 중앙군사위원회 판공청 비서(현역)

    1982~1983년 허베이(河北)성 정딩(正定)현 부서기

    1983~1985년 허베이성 정딩현 서기

    1985~1988년 푸젠(福建)성 샤먼(廈門)시 당 위원회 상무위원, 부시장

    1988~1990년 푸젠성 닝더(寧德)지(地) 서기

    1990~1993년 푸젠성 푸저우(福州)시 서기, 시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임

    1993~1995년 푸젠성 상무위원회 상무위원

    푸저우시 서기, 푸저우시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임

    1995~1996년 푸젠성 부서기, 푸저우시 서기,

    푸저우시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임

    1996~1999년 푸젠성 부서기

    1999~2000년 푸젠성 부서기, 대리성장

    2000~2002년 푸젠성 부서기, 성장

    1998~2002년 칭화대학 인문사회학원 마르크스주의 이론 및

    사상 정치교육 전공 석사 및 법학 박사 취득

    2002~2002년 저장(浙江)성 부서기, 대리성장

    2002~2003년 저장성 서기, 대리성장

    2003~2007년 저장성 서기, 성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임

    2007~2007년 상하이시 서기

    2007년~현임

    제15기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제16~17기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제17기 중앙정치국 위원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상무위원

    중앙서기처 서기


    ▼ 제17기 정치국 위원 및 상무위원
    성명 직급 직책 나이 비고
    후진타오(胡錦濤)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당 총서기, 국가주석, 당 및 국가 중앙군사위 주석 65 퇀파이
    우방궈(吳邦國)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 66 상하이방
    원자바오(溫家寶) 국무원 총리 65 친 후진타오
    자칭린(賈慶林)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주석 67 상하이방
    리장춘(李長春) 이데올로기 담당 63 상하이방
    시진핑(習近平) 국가부주석(예상), 중앙서기처 (제1)서기 54 태자당 ★
    리커창(李克强) 제1부총리(예상) 52 퇀파이 ★
    허궈창(賀國强)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 64 태자당 ☆
    저우융캉(周永康) 중앙정법위원회 서기(예상), 현 공안부장 65 친 쩡칭훙 ☆
    왕강(王剛) 중앙정치국

    위원
    중앙보밀(保密)위원회 주임 65 장쩌민 측근 ▲
    왕러취안(王樂泉) 신장웨이우얼자치구 당 서기 63 퇀파이
    왕자오궈(王兆國) 전국인대 상무위원회 부위원장, 중화전국총공회 주석 66 퇀파이
    왕치산(王岐山) 베이징 시장 59 태자당 ★
    후이량위(回良玉) 국무원 부총리 63 계파 없음
    류치(劉淇) 베이징시 당 서기 65 상하이방
    류윈산(劉雲山) 중앙서기서 서기, 중앙선전부 부장 60 퇀파이
    류옌둥(劉延東) 정협 부주석, 중앙통일전선공작부 부장 62 퇀파이 ★
    리위안차오(李源潮) 중앙서기처 서기, 장쑤성 당 서기 57 퇀파이 ★
    왕양(汪洋) 충칭시 당 서기 52 퇀파이 ★
    장가오리(張高麗) 톈진시 당 서기 61 상하이방 ★
    장더장(張德江) 광둥성 당 서기 61 상하이방
    위정성(兪正聲) 후베이성 당 서기 62 태자당
    쉬차이허우(徐才厚) 당 및 국가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64 친 후진타오 ★
    궈보슝(郭伯雄) 당 및 국가 중앙군사위 부주석 65 상하이방
    보시라이(薄熙來) 국무원 상무부장 58 태자당 ★
    ★표시는 신임. ☆표시는 정치국 위원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승진.

    ▲표시는 정치국 후보위원에서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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