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 인물을 보면 각 나라의 정신세계가 엿보인다. 미국은 국부(國父) 조지 워싱턴과 흑인해방의 주역인 에이브러햄 링컨, 대만은 삼민주의의 쑨원(孫文), 인도는 ‘위대한 영혼’ 간디, 베트남은 ‘민중의 호 아저씨’ 호치민, 예술의 나라 프랑스는 화가 세잔, 독일은 수학자 가우스를 상징인물로 내세웠다. 중국 최고 인민폐인 100위안의 주인공은 국부 마오쩌둥(毛澤東)이지만 그 밖의 다른 돈에는 전통의상을 입은 55개 소수민족의 초상화가 나온다. 다민족국가인 중국은 ‘소수민족 대통합’ 문제가 그만큼 절실하다는 증거다.
우리나라가 세종대왕, 율곡 이이, 퇴계 이황 등을 지폐의 주인공으로 한 까닭은 비록 ‘봉건적’이라거나 ‘늙었다’는 비판의 화살을 받기도 하지만, 선비정신을 중요시하는 우리네 전통 탓이 크다.
그럼 일본의 최고 고액권인 1만 엔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바로 메이지 근대화의 아버지인 ‘일본의 벤저민 프랭클린’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다. 2004년부터 1000엔짜리는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1916)에서 황열병(黃熱病) 연구에 일생을 바친 노구치 히데오(野口英世 1876~1928)로, 5000엔짜리는 ‘무사도’를 쓰고 유엔 사무국 차장을 지낸 니토베 이나조(新渡戶稻造 1862~1933)에서 메이지시대 여성소설가인 히구치 이치요(?口一葉 1872~1896)로 바뀌었는데, 1만 엔짜리 지폐의 얼굴은 그대로다. 왜 그럴까. 후쿠자와 유키치가 여전히 일본을 상징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도쿠가와 막부 말기 가난한 하급무사 출신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출간 당시 스테디셀러였던 ‘학문을 권장함’(1872~1876, 소화)에서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사람 아래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는 명언을 남겼다. ‘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원제 福翁自傳, 이산)은 봉건적 신분제를 거부한 채 일찍부터 나가사키, 오사카, 에도 등지로 떠돌면서도 엄격한 자기관리로 난학(네덜란드 학문)과 영학(英學)의 대가가 돼 ‘일신의 독립’을 이룬 ‘입지전적 인물’ 후쿠자와의 생애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일본의 대표적 자전이다.
그는 1860년 최초로 미국을 방문한 일본 사절단에 합류해 샌프란시스코를 찾았고, 1861년에는 막부의 유럽 사절단 일원으로 서양을 탐방해 명저 ‘서양사정’(1866~1870)을 남겼다. 권리·문명·개화·경쟁·저작권·사회·자유·토론·연설 등의 일본식 한자어를 처음 만들어낸 불세출의 번역가로 저작물 수입을 바탕으로 게이오의숙(게이오대학)을 창설하고, 의무교육을 처음 주창했다. 미국 페리 제독의 ‘흑선 쇼크’(1853)가 가져다준 ‘서양 쇼크’로 인해 파생한 메이지 시대의 시대정신 ‘압축형 서구화’와 맞물린 그의 일생을 한마디로 압축하면 ‘메이지 유신 연착륙시키기’였다.
지폐인물 후쿠자와 유키치는 근대화 상징이자 탈아론자
그가 세운 메이지라는 국가의 목표는 ‘문명론의 개략’(1875)과 그가 창간한 ‘지지신보(時事新報)’에 가시화됐다. 당시 후쿠자와는 임오군란(1882) 이후 조선에서 청국 세력이 확대되자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를 지원해 그들이 스스로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고 봤다. 그러나 갑신정변(1884)이 삼일천하로 끝나버리자 그는 1885년 3월16일 ‘탈아론(脫亞論)’을 ‘지지신보’에 발표하며 일본이 다른 동양 국가들과 협조할 게 아니라 그들을 넘어서자고 주장했다. 이른바 ‘탈아입구(脫亞入歐·아시아를 벗어나 서양화)론’이다.
‘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은 양이론과 국수주의가 팽배하던 시절 칼을 버리고 서양을 공부해 일본도 하루빨리 문명개화를 해야 한다는 후쿠자와의 선각자적 행적, 그리고 관직을 사양하고 재야에서 후진양성과 집필에만 전념한 덕목이 그를 일본 근대화의 일등공신으로 자리잡게 했다고 한다.
일본의 진보적 사상가인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南 1914~1996)도 ‘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문학동네)에서 후쿠자와를 ‘국가평등관에 입각한 국제인식의 소유자’라며 “정부는 있어도 국민은 없다”던 당시 일본을 개인주의, 남녀평등, 대의정치 등 서구적 가치가 무르익은 ‘근대 국민국가 일본’으로 갱신한 그의 사상에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런던 바드 칼리지 이안 부루마 교수 역시 ‘근대일본’(을유문화사)에서 그를 최초의 독립적인 일본 지식인이자 비범한 모범이라고 평가한다.
후쿠자와에 대한 평가는 이렇게 자유주의자, 민주주의자, 합리주의자, 여성해방론자 등의 찬사가 주류를 이루는 한편 서양숭배, 권력과의 타협, 권위주의자, 기회주의자라는 비판도 따라다닌다. 강상중 도쿄대 교수는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이산)에서 후쿠자와를 서구가 비(非)서구를 인종적으로 열등하다고 본 박물학적 차원을 답습한 일본의 오리엔탈리스트(동양 편견주의자)라고 비판한다. 아시아에서 일본이 가장 먼저 서구적 근대화를 했다고 자부한 후쿠자와는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을 복제해 인류를 문명(유럽)과 야만(아시아)으로 나누고, 야만의 대표적 예인 조선 중국 터키 페르시아 등과 결별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저하게 서구화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동양의 제국주의자’라는 것이다.
“우리는 아시아 국가들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의 운명을 서구의 문명국가와 함께하는 것이 낫다. 나쁜 친구를 소중히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들의 나쁜 평판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우리는 아예 우리 마음으로부터 아시아에 있는 우리의 나쁜 친구들을 지워버리자.”
이런 그의 아시아 멸시론은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1827~1877)와 더불어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征韓論)에서 극에 달한다. 특히 후쿠자와에게 조선은 “완고, 고루, 편협, 의심 많음, 구태의연, 겁 많고 게으름, 잔혹하고 염치없음, 거만, 비굴, 참혹, 잔인”하고 “일본과 청 사이에 끼인 조선은 득의양양하게 마음껏 욕구를 채우고도 지칠 줄 모르고 지나(支那·중국) 남자에게도 아양을 떠는 성적으로 방종한 여자”이므로 하루빨리 청국으로부터 해방시켜, 일본의 속국으로 삼아 ‘개화’해야 할 대상이었다.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을 수용한 후쿠자와는 국제관계를 밀림의 약육강식 관계로 파악했기 때문에 강대국 일본이 약소국 조선을 차지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청일전쟁을 문명과 야만의 전쟁으로 보았고, 갑신정변이나 을미사변은 내정간섭이 아니었다. ‘근대화=서양숭배’로 인식한 일본판 오리엔탈리스트인 후쿠자와였기에 서양 제국주의가 비서구 사회에 했던 전철을 답습해, 다른 아시아 국가에 일본에 대한 굴종과 숭배, 일방적 수용을 강요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후쿠다 신임 총리의 ‘아시아 중시론’ 성공할까
이렇게 아시아를 중시하지 않는 일본의 전통은 오래됐을 뿐만 아니라, 1만 엔짜리 지폐에서도 여전히 풍겨나온다고 하면 지나친 ‘일본 히스테리’일까. 그런데 최근 후쿠다 신임 일본 총리가 ‘20~21세기판 탈아입구’였던 탈아입미(脫亞入米·아시아를 벗어나 미국화)’라는 점에서 후쿠자와의 후예였던 고이즈미와 아베 신조 전(前) 총리들과는 달리, 동아시아 공동체를 구상했던 아버지 후쿠다 다케오 전 총리의 뜻을 이어받아 ‘아시아 중시론’으로 외교정책의 기본 노선을 정했다고 한다.
또한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반대하고 ‘납치문제 해결 없이 북-일 관계 개선은 없다’라던 전임자들의 대북 강경책과는 달리 북-일 관계 타개를 위해 경제제재 해제, 인도주의적 원조 등을 적극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군대위안부 강제 동원을 부인한 아베 전 총리와는 확연히 다른 후쿠다 정권이 ‘1만 엔짜리(후쿠자와 유키치)의 비극’인 일본판 오리엔탈리즘을 극복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우리나라가 세종대왕, 율곡 이이, 퇴계 이황 등을 지폐의 주인공으로 한 까닭은 비록 ‘봉건적’이라거나 ‘늙었다’는 비판의 화살을 받기도 하지만, 선비정신을 중요시하는 우리네 전통 탓이 크다.
그럼 일본의 최고 고액권인 1만 엔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바로 메이지 근대화의 아버지인 ‘일본의 벤저민 프랭클린’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다. 2004년부터 1000엔짜리는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1916)에서 황열병(黃熱病) 연구에 일생을 바친 노구치 히데오(野口英世 1876~1928)로, 5000엔짜리는 ‘무사도’를 쓰고 유엔 사무국 차장을 지낸 니토베 이나조(新渡戶稻造 1862~1933)에서 메이지시대 여성소설가인 히구치 이치요(?口一葉 1872~1896)로 바뀌었는데, 1만 엔짜리 지폐의 얼굴은 그대로다. 왜 그럴까. 후쿠자와 유키치가 여전히 일본을 상징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도쿠가와 막부 말기 가난한 하급무사 출신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출간 당시 스테디셀러였던 ‘학문을 권장함’(1872~1876, 소화)에서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사람 아래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는 명언을 남겼다. ‘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원제 福翁自傳, 이산)은 봉건적 신분제를 거부한 채 일찍부터 나가사키, 오사카, 에도 등지로 떠돌면서도 엄격한 자기관리로 난학(네덜란드 학문)과 영학(英學)의 대가가 돼 ‘일신의 독립’을 이룬 ‘입지전적 인물’ 후쿠자와의 생애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일본의 대표적 자전이다.
그는 1860년 최초로 미국을 방문한 일본 사절단에 합류해 샌프란시스코를 찾았고, 1861년에는 막부의 유럽 사절단 일원으로 서양을 탐방해 명저 ‘서양사정’(1866~1870)을 남겼다. 권리·문명·개화·경쟁·저작권·사회·자유·토론·연설 등의 일본식 한자어를 처음 만들어낸 불세출의 번역가로 저작물 수입을 바탕으로 게이오의숙(게이오대학)을 창설하고, 의무교육을 처음 주창했다. 미국 페리 제독의 ‘흑선 쇼크’(1853)가 가져다준 ‘서양 쇼크’로 인해 파생한 메이지 시대의 시대정신 ‘압축형 서구화’와 맞물린 그의 일생을 한마디로 압축하면 ‘메이지 유신 연착륙시키기’였다.
지폐인물 후쿠자와 유키치는 근대화 상징이자 탈아론자
그가 세운 메이지라는 국가의 목표는 ‘문명론의 개략’(1875)과 그가 창간한 ‘지지신보(時事新報)’에 가시화됐다. 당시 후쿠자와는 임오군란(1882) 이후 조선에서 청국 세력이 확대되자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를 지원해 그들이 스스로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고 봤다. 그러나 갑신정변(1884)이 삼일천하로 끝나버리자 그는 1885년 3월16일 ‘탈아론(脫亞論)’을 ‘지지신보’에 발표하며 일본이 다른 동양 국가들과 협조할 게 아니라 그들을 넘어서자고 주장했다. 이른바 ‘탈아입구(脫亞入歐·아시아를 벗어나 서양화)론’이다.
‘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은 양이론과 국수주의가 팽배하던 시절 칼을 버리고 서양을 공부해 일본도 하루빨리 문명개화를 해야 한다는 후쿠자와의 선각자적 행적, 그리고 관직을 사양하고 재야에서 후진양성과 집필에만 전념한 덕목이 그를 일본 근대화의 일등공신으로 자리잡게 했다고 한다.
일본의 진보적 사상가인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南 1914~1996)도 ‘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문학동네)에서 후쿠자와를 ‘국가평등관에 입각한 국제인식의 소유자’라며 “정부는 있어도 국민은 없다”던 당시 일본을 개인주의, 남녀평등, 대의정치 등 서구적 가치가 무르익은 ‘근대 국민국가 일본’으로 갱신한 그의 사상에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런던 바드 칼리지 이안 부루마 교수 역시 ‘근대일본’(을유문화사)에서 그를 최초의 독립적인 일본 지식인이자 비범한 모범이라고 평가한다.
후쿠자와에 대한 평가는 이렇게 자유주의자, 민주주의자, 합리주의자, 여성해방론자 등의 찬사가 주류를 이루는 한편 서양숭배, 권력과의 타협, 권위주의자, 기회주의자라는 비판도 따라다닌다. 강상중 도쿄대 교수는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이산)에서 후쿠자와를 서구가 비(非)서구를 인종적으로 열등하다고 본 박물학적 차원을 답습한 일본의 오리엔탈리스트(동양 편견주의자)라고 비판한다. 아시아에서 일본이 가장 먼저 서구적 근대화를 했다고 자부한 후쿠자와는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을 복제해 인류를 문명(유럽)과 야만(아시아)으로 나누고, 야만의 대표적 예인 조선 중국 터키 페르시아 등과 결별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저하게 서구화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동양의 제국주의자’라는 것이다.
“우리는 아시아 국가들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의 운명을 서구의 문명국가와 함께하는 것이 낫다. 나쁜 친구를 소중히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들의 나쁜 평판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우리는 아예 우리 마음으로부터 아시아에 있는 우리의 나쁜 친구들을 지워버리자.”
이런 그의 아시아 멸시론은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1827~1877)와 더불어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征韓論)에서 극에 달한다. 특히 후쿠자와에게 조선은 “완고, 고루, 편협, 의심 많음, 구태의연, 겁 많고 게으름, 잔혹하고 염치없음, 거만, 비굴, 참혹, 잔인”하고 “일본과 청 사이에 끼인 조선은 득의양양하게 마음껏 욕구를 채우고도 지칠 줄 모르고 지나(支那·중국) 남자에게도 아양을 떠는 성적으로 방종한 여자”이므로 하루빨리 청국으로부터 해방시켜, 일본의 속국으로 삼아 ‘개화’해야 할 대상이었다.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을 수용한 후쿠자와는 국제관계를 밀림의 약육강식 관계로 파악했기 때문에 강대국 일본이 약소국 조선을 차지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청일전쟁을 문명과 야만의 전쟁으로 보았고, 갑신정변이나 을미사변은 내정간섭이 아니었다. ‘근대화=서양숭배’로 인식한 일본판 오리엔탈리스트인 후쿠자와였기에 서양 제국주의가 비서구 사회에 했던 전철을 답습해, 다른 아시아 국가에 일본에 대한 굴종과 숭배, 일방적 수용을 강요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후쿠다 신임 총리의 ‘아시아 중시론’ 성공할까
이렇게 아시아를 중시하지 않는 일본의 전통은 오래됐을 뿐만 아니라, 1만 엔짜리 지폐에서도 여전히 풍겨나온다고 하면 지나친 ‘일본 히스테리’일까. 그런데 최근 후쿠다 신임 일본 총리가 ‘20~21세기판 탈아입구’였던 탈아입미(脫亞入米·아시아를 벗어나 미국화)’라는 점에서 후쿠자와의 후예였던 고이즈미와 아베 신조 전(前) 총리들과는 달리, 동아시아 공동체를 구상했던 아버지 후쿠다 다케오 전 총리의 뜻을 이어받아 ‘아시아 중시론’으로 외교정책의 기본 노선을 정했다고 한다.
또한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반대하고 ‘납치문제 해결 없이 북-일 관계 개선은 없다’라던 전임자들의 대북 강경책과는 달리 북-일 관계 타개를 위해 경제제재 해제, 인도주의적 원조 등을 적극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군대위안부 강제 동원을 부인한 아베 전 총리와는 확연히 다른 후쿠다 정권이 ‘1만 엔짜리(후쿠자와 유키치)의 비극’인 일본판 오리엔탈리즘을 극복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