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02

2007.09.11

한국 전통사상 속의 생태학 마인드

  • 노만수 서울디지털대 문창과 교수·도서출판 일빛 편집장

    입력2007-09-05 16: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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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전통사상 속의 생태학 마인드
    ‘한강에 악어가 살고, 한강 둔치에서 바나나를 따먹는다.’ 이게 웬 헛소리인가. 하지만 지구온난화로 한반도의 이상기후 현상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심각해지면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프랑스 아날학파의 주장대로 기후가 역사를 규정할 수 있는 법이니까 말이다. 논술에서도 환경문제만큼 불멸의 단골 주제는 드물다. 국경을 초월하는 지구적 차원의 문제일 뿐 아니라, 우리의 삶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문예출판사)에서 자연은 ‘죽은’ 물질적인 것에 불과하므로 의식적·정신적 존재인 인간이 그것을 소유해 통제·계량·지배·개발해야 한다고 했다. 일명 기계론적 세계관이자 근대적 자연관인 인간중심주의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한 그리스 철학이나 인간을 신이 빚은 최상의 피조물이라고 찬미한 성경에서 알 수 있듯, 인간중심주의는 아주 오래된 관습이기도 하다.

    19세기 중엽의 진화론(다윈)에 큰 영향을 준 18세기 박물학자 샤를 보네의 ‘만물의 사다리꼴 위계질서’도 그렇다. 인간을 사다리의 가장 위에 두고 구조가 복잡한 것일수록 가치가 있으며 아래쪽, 즉 단순한 구조일수록 하찮다고 보았다. ‘인간-포유류-조류-어류-파충류-조개류-식물-무기물’ 순으로 말이다. 수직적 위계질서다. 비록 보네가 라이프니츠(1646∼1716)의 ‘자연의 연속성 원칙’을 옹호하면서 인간과 자연 만물을 사다리꼴로 연결했다손 치더라도 만물의 ‘서열’ 사다리는 ‘자연을 인간의 도구’로 바라본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자연관 그 연장선상에 불과하다.

    그런데 20세기 중·후반부터 기계론적 세계관이 환경대란의 근본적 원인이고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물리학자 프란츠 카프라는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범양사)에서 서구의 기계문명이 초래한 지구문명의 위기를 힌두교, 불교, 노장사상, 선(禪) 등의 동양사상으로 극복하자고 한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모색하는 생태학적 상상력이 동양사상에 내장돼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전통 사상에는 생태적 지혜가 없을까.

    박희병 서울대 국문과 교수는 ‘한국의 생태사상’(돌베개)에서 이규보 서경덕 신흠 홍대용 박지원 등을 예로 한국의 전통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생태학적 사유의 강물을 도도하게 보여준다. 고등학교 국어 문학 한문 교과서에 나오는 고전문학을 통해서도 박희병 교수가 주장하는 한국의 생태사상을 읽어낼 수 있다.



    한 손님이 “몽둥이로 맞아 죽임을 당하는 개를 보고 너무 참혹해서 앞으로 개나 돼지의 고기는 먹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자, 아무개가 “이(?)를 잡아 화로에 태워 죽이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파 이를 잡지 않기로 했다”고 답변한다. 손님은 이(?)는 미물이고 개는 커다란 짐승이라면서 자신을 이죽거리지 말라고 투정한다. 그러자 아무개는 “당신이 내 말을 믿지 못하겠으면 당신의 열 손가락을 깨물어보라. 엄지손가락만 아프고 나머지는 아프지 않는가”라고 응수한다.

    고려시대 문인인 이규보의 수필 ‘슬견설(?犬說)’이다. 만물은 크기나 겉모습, 인간에 대한 이로움과 해로움과는 상관없이 모두 근원적으로 동일한 존재라는 ‘만물일류(萬物一流)’ 사상이 담겨 있다. 만물일류란 짐승과 곤충, 심지어 무생물까지도 존귀함의 정도에서 사람과 다르지 않다는 만물평등 사상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에코필로소피아(생태철학자)인 이규보는 자연과 인간은 서로 도와야 한다는 ‘물아상구(物我相救)’ 메시지를 ‘슬견설’로 남긴 셈이다. 박희병 교수의 이런 관점은 한국 고전문학을 ‘안빈낙도(安貧樂道)’나 ‘물아일체(物我一體)’ 같은 용어로만 분석하던 소박한 문예비평 수준을 뛰어넘었다는 점에서 ‘창의적’이다.

    조선 후기 북학파 거두였던 담헌 홍대용도 생태학적 상상력을 유감없이 펼친 ‘탈근대인’이다. 담헌의 ‘의산문답(醫山問答)’ 한 대목이다.

    ‘실옹: 내가 다시 그대에게 묻네. 생물의 종류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사람과 금수(禽獸)와 초목이네. 세 종류의 생물이 서로 어울려 쇠하기도 하고 성하기도 하거늘, 어찌 귀하고 천한 차등이 있겠는가?

    허자: 천지가 낳은 것 중에 오직 사람이 귀하네. 지금 금수와 초목은 지혜도 없고 깨달음도 없으며 예절도 없고 의리도 없으니, 사람이 금수보다 귀하고 초목이 금수보다 천하지 않은가.

    실옹: 그대는 진실로 사람일 뿐일세. 사람의 처지에서 동물을 보면 사람은 귀하고 동물은 천하며 동물의 처지에서 사람을 보면 동물은 귀하고 사람은 천하지만, 하늘로부터 보면 동물과 사람은 균등하고 똑같이 귀하다네.’

    하늘의 처지에서 보면 인간과 자연은 균등하다는 담헌의 ‘인물균(人物均)’ 사상이 ‘실옹’의 입을 통해 드러난다. 인간과 자연 만물은 단절된 관계가 아니라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관계를 맺고 있고, 인간만 존귀한 게 아니라 만물이 ‘상대적으로’ 다 가치가 있다는 게 실옹, 즉 홍대용의 견해다. 반면 ‘인간과 자연’을 별개의 존재로 보는 허자는 기계론적 세계관을 가졌던 데카르트 격인 인물이다.

    실학파였던 담헌이 실옹(實翁)의 이름에 ‘실(實) 자’를, 허자(虛子)의 이름에 ‘허(虛) 자’를 단 까닭을 가늠할 수 있다. 또한 담헌의 ‘인물균’ 사상은 당시 국제정치학적 관점에서도 획기적이었다. 당시 조선 사대부들은 중화(中華)세계만이 중심이고 존귀하다는 소중화주의 세계관에 흠뻑 빠져 있었다. 하지만 담헌은 인물균 사상을 밑거름 삼아 중화세계와 오랑캐(夷)의 차별을 없애고 그 개별적 주체들의 ‘상대적 가치’를 존중하는 ‘탈(脫)소중화주의’ 세계관으로까지 나아간다. 일찍이 ‘지구는 둥글다’고 했던 ‘조선의 갈릴레이’ 홍대용다운 발상이다.

    이 때문에 박희병 교수는 담헌이 조선시대의 중세적 신분관념이나 당시 사대부들의 소중화주의를 벗어날 수 있었던 동력은 바로 생태학적인 ‘인물균’ 사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요즘 식으로 하면 ‘모든 문화에 우월은 없다’면서 개별적 문화의 독자성을 존중하고 ‘주체/객체’를 이분법적으로 분리하지 않는 문화 상대주의자 레비스트로스와 비슷한 아이디어인 셈이다. 인간의 이성을 신화화한 이성중심주의나 서양의 개별성을 주체 중심으로 환원해 ‘나 아닌 타자’를 식민화한 제국주의 사상과는 확연히 다른 공존의 생태철학이 바로 홍대용의 사상인 것이다.

    북학파 리더였던 연암 박지원도 에코필로소피아이긴 마찬가지다. 박희병 교수는 호랑이의 입을 빌려 위선적인 유학자(儒學者)를 풍자했다고 (고등학생들이) 배웠을 소설 ‘호질(虎叱)’은 유학자에 대한 비판을 넘어 ‘인간’과 ‘인간문명’에 대해서도 성찰과 반성을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호질’의 호랑이는 인간의 잔혹성과 약탈적 면모를 호되게 질타하고 있기 때문이다. 호랑이의 말대로 인간은 그물에서 창·칼·총에 이르기까지 온갖 도구와 장치를 발명해 크고 작은 생물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해치는 잔혹한 동물이다. 이와 달리 호랑이는 초목을 먹지도 않고 벌레나 물고기를 먹지도 않으며, 결코 동류를 잡아먹지 않고 배부르면 사냥을 하지 않는다. 때문에 호랑이의 관점에서는 인간은 “천지간의 큰 도적”일 뿐이고, ‘호질’은 만물일류의 관점에서 인간의 잔인성과 탐욕, 자기중심성을 고발하고 성찰케 한다.

    이렇게 우리의 전통사상 속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은 이나 개나 호랑이나 허자나 실옹이나 모두 똑같이 존귀한 생명체이기 때문에 공존하자는 생태학적 마인드다.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자연관과는 상반된다. 현 단계 인류문명의 위기를 극복하는 대안적 상상력을 기르는 마인드맵인 것이다.

    논술의 창의력은 참신한 근거를 대느냐, 못 대느냐에 달려 있다. 많은 대학이 창의력 평가에서 ‘참신한 근거의 유무’를 따지는 이유다. 참신한 근거는 어디에서 오는가. 참신한 인용과 생각이다. 생태문제를 논술할 때도 천편일률적으로 서양의 생태학을 논하기보다, 우리의 생태학 전통을 인용하는 것도 참신하다. 문제는 독서를 통해 창의적인 인용 능력을 기르는 게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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