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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REPORT

한국 정서 버무린 작품 뉴욕 미술계 “원더풀!”

치열한 고민, 미적 실험 전 세계인 공감… 정체성 적극 표현 젊은 작가들 활동에 주목

  • 뉴욕=송보림 미술 칼럼니스트 brs77@columbia.edu

한국 정서 버무린 작품 뉴욕 미술계 “원더풀!”

올해 3월 뉴욕 맨해튼에서 열린 전미미술교육협회(National Art Education Association) 정기총회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 작가들의 경쟁력을 새롭게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미술교육자들의 모임으로는 미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연례행사인 이 자리에서 어느 미대 교수가 뜻밖에도 한 미국 미술관에 전시된 한국 작가 서도호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미술 분야에 있는 사람조차도 대부분 ‘한국의 미술은 도자기’식으로 이해하기에 그의 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 교수는 우연히 접하게 된 서 작가의 작품에 감명받았으며, 최근 미국 미술교육계에서 큰 화두로 통하는 ‘시각문화(Visual Culture)’ 교육에서 그의 작품이 좋은 감상 사례가 될 것이라고 했다.

“현대미술을 어렵게만 여기는 어른들도 서도호의 작품을 재미있게 받아들인다. 열린 마음으로 작품을 대하는 아이들은 그의 작품을 보면서 할 얘기가 정말 많을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서도호의 작품은 이미 미국에서 현대미술 감상 교육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미 공영방송 PBS가 제작한 현대미술 시리즈인 ‘21세기 미술’에서 서도호의 작품은 키키 스미스나 카라 워커 같은 쟁쟁한 현대작가들과 나란히 소개됐다.

뉴욕을 주요 근거지로 활동하고 있는 서도호는 까다롭기로 유명한 뉴욕 평단에서 어떻게 ‘뜨는’ 작가가 됐을까? PBS는 그의 작업에 대해 “국가 간 경계가 허물어지는 세계화 시대에 개인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라고 소개했다. 서도호의 작업은 언뜻 세련된 한 설치작품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딘가 익숙한 문화코드가 곳곳에서 드러난다.

한국 전통가옥과 의복, 교복과 교련복, 그리고 군인과 낙하산. 바로 이것이 서도호가 작품에 주로 사용하는 오브제다. 그는 뉴욕에서 활동하기 전 한국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 자신이 체험한 한국의 현대문화와 자신의 뿌리에 숨쉬는 전통을 21세기의 세련된 감성으로 재현하고 해석하기에 그가 주목받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서도호 작품 현대미술 감상 교육자료로 활용

한국 정서 버무린 작품 뉴욕 미술계 “원더풀!”

이름, 군번, 종교, 혈액형 등이 적혀 있는 미군 인식표 7만여 개를 붙여 만든 서도호의 작품 ‘Some/One’. 생과 사의 숙명에 갇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삶을 표현하고 있다.

20세기 중반 이후 줄곧 세계미술의 중심지로 명성을 지켜오고 있는 뉴욕. 해마다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꿈을 실현하고자 많은 미술가들이 뉴욕으로 몰려온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경쟁이 극도로 치열한 뉴욕 미술계에서 제2의 백남준, 제2의 서도호가 되기는 무척 어렵다.

실제 그동안 뉴욕에서 꽤 많은 중국 작가와 일본 작가가 성공을 거뒀지만 한국 작가의 성공 사례는 매우 드물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서도호 외에도 몇 명의 한국 작가가 크게 주목받고 있다.

자신을 주인공으로 삼은 독특한 사진으로 ‘신디 셔먼(Cindy Sherman)의 대를 잇는 여류작가’로 호평받아온 니키 리(Nikki Lee)는 가장 보수적인 미술관으로 통하는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서 작품을 구입해 화제가 됐다. 비디오 작가 김신일은 최근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선발돼 뉴욕의 젊은 작가라면 누구나 동경하는 첼시의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했다. 아시아 작가 하면 흔히 중국과 일본을 떠올리던 뉴욕 미술계가 새삼스레 한국 작가들을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의외로 이들은 뉴욕이라는 국제무대의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한국적 뿌리’를 작품 안에 제대로 드러냈기 때문에 이곳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뿌리란 한국의 전통뿐 아니라 근대와 현대의 정서, 즉 바로 지금 이 순간을 함께 살고 있는 전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정서로 이해된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미술작가들의 문화 정체성 고민은 미국에 들어가면서부터 시작된다. 미술작가가 자신을 제대로 돌아볼 줄 아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다른 작가들과 다른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품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면을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뜨끈한 무언가’를 끄집어내 작품에 투영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 인간이 뿌리내리고 자란 사회와 문화가 그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단일민족 국가인 한국 미술가들이 일상생활에서 ‘문화충돌’을 경험하고 자기 문화를 되새김질하는 기회는 드물다.

그러나 뉴욕에 발 디딘 후 상황은 확연하게 바뀐다.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사는 이 도시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교육학자 허드(Heard)의 지적처럼 ‘누구나 새로운 문화를 대표하며 전파하는 문화적 개체’다. 서로 다른 문화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미술가들은 자기 문화에 대해 비로소 진지한 자각을 시작한다.

한편으로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어느 분야보다 강한 뉴욕의 미술시장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외국 작가에게 ‘문화 정체성’은 가장 좋은 무기이기도 하다. 동양 작가는 독특한 현지 문화를 전면으로 내세울 때 더 쉽게 주목받을 수 있다. 물론 성찰 없이 문화 정체성을 정치적으로 이용했을 때는 우려 섞인 시선을 받기도 한다. 실제 이런 경우는 종종 일어난다. 처음으로 뉴욕 첼시 지역의 갤러리를 방문해 한 중국 작가의 작품을 보고 쓴웃음을 지은 적이 있다. 그는 중국의 사회주의 이슈를 누드화를 통해 드러내고 있었다.

뉴욕의 명문 미술학교인 SVA(School of Visual Art) 대학원을 졸업하고 10년 넘게 뉴욕에 거주하는 화가 박정환은 강렬한 색채의 회화작업을 주로 하는데, 한국식 전통방법으로 직접 안료를 만들고 캔버스에 한지를 붙여 화폭의 뼈대를 만든다. 그는 SVA에 진학한 뒤 한동안 개념미술의 전통이 강한 미국 미술계의 흐름 때문에 혼란스러웠다고 고백한다.

한국 정서 버무린 작품 뉴욕 미술계 “원더풀!”

박정환의 작품 ‘remembrances’stg’

“한국인 뿌리 나를 확립하는 데 큰 구실”

하지만 그는 뉴욕 미술계의 주요 흐름을 따르지 않기로 했다. 대신 ‘나는 할 수 있으나 다른 이들은 절대 할 수 없는 것’을 찾아나섰고, 그 결과 지금처럼 작업을 하고 있다.

한지는 보통 ‘Rice Paper’로 번역된다.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 지역 전반에 퍼져 있는 종이기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박정환은 한지를 항상 ‘Korean Paper’라고 명시한다. 자신이 한국인임을 알리기 위해서다. 박정환은 많은 한국 작가들이 뉴욕에서 활동하며 혼란을 겪는 이유가 미국 작가나 미국의 방식을 따라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우리는 미국인도 아니고 더욱이 이민자(Korean-American)도 아니다.” 미국 방식을 무조건 좇으면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뉴욕에서 11년째 거주하며 미국뿐 아니라 프랑스 등에서도 활발하게 전시활동을 하는 화가 정순옥은 ‘미래사회’ ‘유기적 생명체’ 등을 주제로 한 이미지 작업을 해오고 있다. 그는 이런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에 대해 “뉴욕에서 이방인인 내가 외계인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언뜻 재치 있는 유머로 들리지만 그 속뜻은 그리 가볍지만은 않다.

서울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던 정순옥은 37세 나이에 미술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필리핀으로 떠나 미술공부를 시작했다. 이후 뉴욕으로 가 석사과정을 마친 뒤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뉴욕 도착 후 컴퓨터 테크놀로지에 무지한 자신이 뒤처진다고 느꼈고, 이런 충격으로 미래세계에 대해 미묘한 정서를 갖게 됐다. 또한 정순옥은 선, 튜브, 연결망으로 가득한 자기 작품이 한편으로는 ‘가족’이라는 주제에 대한 관심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핏줄로 얽힌 가족관계를 한국인은 무척 중시하는데, 이런 맥락에서 한국의 문화와 전통의 맥이 자기 작품에 살아 있다는 것이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젊은 작가들 중 단연 돋보이는 김신일은 종이에 자국을 남겨 선을 만드는 ‘압인 드로잉’을 바탕으로 한 비디오 설치를 해왔다.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철학적 개념은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물 사이, 그리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 사이의 관계 고찰’에 관한 것이다. 불교 사상은 김신일의 작품에 큰 영향을 끼쳤다. 김신일이 생각하기에 불교는 아시아 전체에 퍼져 있지만, 특히 한국인에게 그 의미가 남다르다. “한국인은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고 근원적 질문을 던짐으로써 자신을 반성하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김신일뿐 아니라 많은 한국 작가들이 불교 사상의 영향에 대해 언급했다. 한국 사람은 교회에 다녀도 불교나 유교 사상에 익숙하다. 불교나 유교가 종교가 아니라 사회적 관습으로 자리하기 때문이다.

뉴욕의 한국 작가들은 뉴욕에 혼재하는 다양한 문화에 대해서도 비슷한 이해를 하고 있었다. 서로 다른 문화가 혼합돼 있는 것이 아니라, 각 문화 간의 고유성을 보존한 채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정환은 “뉴욕에 모든 문화가 섞여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각개 문화가 하나하나 살아 있다”고 말했다. 정순옥도 “뉴욕은 다양성의 도시라기보다는 각 문화의 색채가 퇴색하지 않고 보존된 곳”이라고 말했다. 뉴욕에서 6년 거주한 뒤 현재는 한국에서 활동 중인 화가 장성복은 “뉴욕의 중산층이 각자의 문화를 잘 조화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뉴욕은 각 문화 고유성 보존한 채 공존하는 곳

한국 정서 버무린 작품 뉴욕 미술계 “원더풀!”

정순옥의 작품 ‘Landscape by cell cleavage No.4’

문화학자 색스(Sacks)와 테일(Theil)은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의 중심개념으로 ‘조화, 통일, 공평’을 들었다. 즉 문화 간의 차이만을 강조하지 말고 서로가 최선의 조화를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이는 뉴욕에 잘 들어맞는 말이다. 뉴욕의 작가들은 자신의 뿌리 문화를 거부하며 주류사회 문화에 무조건 맞추기보다는 자신의 역사와 정체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거기서 발산되는 독특한 창의성을 바탕으로 예술세계를 창조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다른 이들의 문화를 존중해야 함은 당연하다. 이런 생각들은 뉴욕이 각국에서 몰려든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을 원동력으로 문화의 중심지로 거듭날 수 있는 기초가 됐다.

이국 땅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더 골몰하고, 나의 정체성과 타인의 정체성을 모두 존중하며 사는 것. 이것은 비단 미술계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세계화’로 명명되는, 너와 나의 경계가 허물어진 현재의 삶. 어떻게 섞여 살아야 개개인의 근본이 흔들리지 않으며 행복할 수 있을 것인가?

나를 앎으로써 서로를 더욱 사랑할 수 있는 이상적인 삶에 대한 해답은 뉴욕에서 활동하는 한국 작가들의 경쟁력과 해법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은 작품을 통해 감상자들의 시각을 변화시키고, 삶에 영향을 주었으며, 궁극적으로 그들을 조금 더 행복하게 만들고 있으니까 말이다.



주간동아 602호 (p35~38)

뉴욕=송보림 미술 칼럼니스트 brs77@columbia.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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