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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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맛에 반한 인생, 2대째 전통을 담그다

만화 ‘식객’ 실제 모델 수진원농장 故 정두화 옹 집안 이야기

  • 이남희 기자 irun@donga.com

    입력2007-05-09 17: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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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맛에 반한 인생, 2대째 전통을 담그다

    고 정두화 옹이 전하는 메시지가 쓰인 장독(오른쪽).

    새벽빛이 어슴푸레하게 물드는 아침이면 노인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독을 닦았다. 600여 개의 독에 담긴 된장, 간장이 살아 숨쉬도록 정성을 다했다. 한 시대를 풍미한 기업 ‘말표산업’의 회장 직함을 버리고 ‘머슴’을 아호(雅號)로 삼은 노인. 그는 잊혀가는 전통 장맛을 복원하는 데 여생을 걸었다. 무농약 유기농법으로 2만 평의 밭에서 콩을 직접 기르고, 지하 200m에서 퍼올린 암반수로 장을 담갔다. 최근 허영만 화백의 ‘동아일보’ 연재만화 ‘식객’ 86화에 주인공으로 등장한 전 수진원농장 대표 고(故) 정두화 옹 이야기다.

    메주와 소금물이 발효하기 가장 좋은 음력 정월 말날(午日)에 장을 담그던 장인의 고집은 어떻게 계승되고 있을까. 풋풋한 봄바람이 불던 4월 말, 경기 양평군 용문면 삼성리에 자리잡은 수진원농장을 찾았다. 사람보다 객(客)을 먼저 맞이한 것은 구수한 장의 향기. 물 좋고 공기 좋고, 햇살과 바람이 좋은 이곳에서 장이 익어간다. 텃밭 곳곳에 활짝 핀 철쭉, 잔디꽃은 봄기운을 가득 머금었다.

    지난해 12월 세상을 뜬 정두화 옹을 대신해 이곳을 지키는 사람은 그의 차남 정연수 수진원농장 대표(말표산업주식회사 대표·56)와 성명희(52) 씨 부부. 주중엔 말표산업 대표로 근무하는 정 대표는 주말이면 수진원농장을 꾸려가는 농군으로 변신한다. 훤칠한 키에 스타일리시한 청바지를 입은 정 대표의 첫인상은 전통 장맛을 지키는 농군의 이미지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 “예상과 다른 도시적 이미지에 놀랐다”는 기자의 인사에 정 대표는 껄껄 웃으며 답했다.

    “저도 예전엔 ‘내가 이걸(수진원농장을)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어요. 시골에 오면 답답함을 느끼던 도시형 인간이었으니까요. 하지만 3~4년간 어르신을 곁에서 모시니까 변하더라고요. 언제부턴가 시골바람과 꽃이 좋아지는 겁니다. 말투도 걸음걸이도 아버지와 비슷해졌어요. ‘농장은 꼭 지켜야 한다’는 선친의 유지를 어느덧 운명처럼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장맛에 반한 인생, 2대째 전통을 담그다

    지난해 12월 세상을 뜬 고 정두화 옹(왼쪽). 성명희 씨가 2005년에 담근 된장을 남편 정연수 수진원농장 대표에게 먹여주고 있다.

    기업체 회장 자리 떠나 장 담그는 ‘머슴’으로



    정두화 옹은 슬하에 3남2녀를 두었다. 장남 정연우 씨가 외국인과 결혼해 미국으로 이민을 간 탓에 차남 정 대표가 수진원농장과 말표산업을 물려받은 것. 만화 ‘식객’에서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막내로 등장한 인물은 정연주 성신여대 법대 교수다. 정 대표의 큰누나 정연자 씨는 10여 년 전 사망했고, 작은누나 정연홍 씨는 시인으로 활동 중이다. 정두화 옹이 이렇듯 자식농사에서 성공을 거둔 것도 누구보다 엄격한 교육원칙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남에겐 한없이 베풀면서도 자식들에겐 용돈 한 푼 안 주셨어요. 저는 대학 다닐 때 청바지 장사를 하면서 용돈을 벌었고, 심지어 신혼여행 가서도 돈이 없어 고생했죠. 그땐 호랑이 같은 아버지에게 참 섭섭했는데, 지금 돌아보면 그 교육이 저를 이만큼 키운 것 같습니다.”

    수진원농장이 탄생한 것은 1970년대 초반. 정두화 옹이 군에 납품하던 ‘말표 구두약’이 큰 인기를 누리던 시점이다. 55년 군수물자 업체인 ‘태양사’를 설립한 그는 일본 3H사와의 제휴로 한국 구두약의 대명사인 ‘말표 구두약’을 탄생시킨 유능한 사업가였다. 하지만 그는 잘나가던 회사를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53세 나이에 낙향을 결심했다. 사업을 위해 거짓말을 해야 하는 도시생활을 더는 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의 ‘괴짜 행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은퇴 후 정착할 곳을 알아보던 그는 “이 땅은 인재가 많이 나올 곳”이라는 한 노인의 말을 듣고, 경기 양평 주변의 땅을 웃돈 얹어 사들였다. 1평에 500원이라면 1000원을 주고 사는 식이었다. “강산풍월(江山風月)에는 주인이 없는 법인데, 땅을 싸게 매입했다가 나중에 큰 싸움이 난다”는 것이 정두화 옹이 내세운 독특한 논리였다.

    이렇게 사들인 16만 평의 땅은 된장과 간장을 만드는 수진원농장으로 변신했다. 공기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르는 양평은 장이 숙성되기에 최적의 자연환경이었던 것. 기업을 일구기 전 콩나물을 키우고 두부를 만들어 팔았던 정두화 옹이 된장 만들기에 관심을 갖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도시에서 담근 장이 제 맛을 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던 그는 전문가를 찾아다니며 전통 된장 만드는 법을 배웠다. 창경궁 낙선재(樂善齋)를 오가며 궁중요리 문화도 습득했다. “좋은 장맛을 내려면 공기, 물, 콩, 독(항아리), 솜씨가 맞아떨어져야 한다”는 정두화 옹의 가르침은 된장 만들기의 ‘바이블’로 통할 정도다.

    독을 하나 고를 때도 그는 엄격한 요건을 지켰다.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황토를 사용하고 솔가지와 콩깍지 등을 태워 만든 잿물을 입혀 1300℃ 이상 가마에서 구운 숨 쉬는 항아리’를 찾았다. 정 대표는 장을 담그는 날이면 목욕재계하던 아버지를 떠올리며 그리움을 감추지 못했다.

    “어르신은 장 담그는 일을 신성하게 여겼습니다. 손에 조금이라도 상처를 입은 사람은 장을 담그지 못하게 하셨죠. 애연가였던 아버지는 담배 연기가 공기 중의 좋은 미생물을 죽일까봐 담배까지 끊으셨습니다. 저는 아직 담배를 못 끊었으니 아버지를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다고 할까요.”

    수진원농장 곳곳에는 정두화 옹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마음씨 말씨 솜씨가 아름다워야 미녀(美女)다’ ‘아내는 자식만 키우는 게 아니라 남편도 키우는 거다’ ‘자식에게 천금(千金)을 물려준다 해도 기술 한 가지를 가르치는 것만 못하다’…. 작은 옹기들에 쓰인 글귀는 모두 정두화 옹이 후손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적은 것이다. 그뿐인가. 농장 초입에 펄럭이는 태극기에도 그의 남다른 철학이 담겨 있다. 다음은 며느리 성명희 씨의 회고.

    “식구들이 농장을 찾는 날이면 아버님께서 태극기를 달아놓으셨어요. ‘나라의 미래를 이끌어갈 중요한 사람들이 방문하는 날’이라고 하시면서요. 아버님은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마음이 누구보다 깊은 분이셨습니다.”

    장 담그는 장인의 지혜는 농장 곳곳에서 빛났다. 된장과 간장을 담은 690여 개의 독은 햇볕을 잘 받기 위해 높이에 따라 정렬돼 있었다. 장독대 근처에는 소나무를 심어 송홧가루가 된장 발효에 도움을 주도록 했다. 오죽하면 궁중음식 전문가 고(故) 황혜성 선생이 이곳에 장독을 놓아달라고 부탁했을까.

    수진원농장이 생산하는 ‘명품 된장’은 요즘 웰빙 트렌드에 걸맞은 건강식이다. 대량 생산한다면 짭짤한 돈벌이가 될 법하다. 이곳 된장을 맛본 LG 구자경 명예회장이 LG유통 사장에게 “우리가 수진원 된장을 판매할 수 있도록 (정두화 옹을) 설득하라”고 지시한 적도 있었지만, 정두화 옹은 이를 거절했다. 된장을 대량생산하게 되면, 농약을 쓰지 않은 국산 콩을 구하는 데 한계가 생기기 때문이다. 정 대표는 “아버지는 애초 된장으로 돈 벌 생각은 하지 않으셨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사실 농장은 1년에 1억 원의 적자를 냅니다. 아버지는 농장을 꾸리며 콩을 기르는 비용과 소금값은 계산에 넣지도 않으셨어요. 이상한 셈법이죠. 재래식 된장 맛을 지켜가는 것이 선친의 소원이었던 만큼, 저도 그 철칙을 꼭 지키려 합니다. 어르신이 ‘유통사를 거치면 소비자가 된장을 비싼 가격으로 먹는다’고 강조하셨기에, 저희는 인터넷(www.haebarang.com)을 통해서나 농장을 직접 방문한 고객에게만 제품을 팔고 있습니다. 그래도 자꾸 적자를 내면 후손들이 농장을 부담스러워할 테니,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다른 사업을 구상 중입니다.”

    말표산업의 최고경영자(CEO)로서도 그는 선친의 유지를 지켜가고 있다. ‘은행 돈을 무서워하라’ ‘직원들의 등부터 따습게 해주어라’ ‘광고도 곧 소비자 부담이다’라는 세 가지 당부를 늘 잊지 않았다. 구두약 외에도 자동차 내외장 왁스, 건물바닥 코팅제, 유리세정제 등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는 말표산업은 ‘무차입 경영’으로 대외적인 신뢰를 쌓았다. 회사 이익금의 30%는 무조건 직원 복지를 위해 쓰는 것은 물론이다. 또 근래 외국 잡지에 광고를 시작했을 뿐, 국내 광고는 거의 하지 않았다. 광고비로 쓸 비용을 제품의 질을 높이는 데 투자했기 때문이다. 정 대표는 선친의 깊은 뜻을 세월이 흘러서야 비로소 이해하게 됐다고 말했다.

    1년에 1억 적자, 전통 잇는 보람으로 채워

    “말표산업은 1998년 글로벌 기업 ‘존슨프로페셔널’과 유리한 조건으로 기술협정을 체결해 화제를 모았습니다. 존슨 측에서 제휴 조건으로 ‘회사의 투명성, 부채율 0%, 직원들을 위한 완벽한 근로 및 복지 환경’을 제시했는데, 저희 회사가 그것에 모두 부합했거든요. 아버지가 강조한 경영 원칙이 국제사회에서 인정받은 것입니다. ‘말표’라는 이름이 촌스럽다고들 하지만, 아버지가 애정을 갖고 키운 회사의 이름을 쉽게 바꿀 순 없습니다. 여기엔 한 기업이 쌓아온 신뢰가 고스란히 묻어 있으니까요.”

    장 담그는 사람이 지녀야 할 첫 번째 덕목은 바로 정직이다. 묵을수록 제 맛을 내는 장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친의 올곧은 성품을 그대로 물려받은 아들은 아버지보다 세 살 많은 나이에 농장 운영을 맡았다. 부지불식간에 아버지를 닮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정 대표는 또 한 번 놀라움을 느낀다. ‘팔진(八珍)의 진미’인 장을 정직하게 지켜가겠다는 그의 다짐을 격려하듯 봄 햇살도 따스하게 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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