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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 위기 넘겨도 HEU(고농축우라늄) 뇌관은 그대로

北 원심분리기 숨기는 한 한반도 비핵화 머나먼 길 …언제든 꺼낼 수 있는 회심의 카드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북핵 위기 넘겨도 HEU(고농축우라늄) 뇌관은 그대로

북핵 위기 넘겨도 HEU(고농축우라늄) 뇌관은 그대로

동상이몽(同床異夢). 한미 정상은 집권 말기 업적과 정권 재창출, 김정일은 체제 유지와 후계체제 구축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2002년 10월4일 오후 5시경, 북한 평양의 최고인민회의 회의실. 고(故)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상화가 제임스 켈리 당시 미국 국무부 차관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회담장에 들어온 강석주 당시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이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과 관련해 북한의 의견을 피력한 때는 창 밖으로 조금씩 어스름이 깔릴 무렵이었다.

“우리는 이것보다 더한 것도 만들게 돼 있다. 앞으로 별의별 게 다 나올 것이다.”

1994년의 제네바 합의가 파기되면서 시작된 두 번째 북핵 위기는 강석주의 이 발언에서 비롯됐다. 켈리가 평양 순안공항에서 한국의 오산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른 건 10월5일. 서울에 도착한 켈리는 충격적인 사실을 공개한다.

“북한이 고농축우라늄 프로젝트를 시인했다. 매우 거칠고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켈리의 이 발언은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강석주-켈리 면담에 배석한 인사들의 최근 언급에 따르면, 강석주는 “HEU로 핵무기를 만들고 있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확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NCND, neither confirm nor deny)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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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


우라늄에서 핵분열을 일으키는 물질인 우라늄 235를 정제하기 위한 계획과 원심분리기·알루미늄 튜브 등의 장비 및 시설, 이를 가동해 얻은 고농축우라늄으로 만든 핵무기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원심분리기는 여러 곳에 분산해 은닉할 수 있어 장기간 노출되지 않고 고농축우라늄을 생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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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량사기무기


레바논의 무장단체 헤즈볼라가 만든 조어(造語). 대량살상무기(WMD)의 원어 Weapons of Mass Destruction 가운데 Destruction(파괴, 살상)을 Deceit(사기)로 바꾼 것. 헤즈볼라는 대량사기무기라는 말로 미국을 조롱한다.

“미국이 우리를 겨냥해 이라크의 시아파에게 신형 무기 사용법을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주장대로라면 우리는 ‘대량사기무기’를 갖고 있다.” 헤즈볼라가 “미국이 무슬림과 관련한 거짓 사실들을 퍼뜨려 반미 중동국가에 대한 공격 명분으로 삼아왔다”면서 이라크에서 WMD를 발견하지 못한 걸 비꼬고 있는 것이다. .


“켈리가 김계관 외무성 부상을 만나 HEU에 대해 물었지만 김 부상은 부인했답니다. 켈리는 이튿날 강 제1부상에게 좀더 단도직입적으로 HEU에 대해 물었는데, 강 제1부상은 ‘주권문제다. 왜 관여하느냐’는 식으로 응수했답니다. 그 면담 이후 방북단 8명은 그들끼리 ‘강석주가 HEU 프로그램을 시인했다’고 합의를 봤다는 거예요. 이게 말이 됩니까. 1964년의 ‘통킹만 사건’과 비슷해요.”

양성철 전 주미대사는 3월7일 전화통화에서 “내가 방북단 8명 중 2명에게 직접 들은 얘기”라면서 “HEU 프로젝트는 과장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북한이 HEU에 의한 핵개발 사실을 시인했다”고 켈리가 왜곡하면서 어처구니없이 2차 북핵 위기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한국의 사회단체들도 HEU와 관련해 미국을 성토하고 나섰다.

“북한이 몰래 우라늄 핵무기를 만들고 있다는 근거 없는 주장이 난무하고 눈덩이 불 듯 커지면서 ‘북한이 제네바 합의를 어겼다’는 분위기가 조장됐고, 결국 2002년 8월7일 함경남도 신포에서의 경수로 타설식은 한여름밤의 꿈으로 끝났다. 그 결과 4년여를 허송세월했다.”(3월2일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언론본부)

파키스탄, 북에 원심분리기 기술 전수

2·13 합의 이후 북-미 간에 훈풍이 불면서 “HEU 프로그램은 애당초 없었다”거나 “미국이 왜곡, 과장한 것”이라는 주장이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 미국은 ‘허위사실 유포’와 관련해 ‘전과(前過)’가 없지 않다. 64년 베트남 전쟁에 미국이 개입하는 계기가 된 통킹만 사건이 대표적이다. 미국은 이 사건을 조작함으로써 확전의 명분을 쌓았다. 그렇다면 일각의 주장처럼 북한의 HEU도 미국이 북한을 윽박지르려고 조작한 ‘대량사기무기’에 불과한 것일까?

시계추를 되돌려 2002년 10월3일 북한 외무성 회의실. 을씨년스러운 방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럭셔리한 테이블에서 켈리가 김계관 외무성 부상을 몰아세웠다.

“북한이 HEU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것은 제네바 합의를 비롯한 국제협정에 대한 심각한 위반이다.”

김계관은 당황한 듯 보였다. 그러나 그는 곧 평정심을 되찾는다.

“날조다. 그런 계획은 없다. 증거를 제시하라.”

켈리도 물러서지 않았다. (당시 언론 보도와 달리 켈리는 물적증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HEU는 숨기기 쉽다. 내가 여기서 증거를 제시하면 너희들이 그것을 감추는 것을 도와줄 뿐이다.”

그러나 이튿날 강석주의 발언은 크게 달랐다. 그는 ‘있다’ ‘갖고 있다’고는 말하지 않았으나, ‘없다’ ‘갖고 있지 않다’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 대표단이 그의 발언을 복기하면서 ‘시인했다’고 결론짓는 데 이견이 없었을 만큼 그의 NCND는 긍정에 무게가 실린 것이었다.

미국에 의해 그 실체가 과장된 측면이 없지 않지만, 북한의 HEU 프로그램은 적어도 최근까지 진행됐거나, ‘지금’ ‘한반도’에서 이뤄지고 있는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다. 고(故) 최광 전 북한 인민무력부장의 이슬라마바드 방문 등 그동안 언론에 공개되지 않은 사실을 얼개로 HEU 프로그램의 진행을 재구성해보자.

핵무기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히로시마(廣島)에 투하된 우라늄탄과 나가사키(長崎)에 떨어진 플루토늄탄이 그것.(지난해 10월9일 함북 길주군에서 이뤄진 북한의 핵실험은 폐연료봉에서 재처리한 플루토늄을 이용한 것으로, 북한은 플루토늄탄을 보유한 ‘사실상의’ 핵 보유국이다).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국가는 보통 플루토늄탄과 우라늄탄 개발을 동시에 추진하는데, HEU 프로그램은 핵실험 없이 무기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우라늄탄 개발 시설은 플루토늄탄 시설이 미국의 ‘열쇳구멍(Keyhole이란 애칭의 인공위성)’에 고스란히 노출된 것과 달리 은폐, 엄폐에 유리하다.

1990년대 초 북한은 영변 핵시설이 노출되면서 국제사회의 곱지 않은 시선에 직면한다. 79년 플루토늄 추출 기술을 확보한 뒤 거북 걸음으로 진행해온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가 발가벗겨진 것. 이즈음부터 북한이 감추기에 유리한 HEU 프로그램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가려운 곳을 긁어준 곳은 파키스탄이다. 북한은 노동미사일을 개발했으되 핵무기가 없었고, 파키스탄은 우라늄탄 기술을 갖고 있었으나 투발수단이 없었다. 두 나라의 이해(利害)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1993년 5월 북한은 중거리미사일 ‘노동’을 일본을 향해 시험, 발사한다. 노동이 비상하는 모습을 직접 지켜본 파키스탄 기술자들은 환호작약했다. 그로부터 7개월 뒤 파키스탄의 베나지르 부토 당시 총리가 평양을 방문했고, 양국 지도부는 HEU와 미사일의 ‘교환 거래’가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는 결론을 내린다.

1994년 봄, 파키스탄 원자폭탄의 아버지 A.Q. 칸 박사가 선물보따리를 들고 북한을 방문했으며, 이듬해 11월엔 최광이 이슬라마바드로 날아간다. 북한은 최광을 통해 노동미사일의 연료탱크, 로켓엔진 등 8개 주요 부품을 파키스탄에 공급하기로 약속한다(파키스탄은 98년 4월 노동미사일을 개량한 가우리 미사일의 시험발사에 성공했다).

파키스탄은 한동안 대북 커넥션을 부인하다가 국제사회의 압력이 거세지자 2003년 11월 칸 박사를 가택 연금하고 조사를 진행했다. 9·11 테러 이후 미국과의 밀월에 들어간 파키스탄이 북한과의 핵 커넥션을 국제사회에 까발린 것.

2004년 4월 파키스탄 당국은 한·미·일 3국에 심문 결과를 브리핑했는데, 칸 박사는 △소수의 샘플용 원심분리기 △원심분리기 설계도 △원심분리기를 갖추는 데 필요한 장비목록이 담긴 쇼핑 리스트를 북한에 제공했다고 진술했다.

페르베즈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도 북한에 P-1, P-2 원심분리기 20여 기와 원심분리기 제조를 위한 설계도, 유량계, 특수 오일 등을 제공하고 북한 기술자들을 자국의 우라늄 농축시설로 초청해 기술을 전수했다고 시인했다.

북한 확보한 원심분리기 양 미국도 파악 못해

우라늄을 농축하려면 원심분리기가 필요하다. HEU는 ‘가벼운 우라늄(우라늄 235)’이 전체의 20% 이상인 우라늄을 뜻한다. 자연 상태의 우라늄에서 우라늄 235는 0.7%에 불과하고 ‘무거운 우라늄(우라늄 238)’이 대부분이다.

우라늄 농축은 우라늄 235를 늘리면서 우라늄 238을 줄이는 과정인데, 핵무기를 만들려면 우라늄 235가 90% 넘게 포함된 HEU를 확보해야 한다. 파키스탄은 2000여 기의 원심분리기로 연 60kg가량의 HEU를 생산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라늄탄을 만드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HEU는 50kg. 원심분리기 1기의 농축 능력은 연간 약 30g으로, 우라늄탄 하나를 만들려면 1700기의 원심분리기를 1년 동안 가동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북한이 파키스탄에게서 넘겨받은 20여 기만으로는 핵무기 1개를 만드는 데 80년 넘게 걸리는 셈이다.

북한은 칸 박사에게 우라늄탄 제조기술 일체를 전수받은 뒤 원심분리기 수를 늘리기 위해 노력해왔다. 북한이 얼마만큼의 원심분리기를 확보했는지는 미국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나, 김정일이 원심분리기 쇼핑에 나선 것만은 분명하다.

“1998년 영국 세관이 모스크바의 한 연구소에서 파키스탄 북한대표부로 전달되려던 (HEU 프로그램에 쓰이는) 부식방지용 합금인 마레이징강을 압류했다. 2003년 4월 프랑스는 한 독일회사가 프랑스 국적의 화물선을 통해 북한에 보내려던 22t의 특수 알루미늄관(원심분리기 400여 기를 제조할 수 있는 분량)을 수에즈운하에서 적발하기도 했다. 국정원도 1998년 북한 과학자들의 이슬라바마드 출장을 포착했는데, 북한이 원심분리기 1만여 기를 제작할 수 있는 부품을 발주했다는 미확인 첩보도 있었다.”(정보당국의 한 관계자)

북한이 원심분리기 확보에 나섰을 때 핵무기 암시장은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칸 연구소는 카이로, 카사블랑카, 두바이, 쿠알라룸푸르에 ‘출장소’를 세우고 자금세탁을 하면서 원심분리기 부품공장을 관리했다. 칸이 구축한 암시장은 ‘대형 할인점’에 비견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상품을 구비하고 있었다.

△핵폭탄 설계도 △핵폭탄 생산설비 및 부품 △기술 자문 등을 제공하는 ‘원스톱 서비스센터’가 마련돼 있었으므로 북한이 HEU를 이용한 핵폭탄 설계도와 원심분리기 제작기술 등을 확보하지 못했을 가능성은 낮다. 북한과 비슷한 시기에 HEU 프로그램에 착수한 이란은 3000~4000기의 원심분리기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북한은?

미국은 2·13 합의 이후 HEU 프로그램과 관련해 한발 물러서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미국의 갑작스런 태도 변화는 현지 언론조차 ‘놀랄 일’로 받아들인다.

조지프 디트라니 미국 국가정보국 북한담당관은 2월27일 상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북한의) HEU 프로그램이 현재 존재하는지에 대해선 ‘중간 수준의 신뢰도(mid-confidence level)’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이 우라늄 농축에 필요한 원심분리기와 알루미늄 튜브를 사들였으나 실제로 우라늄을 얼마나 농축했는지는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북한은 3월6일 뉴욕에서 열린 미국과의 양자회담에서 HEU 관련 장비 도입을 처음으로 시인했으나, 장비가 우라늄 농축에 쓰이진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해 미국이 HEU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북한에 퇴로를 열어주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에너지 생산을 위해 장비를 구입했다는 다소 모호한 설명과 함께 북한이 HEU 장비를 반납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는 것. 게리 시모어 미국 외교협회 부회장은 자유아시아방송(RFA)에 출연해 이렇게 말했다.

“북한에 비밀 우라늄 농축시설이 있는 건 아니고, 수년 전 사들인 물자와 부품들을 보관한 창고 정도만 있다는 것으로 (HEU 프로그램 논란이) 마무리될 수 있다.”

핵 앞세운 북한 성공적 외교?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북한이 쇼핑한 HEU 장비가 실제 우라늄 농축에 사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면 2·13 합의는 순조롭게 구체화된다. 문제는 IAEA가 북한의 HEU 프로그램을 실사하면서 북한이 숨겨놓았을 가능성이 있는 원심분리기를 찾아내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 미국이 퇴로를 열어주고 북한이 일부 시인하더라도 HEU가 있는 한 한반도의 비핵화는 장담할 수 없다. 북한이 파키스탄에서 원심분리기를 넘겨받았고, 원심분리기 제작에 필요한 다른 장비들도 사들였다는 건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HEU 문제가 해소되려면 적어도 세 가지가 투명하게 검증돼야 한다.

△북한은 과연 몇 기의 원심분리기를 확보했는가.

△북한이 확보한 HEU는 과연 얼마만큼인가.

△북한이 원심분리기를 숨겨놓았다면 그 장소는?

문제는 이 세 가지를 실체적으로 검증하기가 쉽지 않다는 데 있다. 미국과의 협상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뒤에도 북한이 언제든 HEU 프로그램에 대한 ‘야욕’을 다시 드러낼 수 있다는 얘기다.

미국의 윈-윈 전략(win-win·중동과 한반도에서 동시에 전쟁이 발발했을 때 모두 승리하겠다는 것)은 최근 그 위세를 적지 않게 잃은 모양새다. 이라크에서조차 고전하고 있는 미국의 현재 모습은 윈-윈보다는 윈 앤드 홀드(win · hold)에 가깝다. 여기서 ‘홀드’는 북한이 아니라 우라늄탄 개발을 코앞에 둔 이란을 가리킨다.

윈 앤드 홀드, 홀드(win · hold, hold)- 북한은 두 번째 홀드다. 미국은 이라크와 이란을 상대하기도 버거운 눈치다. 결국 강석주의 긍정에 무게를 둔 NCND는 “동지들 덕에 강성대국으로 우뚝 서게 됐다”는 김정일의 말만큼이나 현재로선 성공한 외교전략의 모양새다. 그러나 주민들을 아사(餓死)케 하면서 이룬 성과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익명을 요구한 한 국책연구소 관계자는 “북한의 외교적 승리는 일시적인 것일 가능성이 크다. 최근 15년간 북-미 관계는 롤러코스터를 연상케 할 만큼 극적으로 오르내렸다. 북핵 위기가 미봉(彌縫)되더라도 HEU라는 뇌관은 결코 제거되지 않는다. 북-미 관계는 앞으로도 여러 번 출렁거리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주간동아 2007.03.20 577호 (p32~34)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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