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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역사, 알고 보면 ‘13년’ 길어요!

1620년 메이플라워호 도착보다 1607년 ‘제임스타운’ 건설이 먼저

  • 전원경 작가 winnejeon@hotmail.com

미국 역사, 알고 보면 ‘13년’ 길어요!

미국 역사, 알고 보면 ‘13년’ 길어요!

1492년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와 인디언들(왼쪽). 영국인이 신대륙에 설립한 최초의 식민지 ‘제임스타운’은 현재의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 자리했다.

역사책에 실린 미국의 역사는 1620년 메이플라워호가 플리머스항에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102명의 청교도들은 청교도에 대한 영국의 박해를 피해 탄압이 없는 신천지, 미국을 향해 떠났다. 그들은 갖은 고생 끝에 영국령 식민지를 건설했고, 그 결과 미국은 영국의 영토가 되었다가 1776년 독립전쟁 끝에 새로운 국가로 탄생한다.

그러나 이 같은 역사 서술 뒤에는 숨겨진 사실들이 있다. 최근 ‘유에스 뉴스 앤 월드 리포트’의 보도에 따르면 ‘최초의 영국 식민지’가 미국에 건설된 것은 메이플라워의 도착보다 13년이나 앞선 1607년이다. 그러나 버지니아주에 건설된 최초의 식민지 ‘제임스타운’은 갖가지 풍파 끝에 신대륙에 뿌리 내리지 못한 채 사라졌다. 인디언 처녀 포카혼타스가 영국인 존 롤프를 만나 결혼한 곳이 바로 이 제임스타운이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래 유럽인들에게 바다 건너 신천지는 ‘꿈의 땅’이었다. 신대륙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었고 ‘해변가에 다이아몬드가 굴러다니고 금으로 냄비를 만든다더라’는 식의 환상만이 무성했다.

반면 유럽의 최강국이었던 영국은 1500년대 들어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하는 바람에 실직자가 많아지는 불황을 겪고 있었다. 자연히 스페인 제독이 발견한 신대륙에 식민지를 개척하자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당시 런던에서 한창 인기를 끌던 ‘서쪽으로!’라는 연극도 사람들을 부추겼다. 이미 스페인은 플로리다, 노스캐롤라이나 등에 식민지를 건설한 상태였다.

1622년 인디언 공격으로 마을 포기하고 철수



1606년 크리스마스, 부푼 꿈을 안은 영국인 105명이 갓스피드, 수잔 콘스턴트, 디스커버리, 이 세 척의 배를 나눠 타고 런던항을 떠났다. 이들은 식민지의 옥수수, 올리브유, 포도주, 원목 등을 본국으로 수출해 그 이익을 나눠 갖자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출항 전 한 사람당 3000달러어치의 ‘신대륙 주식회사’ 스톡옵션까지 배분해놓은 상태였다.

미국 역사, 알고 보면 ‘13년’ 길어요!

신대륙 아메리카로 건너온 유럽 이민자들.

1607년 4월27일, 넉 달간의 항해 끝에 세 척의 배는 현재의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 도착했다. 정착자들은 영국왕 제임스 1세의 이름을 딴 ‘제임스타운’을 건설하고 선거로 시장을 선출했다. 정착지에는 교회, 우체국, 창고 등이 들어섰다. 정착민들은 신대륙에 영국의 법률과 가치관이 똑같이 적용되는 ‘새로운 영국’을 건설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105명의 정착민은 대부분 노동 경험이 없는 신사들이었다. 13년 후 메이플라워호를 타게 되는 청교도들과는 ‘출신성분’부터 달랐다. 이들은 집을 지을 줄도, 사냥을 할 줄도 몰랐다. 더구나 이들이 건설한 정착지가 낮은 지대에 자리해 있다는 것은 심각한 위협이었다. 여름이 되자 모기가 들끓었고 각종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다. 영국에서 실어온 식량도 항해 도중 대부분 상해버렸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착민들은 농지를 개간하기보다 해안가와 숲으로 금광을 찾아 나섰다. 이름 모를 열병, 종기, 굶주림 등이 연이어 이들을 덮쳤다. 1607년 9월, 신대륙에 도착한 지 반년이 흘러 당시 살아남은 사람은 105명의 정착민 중 절반이 채 되지 않았다.

전염병보다 더 큰 위협은 인디언의 존재였다. 제임스타운 정착민들이 초기에 세운 규율에는 ‘본국에 부정적인 내용의 편지를 보내지 말라’와 함께 ‘인디언과 싸우지 말라’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 초기에는 인디언과 제임스타운이 수확한 옥수수를 나누며 평화롭게 공존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인디언에 대해 너무도 무지했다. 정착민들은 인디언에게 영국 신사의 에티켓과 영어를 가르치려 했지만, 인디언들에게 이들은 자신들의 땅을 뺏으려는 침략자일 뿐이었다. 인디언들은 제임스타운 근처에 매복해 있다가 정착민들을 활로 습격하고 포로를 잡아다 손발을 잘랐다.

1610년, 제임스타운에 심각한 기근이 밀어닥쳤다. 이즈음 500여 명으로 늘어나 있던 정착민은 말과 개, 쥐는 물론 가족의 시체까지 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기근을 겪고 난 뒤, 500여 명의 정착민은 60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설상가상으로 다시 인디언의 공격이 거세지면서 제임스타운은 완전히 멸절 위기에 이르렀다.

설립 400주년 기념 대대적 축제 예정

위기에 빠진 제임스타운을 살려낸 것은 담배였다. 수차례 시도 끝에 담배 재배가 성공하면서 1614년에는 담뱃잎을 영국에 수출하게 되었다. 인디언 추장 포하탄의 딸 포카혼타스가 영국인 담배업자 존 롤프와 결혼하는 바람에 인디언과도 잠정적인 평화협정이 이루어졌다.

수많은 위기를 겪으며 제임스타운은 살아남는 듯싶었다. 하지만 1618년, 포하탄이 죽고 포카혼타스가 영국으로 떠나면서 평화협정은 깨졌다. 1622년 3월, 인디언은 제임스타운에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무려 347명의 정착민이 학살당한 뒤 제임스 1세는 제임스타운을 포기하고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로써 제임스타운은 큰 희생만 남긴 채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1620년 플리머스항에 도착한 메이플라워호의 정착민들 역시 갖가지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결국 살아남았다. 왜 메이플라워호는 성공하고 제임스타운은 실패했을까? 가장 큰 이유는 제임스타운 정착민들이 낯선 식민지에서 영국의 관습을 고집했다는 데 있다. 반면 메이플라워호의 정착민들은 영국의 법률 중 자신들에게 유리한 조항만 취했다. 예를 들어 영국의 상속법은 장자가 모든 유산을 물려받도록 하고 있으나, 메이플라워호의 정착민들은 이 법을 무시하고 자손에게 유산을 골고루 나눠주었다. 메이플라워호 승선자들에 비해 식자층이 많았던 제임스타운 정착민들은 역설적으로 이런 융통성을 발휘하지 못했다. 제임스타운 초기 정착민의 한 사람이었던 존 스미스의 기록에 따르면 정착민들은 “삽과 곡괭이를 들고 마을을 건설할 엄두는 내지 않고 오직 불만과 저주, 절망만을 토로했다.”

제임스타운이 사라진 직후인 1624년, 네덜란드인들이 현재의 맨해튼 근처에 상륙했다. 네덜란드인들은 제임스타운의 영국인들처럼 인디언을 교육하려 하지 않고 돈을 주어 이들의 땅을 사들였다. 동시에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들여와 새로운 땅의 개간을 맡겼다. 뉴욕의 맨 처음 이름은 이 네덜란드인들이 붙인 ‘뉴암스테르담’이었다. 뒤이어 1627년 퀘벡에 프랑스인들이 진출해 프랑스 식민지를 건설했다. 이들의 성공 뒤에 제임스타운이 준 실패의 교훈이 있었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초기 정착민들의 피땀이 서려 있는 제임스타운은 올해로 설립 400주년을 맞는다. 올 봄, 리치먼드에서는 400주년을 기념하는 대대적인 축제가 열린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도 이곳을 방문할 예정이라고 한다.



주간동아 576호 (p56~57)

전원경 작가 winnejeo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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