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71

2007.01.30

참을 수 없었던 ‘의원들 횡포’

앞에선 신당 참여, 돌아서면 딴소리 … 현실 정치 벽에 고건 결국 침몰

  • 양정대 한국일보 정치부 기자 torch@hk.co.kr

    입력2007-01-24 10: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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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을 수 없었던 ‘의원들 횡포’
    범여권의 유력한 대선주자였던 고건 전 총리가 낙마한 뒤 그의 주변에서 현역 국회의원들을 향해 배신감을 토로하는 얘기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의 전격적인 불출마 선언을 두고 숱한 이유들이 거론되지만, ‘중도세력 대통합’이라는 고 전 총리의 이상론이 18대 총선에 목을 맬 수밖에 없는 금배지들의 현실론이라는 벽을 넘지 못했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갖는다.

    고 전 총리 캠프에서 공보팀을 이끌었던 민영삼 팀장은 “고 전 총리는 최근에도 일부 여당 의원들의 탈당설이 나올 무렵 ‘그 사람들(여당 의원들)은 자꾸 나를 이용하려고만 든다’고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친(親)고건파 의원들이 고 전 총리의 면전에서는 금방이라도 제3지대 신당에 참여할 것처럼 얘기해 놓고는 돌아서서 전혀 다른 소리를 하는 이중성을 보였다는 의미다.

    내년 총선 보장 애프터서비스 요구

    고 전 총리와 고락을 같이해온 김덕봉 전 총리실 공보수석도 “의원들이 국민통합 신당이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우면서 속으론 자기 잇속을 챙기려 했다”고 쓴소리를 했다. 그는 “의원들이 고 전 총리에게 ‘대선에서 안 될 경우 내년 총선에서 어떤 역할을 해줄 수 있느냐’며 애프터서비스를 요구했다”면서 “그러나 총선에서 어떻게 해주겠다고 약속하거나 이를 미끼로 설득할 수는 없는 일 아니냐”고 밝혔다. 실제로 고 전 총리 측에선 상당수 의원들이 내년 18대 총선뿐 아니라 19대 총선까지 정치적 책임을 져달라는 무리한 요구를 했고, 일부는 직간접적으로 공천 보장을 요구했다는 말이 나왔다.



    정치권 주변 인사들도 “고 전 총리가 의원들의 말바꿈에 큰 실망을 느끼고 배신감도 상당했을 것”(‘우민회’ 강성환 대표), “국민통합 신당에 동참키로 한 현역 의원들의 기회주의적인 태도에 대해 고 전 총리는 ‘이건 아니다’라는 얘기를 여러 차례 했다”(‘희망연대’ 고재방 사무국장)고 전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측근은 “고 전 총리의 지지율이 높을 땐 50~60명씩 달려들더니 지지율이 떨어지자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면서 “금배지들의 염량세태(炎凉世態)에 염증이 났을 것”이라고 했다.

    이 같은 고 전 총리 측의 반응은 거꾸로 고 전 총리의 중도신당 구상이 일관된 전략 속에서 추진되지 못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참을 수 없었던 ‘의원들 횡포’

    1월16일 고 전 총리 지지자들이 김덕봉 전 국무총리 공보수석비서관에게 항의하고 있다.

    고 전 총리의 애초 구상은 ‘제3지대 원탁회의’를 통해 통합신당을 창당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친고건파 의원들은 “참여 의원들이 여야를 통틀어 100명은 될 것”(민주당 신중식 의원)이라는 얘기까지 했다. 보기에 따라선 허장성세(虛張聲勢)였던 셈이다.

    원탁회의 구상이 신당 창당 쪽으로 변경된 이후에도 고 전 총리 측의 혼선은 계속됐다. 열린우리당 내의 대표적인 친고건파 안영근 의원은 지난해 12월 중순께 “조만간 중도신당의 실체가 드러날 것이고, 참여 의원들의 면면도 드러날 것”이라며 “깜짝 놀랄 만한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하지만 고 전 총리의 신당 구상은 열린우리당 김성곤 의원의 ‘중도포럼’ 구상이 현역 의원들의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해프닝으로 끝난 뒤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다.

    아무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아

    신당 창당의 흐름이 가시적으로 나타나지 못하던 차에 이번엔 “열린우리당과 민주당 내 친고건파 의원들이 탈당하지 않고 제3의 교섭단체를 구성하는 것도 적극 고려 중”(민주당 신중식 의원)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정치 도의상 실현 불가능한 이런 구상은 여의도에서 가십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고 전 총리의 지론은 범여권의 통합신당을 열린우리당이나 민주당의 틀이 아닌 제3의 영역에서 만들자는 것이었다. 자신의 영향력 아래로 오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특정 당이 주도해서도 안 된다는 주장이다. 물론 여기에는 범여권으로 묶이는 것 자체에 대한 부담감도 있었음직하다.

    하지만 이 같은 구상에 대해 열린우리당 정동영 전 의장의 한 측근 의원은 “정치 현실을 너무 모르는 소리”라고 지적했다. 그는 “대선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지는 신당이라면 당연히 후보를 중심으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면서 “열린우리당이 엄연히 존재하고 지지율은 낮지만 정동영, 김근태라는 후보가 있는데 아무 조건 없는 ‘제3지대’가 가능하겠느냐”고 했다. 김근태계의 한 의원도 “고 전 총리에게 정말로 직언을 하는 참모가 없다는 얘기이고, 친고건파 의원들이 시류에 편승해왔다는 증거”라고 지적했다.

    익명을 요구한 열린우리당의 한 충청권 의원은 “고 전 총리가 신당을 만들면 거기에 갈 생각이 있었지만 앞장설 생각은 없었다”면서 “현역 의원들은 18대 총선을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고 전 총리가 이에 대한 확신을 주지 않는데 누가 목숨을 걸겠냐”고 했다. 실제로 고 전 총리 캠프에선 열린우리당 내 선도탈당 움직임에 상당한 기대를 걸었고, 노무현 대통령과의 갈등 상황에서도 보호막이 되어줄 의원들을 기대했다고 한다. 한 측근은 “올해 들어 지지율이 떨어지자 혹시나 했는데, 적극 나서는 사람들이 역시 아무도 없더라”면서 “정치가 이런 거구나 싶은 생각이 절실하게 들었다”고 말했다.

    고재방 희망연대 사무국장은 “고 전 총리에게 소통합 신당이라도 하자고 했더니 ‘내 역할은 여기까지다’라며 거절했다”고 말했다. 중도통합 신당이라는 자신의 이상(理想)이 의원들의 이해관계라는 현실(現實)의 벽에 부딪혔을 때 그는 차라리 꿈을 접는 길을 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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