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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오류투성이 난중일기 번역 바로 잡았다

100여곳 정정, 8500여자 새로 번역한 완역본 ‘화제’ … ‘이순신 은둔설’ 허구 입증할 자료도 실려

  • 노승석/ 초서 연구가 nssks@hanmail.net

오류투성이 난중일기 번역 바로 잡았다

오류투성이 난중일기 번역 바로   잡았다

① 이순신 장군의 수결(手決). ② 이회가 아버지 충무공의 장례에 조문객으로 왔던 현건에게 보낸 편지. 아버지의 전사 내용을 담고 있어 ‘이순신 은둔설’이 허구임을 알려준다. ③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 (李忠武公亂中日記附書簡帖壬辰狀草).

오류투성이 난중일기 번역 바로   잡았다
난중일기’는 국보 제76호로 문화재명은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李忠武公亂中日記附書簡帖壬辰狀草)다. ‘난중일기’ 전편은 어려운 초서로 돼 있고 글자가 잘려나가거나 마멸된 상태로 남은 것들이 상당수 있는데, 특히 임진년과 정유년 일기에서 많이 보인다. 그때가 전시(戰時)여서 급하게 적다 보니 그런 것이다. ‘난중일기’는 전부 7책이고 부록인 ‘서간첩’과 ‘임진장초’를 포함해 총 9책으로 되어 있으며, 글자 수는 총 13만여 자이다.

난중일기는 정조 19년(1795) 왕명으로 교서관에서 간행한 ‘충무공전서’에 실렸는데, 이서(移書) 과정에서 글의 내용이 많이 누락되고 수정돼 친필본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 후 1935년 조선사편수회에서 처음으로 필사본을 탈초(초서를 정자화)하여 간행했는데, 이것이 후대의 전범이 되었다.

그동안 東面을 東西로 잘못 해독

1960년 노산 이은상 씨가 이를 근거로 하여 처음 번역 간행했고 그 뒤로 무수히 많은 번역서가 간행됐지만, 초서로 쓰인 필사본에 대해서는 재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한 이유로 판독되지 못한 글자들, 예를 들어 썼다가 지운 글자, 희미한 글자, 해독 불가능한 글자(떨어져나간 글자는 예외)들이 미상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 이러한 글자들을 포함해 총 13만여 자를 완전히 해독하였다.

초서란 빠르게 흘려 쓴 필기체인지라 해독이 어렵다. 보통의 서체와 달리 오랜 세월 동안 눈에 익히고 따로 공부해야 터득할 수 있는데, 필자는 어린 시절 부친이 초서로 남긴 유묵(遺墨)들을 많이 접하고 습작했기 때문에 초서 해독 능력을 갖출 수 있었다.



초서로 쓰인 것만으로도 해독하기 어려운 데, 마멸되거나 희미하게 된 상태라면 더더욱 힘들 수밖에 없다. 또한 서로 다른 글자가 초서체에서는 같은 자형(字形)으로 쓰이는 경우가 있는데, 이 점은 초서 해독에 가장 큰 난제이기도 하다.

난중일기 정유년(1597) 4월24일자 기록에 나오는 면(面) 자와 서(西) 자가 그러한 예에 속한다. 그날의 일기에는 “곧바로 십 리 밖의 동면(東面) 이희경의 종 집에 이르렀다(直到十里外東面李喜慶奴家)”는 글귀가 있다. 여기서 동면(東面)은 필사본을 분석해 새로 판독해낸 것인데, ‘난중일기초’에서는 이 부분이 ‘동서(東西)’로 돼 있다.

오류투성이 난중일기 번역 바로   잡았다

이순신 장군의 영정.

이로 인해 기존 연구자들은 모두 ‘동서(東西)’를 ‘이리저리 헤매다’를 뜻하는 부사어로 해석했었다. 동면(東面)은 방면(方面)의 하나로 동쪽, 동계(東界)를 뜻한다. 그러므로 ‘십 리 밖의 동쪽’이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전후 문맥에 맞다. 그렇게 해야 ‘십 리 밖(十里外)+방향사(東面)+인명(건물)’의 문법구조가 일반적인 한문식 문장체계에 잘 들어맞게 된다.

또 다른 예로 수(水) 자와 소(小) 자 경우를 들 수 있다.

계사년(1593) 5월10일자의 내용 중 “늦게 수정악(水頂岳) 위로 올라가 앉다(晩上坐水頂)”라는 글이 있다. 이를 기존 번역서는 ‘수정(水頂)’을 ‘작은 산봉우리’, 또는 ‘좌소정(坐小頂)’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는 ‘난중일기초’의 판독이 ‘만상좌소정(晩上坐小頂)’으로 되어 있어 생긴 현상이다. 수(水) 자를 소(小) 자로 잘못 판독한 것을 그대로 따른 데서 생긴 잘못이다.

여기서 수정(水頂)은 수정악(水頂岳)의 준말로, 제주도 남제주군 대정현(大靜縣)에 있는 산마루 이름이다. 이는 대정현 읍지 산천조(山川條)에서 확인되는데, “수정악은 현의 서쪽 30리 지점에 있는데, 그 꼭대기에 있는 큰 연못은 깊어서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水頂岳 在縣西三十里 其有大池深無底)”라고 적고 있다.

문헌 고증 통해 현건 등 역사적 새 인물 밝혀내

정유년 6월1일자에도 같은 오류가 발견된다. ‘진수임(眞水荏)’이란 말이 그 예이다. 이것도 필사본에 의해 새로 판독된 것인데 ‘난중일기초’에는 ‘진소임(眞小荏)’으로 돼 있다. ‘수정악(水頂岳)’과 마찬가지로 수(水) 자를 소(小) 자로 잘못 판독한 결과다.

진수임(眞水荏)은 진임(眞荏)과 수임(水荏)을 합한 말로 진임(眞荏)은 참깨이고, 수임(水荏)은 들깨를 말한다. 조선 숙종 때 실학자 홍만선(洪萬選, 1664~1715)이 지은 ‘산림경제(山林經濟)’ 1권 치농편(治農篇)에서 그 전거를 확인할 수 있는데, “들깨는 수임(水荏) 또는 유마(油麻)라고 한다”라고 돼 있다.



이번에 출간한 난중일기 완역본은 엄밀한 고증을 통해 이 같은 오류 100여 군데를 바로잡고 8500여 자를 새로 번역했다. 이 책에는 항간에 떠도는 이순신 장군의 은둔설(이순신이 전사하지 않고 살아서 은둔하였다는 설)을 반박할 만한 근거 자료로 새로 발견된 충무공의 맏아들 이회(李)의 편지가 실려 있다.

이회는 편지에서 충무공이 전사한 다음인 1598년 12월 13일, 조문객으로 왔던 감역(監役) 현건(玄健, 1572~ 1656)에게 ‘글을 지어 제문과 제물을 보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들이 아버지의 전사를 기록했는데 이것이 거짓일 수는 없다. 이순신의 은둔설은 허구로 확인된 것이다.



주간동아 2005.12.06 513호 (p62~63)

노승석/ 초서 연구가 nssk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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