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98

2005.08.16

차 한 잔에 도학사상 녹여낸 茶父

  • 정찬주/ 소설가

    입력2005-08-12 13: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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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 한 잔에 도학사상 녹여낸 茶父
    다인들은 한재(寒齋) 이목(李穆)을 차의 아버지(茶父) 혹은 다선(茶仙)이라고 부른다. 그가 남긴 ‘다부(茶賦)’는 1321자의 짧은 차 노래지만 이목의 선비사상과 도학정신, 차에 대한 안목의 깊이를 헤아려보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글이다.

    김종직 문하에서 도학을 공부한 이목이 차 살림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것은 24세에 중국 연경을 다녀온 뒤부터였다. 특히 이목은 중국 다성(茶聖) 육우의 ‘다경(茶經)’과 마단림의 ‘문헌통고(文獻通考)’ 등을 구해 보고는 중국차 산지와 유적지를 돌아보며 차 맛에 매료됐던 것으로 추측된다. 차에 관한 논문 같은 ‘다부’를 보면 차와의 인연을 얘기한 서문에 이어 본론에는 중국차 품종과 산지 및 풍광, 차 달이기(煎茶)와 마시기(七修), 그리고 차의 공과 덕에 대해, 결말에는 차를 예찬함과 동시에 ‘내 마음의 차’라며 다심일여(茶心一如)로 승화시키고 있다.

    이목의 성품은 강직함 그 자체였다. 성종 때 정승 윤필상의 작태를 보다 못한 이목이 ‘윤필상을 삶아야 비가 내릴 것이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어느 날 길에서 우연히 만난 윤필상이 “네가 정말 나의 늙은 고기 먹기를 원하느냐”고 힐난하자 이목은 대꾸도 않고 지나쳐버렸다고 한다. 이러한 악연으로 이목은 윤필상의 참소(讒訴)를 받아 28세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고 만다.

    ‘茶賦’에서 내 마음의 차 노래

    이목은 14세에 김종직 문하에 들어가 공부했고 19세 때 진사에 합격한 뒤 성균관 학생이 되어 유생들과 어울렸으며, 24세 때 연경에 가 육우의 ‘다경’을 읽고는 차와 인연을 맺는다. 귀국 후 25세 때 문과에 장원급제, 문명을 떨치기도 하지만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르던 윤필상을 탄핵하려다가 오히려 공주로 유배를 간다. 윤필상이 대비의 뜻을 받들어 성종에게 숭불(崇佛)을 권유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 이목은 왕 앞에 나아가 윤필상에게 벌주기를 청했다. 하지만 성종은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이목에게 “네가 감히 정승을 간귀(奸鬼)라 하느냐”고 역정을 냈다. 그러나 이목은 “필상의 소행이 저러한데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니 귀신임이 분명합니다”고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 이목은 연산군 1년 증광문과에 장원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전적(典籍)과 종학사회(宗學司誨), 영안도평사 등을 역임하다 연산군 4년 무오사화 때 윤필상의 모함으로 사형에 처해진다. 또한 임금의 생모 폐비 윤씨 복위 문제로 일어난 연산군 10년의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剖棺斬屍)되는 비극을 맞지만, 훗날 신원(伸寃)되어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된다.

    나그네가 다인으로서 이목을 주목하는 까닭은 고상하고 의미심장한 ‘다부’의 마지막 문장 때문이다. ‘다신(茶神)이 기운을 움직여 묘경(妙境)에 이르면 저절로 무한히 즐거우리. 이 또한 내 마음의 차이거늘 굳이 밖에서 구하겠는가(神動氣而入妙 樂不圖而自至 是亦吾心之茶 又何必求乎彼也).’

    이목이 ‘차의 아버지’이자 ‘차의 신선’으로 불리는 까닭은 ‘다부’를 화룡점정 하는 이 한 구절 때문이다. 이목에게 차 한 잔은 단순한 기호식품이나 약이 아니라, ‘내 마음의 차(吾心之茶)’라는 마음과 차가 둘이 아닌 하나로 승화되는 다인이 지향해야 할 구경(究竟)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그네도 도학사상을 차 한 잔에 녹여낸 이목을 진정한 다인으로 부르고 싶어지는 것이다.

    ▶ 가는 길호남고속도로에서 유성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동학사 입구를 지나 반포면 면소재지에 이르면, 농협 건물 뒤편에 있는 이목을 배향한 충현서원이 보인다.



    茶人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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