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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봉이 만난 영화, 영화인|임권택 감독

세계가 인정한 ‘한국 영화의 뿌리’

세계가 인정한 ‘한국 영화의 뿌리’

세계가 인정한 ‘한국 영화의 뿌리’
2004년 베니스국제영화제 시상식장. 본선 경쟁작에는 김기덕 감독의 ‘빈집’과 임권택 감독의 ‘하류인생’이 들어 있었다. 사회자가 감독상을 발표하자, 모자를 쓴 김 감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단상에 오르지 않고 좌석 사이를 걸어 머리가 하얀 사람 앞에 서서 모자를 벗고 인사를 했다. 그 남자도 일어나서 김 감독의 손을 맞잡았다. 무대에 오른 김 감독은 “제가 방금 인사를 드린 분은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임권택 감독님이십니다”라고 말했다. 이단아 김기덕 감독이 한국 영화 주류의 대표격인 임 감독에게 인사를 하고 상을 받는 이 모습은 여러 가지 면에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민주투사로 변신하기 이전의 서정시인 고은이 서정주 시인을 표현한 문장을 빌려 말하자면, ‘임권택은 하나의 정부’다. 임권택이라는 이름이 형성하는 아우라는 어떤 의미에서든 한국 영화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 영화가 지금처럼 성장하는 데는 감독을 중심으로 영화 제작이 이루어진 것이 가장 큰 구실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영화가 감독의 예술이라고 믿는 뚝심 있는 감독들이 한국 영화를 이끌어왔기 때문이다. 할리우드의 영향권 아래서 성장했으면서도 제작자나 프로듀서들이 영화의 흐름을 좌우하는 것과는 다른 현상이다.

소도구 조수 등 궂은일부터 시작 … 43년간 99편 만들어

‘하류인생’은 임 감독의 99번째 영화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임 감독의 영화를 한 편 넘게는 봤을 것이다. 대중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서편제’를 비롯해 한국 영화 중에서 최초로 칸영화제 본선 경쟁부문에 진출한 ‘츈향뎐’이나 칸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취화선’, 혹은 그 이전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20대 초반의 여배우 강수연을 월드 스타로 만들어놓은 ‘씨받이’, 몬트리올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은 신혜수 주연의 ‘아다다’ 등 임 감독의 영화는 무수히 많다. 또 김두한의 일대기를 그린 ‘장군의 아들’이라든가, 불가의 이야기를 그린 ‘아제 아제 바라아제’ 혹은 6·25전쟁 한복판에서 이념의 갈등으로 소용돌이치는 남도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 ‘태백산맥’, 한국적 죽음의 미학을 다룬 ‘축제’ 등 셀 수 없이 많은 작품 목록을 우리는 꼽을 수 있다.

1936년생인 임 감독은 올해 우리 나이로 일흔. 그러나 99편의 영화를 만든 감독으로서는 매우 젊은 편이다. 그가 1962년에 데뷔했으니 지금까지 43년 동안 감독 생활을 해온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99편의 작품 목록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면 1년에 4, 5편을 만들어야 했던 60년대 한국 영화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계가 인정한 ‘한국 영화의 뿌리’
예를 들어 1971년 한 해 동안 임 감독이 만든 영화 목록들을 보면 ‘명동 삼국지’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내린다’ ‘둘째어머니’ 등 모두 7편에 달한다. 임 감독 스스로, 데뷔 이후 10년 동안 만든 50여편의 쓰레기 같은 영화들을 잊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미래의 거장을 예견하게 하는 영화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1972년작 ‘명동잔혹사’ 같은 작품은 액션 연출 속에서도 인간의 이해에 대한 깊이 있는 표현이 담겨 있다. 임 감독의 뛰어난 점은 제작자들의 주문생산 아래서 마구 영화를 찍으면서도 자신만의 독자적 시선을 느낄 수 있는 강렬한 작품을 만들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는 것이다.

충무로의 전통적인 도제 시스템 아래서 소도구 조수, 조명 조수를 거쳐 연출부 조수를 하다가 영화감독이 된 임 감독은, 70년대에 ‘족보’ ‘짝코’ ‘잡초’ 등을 만들면서 작가주의 감독으로 떠오른다. 그가 결정적으로 예전의 액션 세계와 결별하게 된 작품은 1982년작 ‘만다라’다. 파계승을 통해 치열한 구도자의 삶을 보여주면서 인생의 본질에 대해 질문하는 이 영화는 깊이 있는 주제의식과 뛰어난 영상미, 그리고 이야기를 끌어가는 장인적 호흡 등 새로운 영화문법으로 관객들을 매료시켰다.

세계가 인정한 ‘한국 영화의 뿌리’
‘만다라’ 이후 임 감독은 국제 영화제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다. 그를 가장 먼저 알아본 곳은 베를린영화제였다. 임 감독이 만든 총 7편의 영화가 베를린영화제에 진출했다. 그러나 정작 그에게 감독상을 준 곳은 칸영화제였다.

임 감독은 2월20일 끝난 제55회 베를린영화제에서 명예 황금곰상을 수상했다. 2월12일 베를린 중심가에 있는 쿠담거리 필름 팔라스트 극장에서 거행된 시상식에서 청색 두루마기 차림으로 단상에 오른 임 감독은 상을 받은 뒤 “짧지 않은 내 영화 인생에 최고의 명예이자 행복이다. 또 한국 영화계에 최고의 선물이 됐다”라고 말했다.

임 감독과 베를린영화제의 인연은 2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2년 김성동의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 ‘만다라’가 처음 베를린영화제에 출품되었다. 그 후 사회적 시선이 강한 베를린영화제를 의식하며 임 감독은 ‘길소뜸’ ‘서편제’ ‘태백산맥’ 등의 영화를 계속 출품했지만 영화제로부터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했다. 본선 경쟁작에 선정된 것 자체가 커다란 영광이었지만 수상과 인연이 없어 솔직히 화도 났다고 말했다. 그런데 올해 베를린영화제에서 특별상인 명예황금곰상을 수여한다는 연락이 왔다. 지금까지 이 상을 수상한 사람은 알랭 들롱, 잔 모로, 더스틴 호프만, 소피아 로렌, 올리버 스톤, 커크 더글러스 등 18명에 불과하다. 더구나 아시아인으로는 임 감독이 처음이다.

국제 영화제서 잇단 수상 … 100번째 영화에 해외 언론도 관심

독일 ‘dpa 통신’은 ‘한국 영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임권택 감독이 박수갈채 속에 명예황금곰상을 수상했다’고 보도했다. ‘슈피겔’지는 ‘임권택 감독은 한국 영화의 대부’라고 표현했다. 디터 코실릭 베를린영화제 조직위원장은 “오랜 세월에 걸친 작품 활동을 통해 한국과 아시아, 나아가 세계 영화에 크게 기여한 공로를 높이 평가한다”고 말하고 “임권택 감독은, 작품의 수는 물론 소재와 주제의 다양성 차원에서 아시아 영화사의 독보적 존재다. 뚜렷한 시각적 아름다움과 영화적 테크닉의 혁신, 그리고 지적인 감성으로 지난 40년 동안 99편의 영화를 만든 임 감독에게 이 상을 바친다”라고 말했다. 또 “임 감독은 한국 영화의 뿌리다. 그가 아니면 누가 이 상을 받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울리히 그레고어 큐레이터는 “세계에서 보편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한국 영화가 낳은 최고의 감독”이라고 임 감독을 높이 평가했다. 또 “일제 식민지, 분단, 과거와 현재가 상호관계를 이루는 임 감독의 작품세계는 심층적이고 다양한 측면의 모자이크를 형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베를린영화제 측의 높은 평가와 찬사에 대해 임 감독은 “한국인이 아니면 찍을 수 없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소신으로 긴 세월 노력한 것이 평가를 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이야기들을 종합해보면, 임 감독의 영화에는 한국인의 집단적·원형적 상처를 건드리는 무엇이 있다는 말이고, 세계 영화계는 그것을 인정했다는 뜻이다. 임 감독 본인은 “내가 상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한국 영화가 상을 받은 것이다. 최근 세계 영화계에 떠오른 한국 영화의 힘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영광이 가능했고, 난 다만 한국 영화를 대표해서 상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세계가 인정한 ‘한국 영화의 뿌리’
세계 최고의 영화평론지 중 하나인 ‘카이에 뒤 시네마’의 편집장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 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 물론 그의 영화를 다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영화는 대개 한 국가의 역사를 짊어지고, 역사와 영화가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영화가 역사에 어떻게 참여할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영화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임 감독이 99편 모두 걸작이 아니라고 겸손하게 말한 것처럼, 나 역시 내가 본 영화들 모두가 걸작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역사적인 사건을 재현하면서도 인간 사이의 관계, 종교에 대한 물음, 가족에 대한 성찰 등 한국적인 것들을 다루는 그의 영화는 국가와 민족과 영화와 문명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계기가 되어 내게는 소중하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마치 존 포드가 그의 영화에서 미국을 다루고, 르누아르가 그의 영화에서 프랑스를 다룬 것처럼, 임권택 감독은 그만큼의 무게로 자신의 영화에서 한국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자, 이제 우리가 정말 궁금해하는 것은 임 감독의 다음 영화다. 그것은 단순히 임 감독의 ‘다음’ 영화가 아니라, ‘100번째 영화’인 것이다. 한국 영화에도 세계 영화에도, 한 감독이 100번째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기념비적인 사건임이 분명하다. 베를린에서 세계 각국의 영화기자들이 가장 많이 질문한 것도 임 감독의 100번째 영화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는 그 영화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하다. 여전히 시나리오 수정 단계에 있다고 밝힌 100번째 프로젝트는 5월 초쯤 구체적인 윤곽이 발표될 예정이다. 임 감독은 다만 이렇게 힌트를 주었을 뿐이다.

“80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진솔한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주간동아 2005.03.01 474호 (p6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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