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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 우리풍수 | 이순신 장군 묘

16년 만의 이장, 무슨 사연 있을까

  • 김두규/ 우석대 교수 dgkim@core.woosuk.ac.kr

16년 만의 이장, 무슨 사연 있을까

16년 만의 이장, 무슨 사연 있을까

사후 16년 뒤에 옮겨진 현재의 이순신 장군 묘.

최근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소재로 한 책과 TV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그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일고 있다. 그의 죽음에 관해서도 일부러 왜군의 총에 맞았다는 ‘의도적 자살설’이나 전쟁이 끝난 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은둔생활을 했다는 ‘은둔설’ 등이 떠돌고 있다.

이런 설이 나도는 배경은 당시 선조 임금의 처지에서는 전쟁 영웅으로 떠오른 그에게 민심이 쏠리지 않을까 하여 극히 경계했을 것이고, 조정 대신들 또한 무장(武將)이 실세로 등장하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왜구의 침입에 시달리던 고려 왕조가 무장 이성계에게 왕위를 빼앗기는 것과 같은 상황이 재현될 수 있음을 선조 임금은 충분히 예측했고, 충무공 역시 당시 임금이나 조정 대신들의 속마음을 꿰뚫고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선조는 충무공의 업적을 애써 무시하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지금 왜적을 평정한 것은 모두 명나라 군대 덕분이다. 우리 장사들은 명나라 군대의 뒤를 쫓아다니다가 요행히 패잔병의 머리를 얻었을 뿐, 일찍이 적장 머리 하나 베거나 적진 하나 함락시킨 적이 없었다. 그 가운데 이순신과 원균 두 장수의 해상 승리와 권율의 행주대첩이 다소 빛날 뿐이다.”

몰락 위기에 처한 조선을 구한 사람은 성웅 이순신이 아니라 원균과 권율 등 다른 장군들이고, 이순신은 단지 그들과 함께 ‘전쟁에 조금 기여했을 뿐’이라고 깎아내리고 있다.



그런데 풍수와 관련, 왕실과 충무공 사이에 뭔가 사연이 있는 듯하다. 당시 선조 임금은 “우리나라엔 본래 술사가 없는데 어찌 지맥에 능통한 지관이 있겠느냐”며 조선의 풍수를 무시한 반면, 명나라 군대를 따라 입국한 중국인 풍수들을 상대적으로 우대했다.

흥미로운 것은 충무공 역시 중국인 풍수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점이다. “원래 천문에 관심이 있었던 만큼 지리에도 관심이 많았을 것”이라고 충무공의 15대 직계 후손 이재엽씨는 말한다.

충무공이 교유관계를 맺은 중국인 풍수가는 두사충(杜師忠 주간동아 382호에 소개)이었다. 임진왜란 직후부터 충무공이 전사할 때까지 오랜 기간 교유했는데, 충무공이 두사충에게 준 ‘두복야(‘복야’는 관직명)에게 드리는 시(奉呈杜僕射)’가 지금도 전해진다. 물론 충무공과 두사충의 만남이 왜군에 대한 공동전선을 펼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풍수가 일차적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둘 사이에 풍수가 자주 화젯거리가 되었다. 그것은 충무공이 죽었을 때 두사충이 직접 아산에까지 와서 무덤 자리(충남 아산시 음봉면 산정마을 뒤)를 잡아준 사실에서 드러난다.

16년 만의 이장, 무슨 사연 있을까

이순신 장군이 처음 묻힌 자리(훗날 그의 손자가 다시 이곳에 묻혔다.)

이후 충무공 후손들은 이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았는데, 7대손 이인수(삼도통제사 역임)가 두사충을 위한 신도비문을 쓰기도 했다. 신도비문에서 그는 ‘충무공의 묘지 소점’에 대한 고마움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한 충무공의 무덤은 그로부터 16년 뒤 그곳에서 약 1km 떨어진 현재의 자리로 옮겨진다.

당대 최고 풍수이자 오랜 친구가 잡아준 자리를 버리고 굳이 이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자리가 나빠서였을까? 만약 그랬다면 훗날 충무공의 손자가 다시 그 자리에 묻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역화되기 이전의 현충사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재엽씨는 어른들에게서 충무공에 대한 이야기를 누구보다도 많이 들어왔다. 그런 그도 16년 만의 이장에 대해서는 구구한 억측만을 들었을 뿐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고 한다. 다만 당시 명풍수 두사충이 잡은 자리에 안장된 것을 안 왕실에서 그 후손들의 명당발복을 두려워하여 알게 모르게 이장을 강요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도 억측 가운데 하나다. 소문난 명당을 빼앗아 왕릉이나 태실(태실.왕실에서 태를 묻던 석실)로 활용함으로써 신하들의 명당발복을 견제했던 당시 왕실의 관행을 보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대목이기도 하다.



주간동아 2004.12.02 462호 (p94~94)

김두규/ 우석대 교수 dgkim@core.woos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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