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61

2004.11.25

‘경청’의 힘‘ 달변’보다 세다

  • 이 원 규 시인·생명평화탁발순례단팀장 jirisanpoem@hanmail.net

    입력2004-11-19 16: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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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덧 255일째 걷고 있으니 웬만큼 걸어온 셈이다. 먼 길을 가다보니 말을 하기보다는 주로 듣게 된다. 이제야 어째서 ‘입은 하나요, 귀는 둘인지’ 알 것도 같다. 할 말은 많아도 자꾸 혀가 짧아지고, 두 귀는 토끼처럼 쫑긋 세워진다.

    지리산과 제주도, 그리고 경남 지역 곳곳을 둘러보며 얻어먹고 얻어 자며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경청뿐이었다. 이 얼마나 쉬운 일인가. 남의 얘기를 들어주는 것, 이보다 더 쉬운 일이 어디에 있을까. 생존을 위한 방식이 겨우 남의 말을 들어주는 것뿐이라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러나 가면 갈수록 경청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남의 얘기를 듣고 두 눈을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일이 얼마나 자괴스러운 일인지, 속으로는 딴생각을 하며 도대체 남의 일 같지 않은 일을 결국 남의 일로 치부해버리고 마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솔직히 말하자면 그동안 잘 안다고 확신했던 것도 가면 갈수록 잘 모르겠고, 그동안 최소한의 믿었던 것들도 가면 갈수록 잘 믿지 못하겠다. 거창하게 생명평화의 이름을 내걸고 걷고 또 걷고 있지만 생명평화는 요원한 세상이다. 혀가 짧아진다 한들 입은 더 커져 할 말들이 떼뱀처럼 또아리를 틀고, 쫑긋 두 귀를 세우지만 귓구멍은 자꾸 작아지고 작아져 아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세상에 ‘귀’는 보이지 않고 나팔 같은 ‘입’만 둥둥



    사정이 이러하니 나에게 경청은 내일의 희망사항이요, 말로 표현하지 않는 나의 교만은 오늘의 구체적인 현실이다. 이를 어찌할까. 아침저녁으로 명상을 하고, 걷고 또 걸으며 참회해도 쉽사리 귓구멍이 열리지 않는다. 더욱 작아지는 혓바닥마저 돌처럼 굳어간다. 말을 하려 해도 어느새 혀는 굳어 어쩔 수 없는 묵언이요, 제아무리 들으려 해도 귀머거리가 따로 없다.

    다시금 돌아보건대 나는 아직 경청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이다. 경청이란 그저 남의 얘기를 들어주며 미소를 짓거나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속으로는 딴생각을 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었다. 언뜻 보면 경청은 최소한의 인간적인 예의인 것 같지만, 사실은 제대로 알아들은 뒤 비로소 나의 의견을 분명히 표현하고 상대와의 허심탄회한 논쟁으로까지 이어져야만 완성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청은 기만이다. 남의 일을 나의 일로 받아들이지 않는 대화는 그 자체가 불필요한 것 아니겠는가. 생각이 좀 다르거나 달라 보이면 어느새 나는 들어주는 척했다. 이미 내 마음속에 정해진 틀 밖의 얘기라면 두 귀를 틀어막았다. 다만 예의라는 허울을 쓰고 겉으로는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형편없는 놈, 그러면 그렇지. 안 되겠군. 다시는 상종할 일도 없을 거야’라며 폄하했다. ‘청(聽)’도 모르고, ‘경(敬)’도 모르는 처사였다.

    그러고도 나는 아무 반성도 하지 않았다. 또 길을 나서며 은근히 이러한 관성이 나를 지배해주기를 바랐다. 그것이 우선 편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사람을 만나서는 할긋 관상을 보고, 얘기를 들어보고, 기대와 좀 다르다 싶으면 어느새 입을 닫고 귀를 막았다. 말하자면 온전히 한 사람을 이해하거나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며 살아온 것이다. 나 또한 그들에게 똑같이 그러한 대접을 받고 있는지조차 깨닫지 못한 채 말이다.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상대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한 채 알량한 지식과 지혜로 그를 깨우치거나 설득하려 했다면 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아무리 틀린 말이라 할지라도 깊이 새겨듣지 않고 성급히 내뱉은 말, 이를 어찌 주워담을까. 그리하여 옛사람들은 구시화지문(口是禍之門),즉 ‘입은 화를 불러들이는 문’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두 귀는 곧 복이 들어오는 문이 아닌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귀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거나 학대하고 있었으니 이 얼마나 통탄할 노릇인가. 시시(時時)로 두 귀를 파고드는 온갖 진리의 말씀마저 제대로 듣지 못했으니, 어찌 소리를 보는 관음(觀音)의 경지에 오르겠는가.

    먼 길을 걸으며 생각하나니 나는 아직 나의 숨소리나 심장 박동소리조차 제대로 듣지 못했다. 지금 여기 이곳에서의 생을 외면하고 남에게 혹은 다른 어떤 곳에서의 거창한 생을 꿈꾸었다. 모두 기(氣)가 막히고 귀가 닫혔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연의 소리는 고사하고 사람의 말인들 제대로 들리겠는가.

    세상을 휘휘 둘러보노라면, 특히 정치판을 보면 도대체 귀는 보이지 않고 나팔 같은 입만 둥둥 떠다닌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허풍선이니 그러다 터지면 어찌할까.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상을 바꾸는 힘은 달변이 아니라 경청에 있다. 삶의 아름다운 해답이 바로 경청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여전히 입은 하나요, 귀는 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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