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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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칠정 논변 긴장 녹인 차 한잔

퇴계 상대 편지로 8년간 성리학 논쟁 … “옳은 것은 하나” 대신들과 타협 거부 낙향

  • 정찬주/ 소설가

    입력2004-10-07 16: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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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단칠정 논변 긴장 녹인 차 한잔

    고봉 기대승의 정신을 기리는 월봉서원 전경.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에 반해 너브실(廣谷)에 정착해 산다는 강선생 부부가 반갑게 맞이해준다. 월봉서원(月峯書院)과 애일당(愛日堂) 고택 뒤로 펼쳐진 대숲에서 청랭한 바람이 불어온다. 대숲 속의 반광반음(半光半陰)에서 자란 부드러운 찻잎은 떫은맛이 옅고 단맛이 나므로 쌈을 해도 맛있다고 한다. 강선생의 안내를 받아 고봉의 독서당이던 귀전암(歸全庵) 터에 오른다. 고봉의 아들이 시묘를 하면서 머문 칠송정(七松亭)을 지나 10여분 동안 대숲을 지나치자 고봉의 묘가 나타난다.

    고봉의 선대는 서울에서 거주하였는데, 숙부 기준(奇遵)이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화를 당하자, 부친이 세속의 일을 단념하고 전라도로 내려와 터를 잡았기 때문에 고봉은 중종 22년(1527)에 광주 송현동에서 태어난다. 그는 명종 13년에 대과 1등으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다. 32살의 젊은 고봉은 처음으로 서소문 안에 살던 성균관 대사성이자 원로학자인 58살의 퇴계를 찾아간다. 이후 두 사람은 장장 8년 동안 편지로 논쟁을 벌인다. 그 내용은 이른바 우리나라 사상사(思想史) 최고의 논쟁이라고 일컫는 사단칠정(四端七情) 논변이다. 사단이란 사람의 본성에서 우러나온 이성적 마음씨인 인(仁)·의(義)·예(禮)·지(智)이고, 칠정은 일곱 가지 감정인 희(喜)·노(怒)·애(哀)·낙(樂)·애(愛)·오(惡)·욕(欲)이다.

    귀전암 터 약수 아직도 졸졸

    퇴계는 사단이 이(理)에서, 칠정은 기(氣)에서 발생한다고 분리해서 보았는데, 고봉은 이와 기를 서로 떼어놓고 볼 수 없다는 주장을 폈다. 결국 퇴계는 고봉의 주장을 일부 수용하기에 이르는데, 여기서 나그네는 아들뻘인 고봉의 주장을 받아들인 퇴계의 너그러운 인품과 권위에 짓눌리지 않는 고봉의 패기가 그들의 학문적 성과보다도 더 부럽기만 하다.

    그런데 고봉은 퇴계 사후 2년 만인 선조 5년(1572) 성균관 대사성으로 제수되던 해에 병이 나 46살의 나이로 운명하고 만다. 그래서일까. 고봉의 사상은 9살 아래인 율곡으로 이어져 더욱 빛을 발하지만 성리학 논쟁에 불을 당긴 그의 짧은 생애가 아쉽기만 하다.



    명종 앞에서 거침없이 제왕학을 펼쳤던 기대승. 정즉일(正卽一), 즉 ‘옳은 것은 하나’라고 외치며 대신들과의 타협을 뿌리치고 낙향한 그였기에 퇴계는, 선조가 나라 안에서 으뜸가는 학자를 천거하라 했을 때 이렇게 아뢰었던 것이다.

    “기대승은 학식이 깊어 그와 견줄 자가 드뭅니다. 내성(內省)하는 공부가 좀 부족하긴 하지만.”

    내성이란 대의(大義)에 어긋나더라도 후일을 기약하며 물러서는 차선(次善)의 수용을 말한다. 나그네는 고봉의 다시(茶詩)를 읊조리며 귀전암 터에 이른다. ‘유거잡영(幽居雜詠)’ 15수 중에서 여섯 번째 나오는 시다.

    ‘해 가린 소나무는 장막 같고/ 마루에 이른 대나무는 발과 같네/ 벽에는 서자(徐子)의 자리를 달았고/ 꽃은 적선(謫仙, 이백)의 처마에 춤추네/ 학을 길들이는 사이 세월이 흐르고/ 차 달이며 시냇물을 더하네/ 사립문 온종일 닫고 앉아/ 홀로 봉의 부리 뾰쪽함을 감상하네.’

    낙향한 고봉은 자신의 천재성을 남도의 풍류와 차로 삭였을 것 같다. 귀전암 터에 올라 이끼 낀 대롱을 타고 졸졸 흐르는 약수를 한 모금 마셔본다. 이곳에서 고봉은 스승처럼 존경한 퇴계에게 밤을 새우며 편지를 썼으리라. 눈이 침침해지면 약수를 떠다가 차를 달였을 터이고. 고봉은 사단칠정 논변의 팽팽한 긴장을 차 한 잔으로 숨고르기 했을지 모른다.

    가는 길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할 경우 장성인터체인지에서 816번 지방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10여분 달리면 월봉서원이 있는 너브실에 다다른다. 문의 062-951-1247




    茶人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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