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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속의 성(性)(33) | 마리아는 영원한 처녀인가

예수 낳은 뒤에도 “성생활 No”?

후세 교인들 마리아를 죄 없는 동정녀로 신성시 … 성경 곳곳엔 성생활 암시 구절 있어

  • 조성기/ 소설가

예수 낳은 뒤에도 “성생활 No”?

예수 낳은 뒤에도 “성생활 No”?

이탈리아 로마 바티칸 성베드로 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피에타’.

중세 기독교의 중요한 화두 가운데 하나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과연 성생활을 했을까’다. 성생활 자체를 꺼림칙하게 여기거나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이런 문제를 꺼내는 것조차 싫어할 것이 틀림없다. 더군다나 ‘하느님의 어머니’로까지 추앙받는 예수의 어머니를 두고 이런 문제를 논하는 것은 불경죄에 해당한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은, 성적 욕망은 원래 하나님의 축복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인류의 타락으로 성적 욕망이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욕망으로 변질되었을 뿐, 건전한 가정에서는 성적 욕망이 자손의 번성과 아울러 부부 사랑의 원동력이 된다. 물론 부부 사랑이 성적 욕망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리고 인류의 타락으로 변질된 욕망이 성적 욕망뿐이기만 하겠는가. 식욕은 원래의 궤도를 벗어난 정도가 얼마나 심한지 알 수 없다.

그래도 우리가 추앙하는 대상이 성생활만큼은 하지 않는 존재였으면 하는 바람을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다. 그것이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는 종교 대상일수록 바람의 강도는 세지는 법이다. 많은 예배 대상이 인간의 바람이 투사(projection)되어 미화되고 신성화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마리아의 경우 일생 동안 성생활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무죄한 존재로 승천까지 했다는 교리가 형성되기도 했다. 승천 교리도 교황이 일방적으로 선포한 것이 아니라 교인들의 청원에 의한 것이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 형제들은 친형제인가 사촌인가

1869년에서 1940년까지 3018건의 교황청 청원을 분석한 결과 96%가 마리아 승천이 교의로 선포될 것을 염원한 내용이었다. 그러한 열화와 같은 청원을 받아들여 교황 비오 12세는 마침내 1950년 11월1일 모든 성인의 축일에 성모 승천을 교의로 선포했다.

그러니까 성모 마리아 승천은 그동안 교인들 사이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신앙으로만 인정돼오다가 드디어 1950년에 이르러 공식 교의로 인정받게 된 셈이다. 성모 승천 교리에 여러 신학적 난제가 있어 역대 교황들이 공식 교의로 선포하는 것을 머뭇거려왔는데 오히려 현대에 와서 그 교리를 정식으로 채택하였으니 현대인의 신심이 더 강한 것일까.

아무튼 마리아를 죄 없는 존재로 상정하다 보면 죽어서도 예수처럼 부활을 해야 하고, 부활한 뒤에는 역시 예수처럼 승천을 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교황 비오 12세는 그러한 논리적인 귀결을 용기 있게 받아들였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마리아가 일생 동안 성생활을 하지 않은 동정녀였고,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이후에는 죄 없는 존재가 되어 죽어서도 부활하고 승천하였을까?

여기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신약 성경에 나오는 ‘예수의 형제들’이라는 용어다.

마가복음 3장과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예수가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어머니 마리아와 그 동생들이 예수를 찾으러 오는 대목이 나온다. 그리고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가 고향 나사렛에 들렀을 때 동네사람들이 이렇게 수군거린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않느냐.”

이와 같이 구체적으로 이름까지 기록되어 있는 예수의 형제와 누이들은 도대체 누가 낳은 자식들이란 말인가. 마리아의 동정성을 훼손하지 않으려면 이들을 마리아가 낳은 것으로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두 가지 유력한 학설이 전개되었다. 하나는 여기서 거론된 예수의 형제와 누이들은 예수의 친형제나 친남매가 아니라 예수의 사촌이거나 가까운 친척들을 가리킨다는 설명이다. 헬라어에서 형제나 누이를 표현하는 단어가 포괄적인 뜻을 가지고 있고, 영어에서도 그런 것을 보면 그럴듯한 해석이기도 하다.

그런데 나사렛 사람들이 고향 출신인 예수의 혈통을 따지면서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가 아니냐”라고 할 때 굳이 사촌형제나 사촌누이들을 들먹거릴 필요가 있었을까.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말 다음에 친형제나 친누이에 관한 언급이 나오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은가. 적어도 사촌 이름들을 이렇게 상세히 열거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사촌 학설은 구차한 면이 없지 않기 때문에 좀더 그럴듯한 설명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마리아와 정혼한 요셉을 홀아비로 설정하여 전처에게서 제법 많은 자식을 이미 낳았다고 하면 이 문제는 쾌도난마식으로 시원하게 해결되는 셈이다.

마리아는 처녀였지만 한 번 결혼한 적이 있는 홀아비에게 시집을 가서 예수를 낳고 남편의 전처가 낳은 자식들을 돌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줄거리를 기초로 하고 있는 책이 바로 ‘야고보 원복음서’이다. 마리아의 동정성을 변증하는 학자들도 외경에 해당하는 ‘야고보 원복음서’를 어느 신약 성경 못지않게 권위를 부여해가면서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마리아가 세 살 때부터 성전에 바쳐져 천사의 손에서 음식을 받아먹었다는 기록만 봐도 ‘야고보 원복음서’가 얼마나 황당한 책인가 하는 것은 금방 드러난다. 전국의 홀아비들로 하여금 지팡이를 가지고 성전으로 모이게 하여 지팡이에서 기적이 일어나는 사람이 마리아의 남편이 되도록 한다는 이야기는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하여 썼다고 하더라도 어색하기 그지없다.

‘야고보 원복음서’엔 황당한 마리아 이야기 가득

‘야고보 원복음서’에서 가장 문학적이면서 몽환적인 대목은 요셉이 동굴에서 산고를 치르고 있는 마리아를 위해 산파를 구하러 가다가 목격했다는 광경이다. 그 부분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이렇게 나 요셉은 걷고 있는 것 같았으나 사실은 걷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공중을 쳐다보니 대기는 응고되어 있었다. 또 천궁을 쳐다보니 그것이 정지하여 하늘의 새가 살며시 멈추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지상을 보니 그릇이 놓여 있고 일하던 사람들이 식사하는 자리에 앉아 손이 그릇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씹으려고 하는 사람이 씹지 않고 있으며 집으려고 하는 사람도 집어올리지 않으며 입으로 가져가려는 사람도 가져가지 않고 모두의 얼굴은 위로 쳐다본 채로 있었다.”

이런 식으로 양을 쫓아가던 목자도 지팡이를 손에 든 채 정지되어 있고, 달아나는 양도 그대로 멈춰 있으며, 흐르는 강물도 얼음처럼 굳어 있고, 어린 염소의 입이 강물을 마시다가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절대 정지의 순간을 요셉이 경험한다.

요셉이 산파를 구하여 동굴로 와보니 마리아는 이미 아이를 낳은 뒤였다. 정상적인 상식을 가진 산파라면 해산한 여인과 아이의 건강 상태를 살피며 산후조리를 잘하도록 간호할 것이다. 그런데 처녀 해산을 의심한 산파는 살로메라는 여자로 하여금 마리아의 처녀막이 그대로 있는지 그녀의 몸 안에 손을 넣어 확인하도록 한다. 살로메는 아이를 낳았는데도 마리아의 처녀막이 그대로 있음을 확인한다. 그리고 마리아의 몸 안에 손을 넣는 순간 불에 타듯 뜨거워지는 손가락들을 보고는 무릎을 꿇고 자신의 불신앙을 회개한다.

아기 예수가 마리아의 자궁에서 세상으로 나왔는데도 그녀의 처녀막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지어내면서까지 강조하는 이유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마리아의 영원한 동정성 교리를 옹호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처녀막의 유지를 동정성의 필수조건처럼 이야기하는 ‘야고보 원복음서’는 처녀막의 유무가 동정성과 별로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아는 현대인에게는 유치하기만 하다.

이렇게 황당하고 유치한 부분이 곳곳에 쓰여 있는 책을 마리아 동정성의 중요한 근거로 삼는 논리는 그래서 설득력을 잃게 된다.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마태복음 1:25)는 구절은 역설적으로 예수를 낳은 뒤에는 요셉이 마리아와 동침했음을 암시해주고 있다. 마리아가 남편과 성생활을 했다고 해서 마리아에 대한 존경심이 줄어들 리 없고 그녀의 순결성이 훼손될 리가 없다. 다시 강조하건대 건전한 가정의 성생활은 거룩하고 신성하다.



주간동아 449호 (p58~59)

조성기/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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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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