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44

2004.07.22

한 반에서 5명은 ‘어학연수 중’

강남 초등생 중심으로 방학 전부터 출국 러시 … 7, 8월 캐나다행 비행기표 품귀

  • 이나리 기자 byeme@donga.com

    입력2004-07-16 12: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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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반에서 5명은 ‘어학연수 중’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제2회 해외 이주이민 및 유학 박람회장.

    우리 반 35명 중 벌써 3명이 나갔습니다. 방학식은 다음주 토요일인데 지난주 2명, 지지난 주 1명이 빠져나갔어요. 해외 간다고 일주일 넘게 결석하면 안 되지만 국내여행 명목으로 대충 편의를 봐주고 있습니다.”

    서울 강북지역의 한 사립초등학교에서 4학년 담임을 맡고 있는 한모 교사의 말이다.

    한교사는 “개학 때 알아보면 방학 중 8, 9명은 외국에 갔다 왔더라. 엄마와 함께 가기도 하고 혼자 친척집에 묵기도 한다. 물론 단체 영어연수도 간다. 방학이 끝나고 일주일쯤이 지나서야 등교하는 아이도 있다”고 말했다. 이 경우는 방학 기간 앞뒤로 2주를 더 빼 총 8주 코스의 어학연수를 다녀오는 것이다.

    주부 김희영씨(서울 목동)는 초등학교 5학년, 3학년인 두 아들을 두고 있다. 며칠 전 작은아이한테서 “친구들이 방학 때 외국 간다고 난리다. 나는 안 보내줄 거냐”는 얘기를 들었다. 큰아이도 마찬가지였다. 김씨는 “방학이면 한 반에 서너 명씩 미국이나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지를 다녀온다. 보내자니 돈도 돈이지만 ‘안전할까’ ‘그만한 효과가 있을까’ 의심스럽고, 안 보내자니 풀 죽은 애들 보기가 안쓰럽다”며 고민스러워했다.

    초등생 유학 매년 증가 … 지난해 2400여명 캐나다행



    많은 초등학생들이 방학을 이용해 해외 어학연수를 떠나고 있다. 아예 유학을 가는 애들도 적지 않다. 이전에는 한번 가면 아주 가는 걸로 알았으나, 요즘은 1~2년의 기한을 정해 놓고 영어만 집중적으로 마스터하는 방식의 단기유학 내지 단기전학 프로그램이 관심을 끌고 있다. 국제유학원 임종하 부원장은 “전체 초등 유학생의 20~30%가 ‘돌아오는 것’을 전제로 떠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단기 영어연수나 유학을 떠나는 초등학생 수는 몇이나 될까. 교육인적자원부도 한국관광공사도, 이에 대한 통계는 갖고 있지 않았다. 일선 초등학교에 전화를 걸어보았다. 서울 목동의 모 초등학교 교감은 “해외에 나가려면 비자가 필요하고, 그래서 방학을 전후해 재학증명서들을 떼러 온다. 그걸 기준으로 보면 한 반에 두세 명 정도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서울 대치동의 모 초등학교 교감은 “지난해에 재학증명서 발급 기준으로 대충 헤아려보니 한 반에 5명 정도에 불과하더라”고 말했다.

    그러나 재학증명서 발급 기준으로 초등학생의 어학연수 비율을 끼워맞출 수는 없다. 캐나다는 6개월, 호주와 뉴질랜드는 3개월까지 무비자 체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만 캐나다의 경우 정규 학교에서 한 달 넘게 수업을 받으려면 학생 비자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역시 한국과 캐나다의 방학이 서로 겹치지 않는 겨울철에나 가능한 일이다.

    ‘주한 캐나다교육원’ 황현주 상담원은 “지난해 1만6000여명이 캐나다로 유학을 떠났다. 그 중 16%, 그러니까 2400명 정도가 초등학생이었다. 해마다 5~10%씩 수가 늘어온 것을 감안하면 올해 출국하는 학생 수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대한항공에 따르면 캐나다 왕복 비행기의 전년 대비 6월 탑승률은 12% 늘었다. 7월 예약률도 16% 증가했다. 6월 중순 여름휴가를 위해 캐나다 왕복 비행기표 2장을 구하던 박종서씨(서울 여의도동)는 여행사로부터 “8월 말까지 표가 전혀 없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이러한 표 품귀현상이 전적으로 초등학생 출국자 때문은 아니지만, 영어 학습을 위한 캐나다행이 러시를 이루고 있음은 현실이다.

    캐나다 전문 여행사인 ‘여행세계’ 송재만 사장은 “우리 여행사를 통해서만 1년 평균 2000여명의 초등학생이 캐나다로 간다. 지난해와 비교하면 30% 정도 늘어난 수치다. 작년에는 사스 파동 때문에 여행객 수가 적었다. 전체적으로는 연간 10~15%씩 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지난해부터는 아예 여행부터 혼자 하는 ‘나 홀로 유학’ 초등학생 수가 눈에 띄게 늘었다”고 밝혔다.

    한 반에서 5명은 ‘어학연수 중’

    ‘토피아아이비클럽’의 학부모 간담회.

    단기연수 경우 오전엔 대충 수업·오후엔 관광지 방문

    초등학생 해외 어학연수가 피크를 이룬 것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부터 2001년경까지였다. 시장 규모도 엄청나게 커 유학원치고 어학연수 프로그램을 취급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바람이 많이 빠져나간 상태다.

    캐나다 단기전학 프로그램 운영사인 ‘토피아아이비클럽’ 김석환 이사장은 “3, 4주 캐나다에 갔다 온다고 영어가 느는 것이 아니라는 걸 부모들이 깨닫게 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영어는 캐나다 어린이들과 한 반에서 공부할 때 가장 빨리 늡니다. 되도록이면 홈스테이를 하는 것이 좋고요. 그런데 단기 영어연수라는 건, 오전에는 외국 애들끼리 한 반에 몰아넣어 대충 가르치고, 오후에는 각종 관광지를 도는 식으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영어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문화적 이해를 높이는 데는 도움이 되겠지만 영어공부가 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국제유학원 임종하 부원장도 “일단 유학원 입장에서 오래 갖고 갈 수 있는 비즈니스 모델이 아니다. 방학 때만 반짝하기 때문이다. 이는 현지 영어학원 처지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실제로 밴쿠버 지역 내에서 한국 초등학생들이 영어 연수를 받을 수 있는 공신력 있는 서머스쿨은 밴쿠버시교육청, 노스밴쿠버시교육청이 운영하는 두 군데에 지나지 않는다. 선택의 여지마저 별로 없는 것이다.

    아주 가는 것이건, 초등학교 4~5학년 때 떠나 6학년 또는 중학교 1학년 때 돌아오는 것이건, 유학생 수가 가장 많은 건 역시 서울 강남지역 학교들이다. 서울 반포동에 사는 주부 한미혜씨는 “대치동 쪽은 오히려 아니라던데, 반포랑 압구정동은 정말 많이 나간다. 초등학교 4학년 때가 적기라는 말을 들었다. 기간은 1~2년이고 99% 엄마가 따라간다. 대충 3명 중 1명은 갔다 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 서초동 삼풍아파트 주민인 이명숙 변호사는 “주변에 안 간 집이 별로 없다”고 했다. “전문직에 종사하는 여성 중에도 직장을 포기해가며 아이 뒷바라지를 위해 캐나다행을 택하는 경우가 제법 있다. 유학까지는 아니어도 여름방학을 이용해 현지 영어캠프에 보내거나, 친척집에 머물며 학원을 다니게 하는 집은 정말 많다”고 밝혔다. 이변호사는 “아무 생각 없는 내가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라며 허탈하게 웃었다.

    ‘토피아아이비클럽’ 김이사장은 “우리 프로그램 참가 학생도 약 50%가 강남 아이들이다. 그 다음이 서울 목동, 경기 분당이다. 부모 직업은 의사가 약 50%로 가장 많다. 다음이 사업가, 기업체 임원, 고위공무원 순”이라고 밝혔다. 초등학생 시절의 어학연수 또는 유학 경험 유무가 그의 경제적 사회적 배경을 가늠하는 잣대로까지 활용되게 된 형국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의무교육 기간인 초등학교, 중학교 재학 중 단기 유학을 다녀오는 것이 적법한 일이냐는 논란이 곳곳에서 벌어지곤 했다. 원칙적으로는 중학교 3학년생 이하의 자비 유학은 법적으로 금지돼 있다. 그럼에도 다양한 이유를 들어 해외로 빠져나가는 학생들을 무조건 막을 수는 없는 일. 반대로 다시 돌아와 계속 의무교육을 받겠다는 아이들의 진급을 막을 법적 근거 또한 없다.

    교육인적자원부 김학일 공보관은 “한때 일부 교육청에서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정리가 됐다. 우선 유학을 떠날 때는 3개월 이상 무단결근하면 자퇴 처리하는 규정에 따라 일단 가제적을 한다. 6개월, 1년 혹은 2년 후 다시 돌아올 땐 현지 정규교육기관에서 교육받은 근거 서류를 학교장에게 제출해 허가를 받아야 한다. 그러니까 초등학교 4학년 때 유학을 가 6학년 나이에 돌아오면, 4학년이 아닌 6학년으로 재입학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현지에서 그에 합당한 정규 교육을 이수했을 때에 한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어쩐지 ‘편법’의 냄새가 나는 것은 사실. 초등학생 유학 및 어학연수, 출석일수와 진급을 둘러싸고 지금 일선 학교에서는 찜찜하고도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행해지고 있는 셈이다.

    어쨌든 학부모들은 얼마간의 여유라도 있으면 너도나도 캐나다행을 꿈꾼다. 이전에는 호주나 뉴질랜드의 물가가 확실히 싸 그쪽을 택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환율 차가 달러당 원화 300~400원 수준으로 좁혀진 지금에 와서는 캐나다 쪽 집중세가 두드러지고 있다.

    한 반에서 5명은 ‘어학연수 중’

    방학도 시작되기 전 짐을 싸 외국으로 떠나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 인천공항 출국장의 초등학생들.

    “친척 있으니 되겠지” 막연한 생각은 위험한 발상

    초등학교 3학년생 딸을 둔 주부 강모씨(서울 효자동)는 딸이 1학년생이던 2002년 3월 캐나다로 갔다.

    “올케가 먼저 조카 둘을 데리고 밴쿠버에 가 있었는데 거기 합류할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막상 가보니 문제가 한 둘이 아니더군요.”

    강씨의 애초 목표는 3년 정도 그곳에 있으면서 딸아이에게 네이티브 스피커에 가까운 감과 발음을 습득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막연하고 엉성한 계획으로는 오히려 안 가느니만 못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엄마들이 애를 데리고 갈 땐 다 생각이 거기서 거기잖아요. 그런데 그저 날마다 애 뒷바라지하고, 시간 나면 골프 치고, 그렇게 2~3년을 보내고 나면 순간 앞길이 막막해지는 거예요. 계속 있자니 남편은 어쩌고 경제문제는 어쩔 것이며, 돌아가자니 아이가 거부하는 거죠. 그러다 보면 가족 간에 골이 패게 되고 심한 경우 가정이 깨질 수도 있고. 처음부터 계획을 확실히 세워 야무지게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되겠더군요.”

    그래서 강씨는 밴쿠버행 두 달 반 만에 다시 짐을 싸 한국으로 돌아왔다. 강씨는 내년 후반기쯤 다시 딸아이의 캐나다 유학을 추진할 생각이다.

    캐나다 교민인 강영민씨는 “흔히 ‘친척이 있으니 되겠지’ 그런 생각을 많이 하는데 참 위험한 발상이다. 친척일수록 서로 대하기가 힘들고 의 상하기도 십상이다. 나 또한 시동생네에 아들을 맡겨놓았다 사소한 오해 때문에 아주 짐 싸들고 들어온 경우”라고 말했다.

    “그러니 쉬운 게 없어요. 유학원을 이용한다 해도 그저 단순 소개나 해주는 정도고. 만약 단기유학이라 한국 공부까지 병행하려 하면 아이가 너무 힘들지요. 우리 아이한테 꼭 ‘네이티브 스피커’ 같은 발음이 필요한지, 그냥 한국에서 차분히 공부하는 게 낫지 않을지, 투자한 만큼 효과를 거둘 수는 있는지, 무엇보다 아이가 급격한 환경 변화와 과중한 학업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 만한 성정인지 등을 두루 따져봐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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