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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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도는 ‘에이즈 혈액’ 누구 탓인가

국립보건원·적십자사 총체적 직무유기 … 유통 사실 공개 뒤에도 사태 축소 급급

  •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입력2004-03-31 16: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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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떠도는 ‘에이즈 혈액’ 누구 탓인가

    시민을 상대로 헌혈 홍보를 하고 있는 대한적십자사. 과연 이들은 시민의 피를 얼마나 제대로 활용하고 있는 것일까? 수혈감염 사고 발표 여파로 헌혈이 급감하면서 텅텅 빈 적십자사 혈액창고(작은 사진).

    보건복지부 산하기관인 국립보건원(현 질병관리본부)이 대한적십자사(이하 적십자사)에 에이즈 환자 199명의 신상정보를 잘못 통보한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이는 헌혈을 통해 들어온 에이즈 환자의 혈액이 각 병원과 제약사에 공급됐을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적십자사는 지난 10여년 동안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국립보건원은 적십자사가 일부 환자의 정보가 잘못된 사실을 알아내고 확인을 요청해왔으나 이마저도 묵살했다.

    이 같은 사실은 감사원이 지난해 11~12월 적십자사를 대상으로 벌인 ‘혈액안전실태’ 감사 결과 밝혀졌다. 충격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주간동아’가 입수한 감사원의 적십자사 통보 공문에 따르면 에이즈 환자 신상정보 통보 오류건과 별도로 적십자사는 에이즈나 B형·C형 간염의 감염 우려가 있어 출고가 일절 금지된 ‘부적격 혈액(헌혈유보군, 과거 혈액검사에서 단 한 차례라도 양성반응이 나왔던 혈액)’ 7만5575건을 지난 5년 동안 병원과 제약사에 수혈용과 의약품 원료로 공급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중 에이즈가 의심되는 헌혈유보군 헌혈자만 99명. 유통 부적격으로 판명된 이들의 혈액 306건이 시중에 유통됐다는 것이다.

    감염자 신상명세 잘못 통보하고도 ‘묵묵’

    심지어 최근 국내 최초로 10건의 수혈감염 사고가 확인된 B형과 C형 간염의 경우 1999년 이전 1차 혈액검사 결과 간염 양성판정을 받은 30만명의 헌혈유보군(간염 의심자)을 정확한 재검사 없이 헌혈 가능 대상으로 지금껏 방치해온 것으로 확인됐다.

    부패방지위원회의 감사 의뢰로 이루어진 이번 감사 결과 ‘주간동아’가 그동안 보도해온 ‘적십자사의 부적격 혈액 유출 실태와 그로 인한 수혈감염 사고’ 관련 기사(366, 401, 403, 405, 424, 425호)가 사실로 최종 확인됐다. 부패방지위원회는 지난해 10월 ‘주간동아’ 보도에 이어 시민단체의 고발이 잇따르자 감사원에 감사를 의뢰했다.



    떠도는 ‘에이즈 혈액’ 누구 탓인가

    감사원이 대한적십자사에 보낸 감사결과 통보 공문.

    감사원의 이번 감사는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파괴력을 지닐 것으로 보인다. 국립보건원과 적십자사의 직무유기 부분이 분명히 밝혀진 데다, 규정을 무시하고 부당 유통시킨 부적격 혈액 건수나 헌혈유보군 누락 사례가 워낙 많아 이를 관리 감독하는 보건복지부도 총체적인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감사원은 적십자사에 보낸 통보문에서 “적십자사는 1987년부터 2000년 6월 사이에 국립보건원이 통보한 에이즈 감염환자 명단 중 199명의 신상이 잘못 통보(주민등록번호 불일치 70명, 성명 불일치 115명, 주민등록번호 성명 둘 다 불일치 14명)됐는데도 그중 186명에 대해서는 지난해 말까지 오류내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고, 나머지 13명에 대해서는 국립보건원에 정확한 신상정보를 통보해주도록 요청만 한 채 국립보건원이 이들의 신상정보를 통보해주지 않고 있는데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고 밝혔다. 즉 국립보건원은 에이즈 환자의 헌혈 가능성이 현존하는 상황에서 그 신상명세를 잘못 통보한 실수를 저지른 데 이어, 헌혈 과정에서 이상이 발견된 13명에 대한 적십자사의 확인 요구도 묵살했다는 이야기다. 이는 혈액관리법과 에이즈 예방에 관한 법률을 위반한 명백한 직무유기에 해당한다.

    현행 두 법에는 에이즈에 대한 확진은 국립보건원에서만 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신상정보도 모두 국립보건원에서 관리토록 돼 있다. 때문에 국립보건원은 에이즈 확진환자가 확인되면 신상정보를 즉시 적십자사에 통보하고, 적십자사는 이들을 전산시스템상의 헌혈영구유보군(PI)으로 분류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에이즈 환자의 성명이 잘못 통보될 경우 적십자사 전산시스템에는 다른 사람의 이름이 헌혈유보군으로 등재되며 정작 해당 에이즈 환자가 헌혈을 하러 오면 전산시스템은 이 사람이 에이즈 감염자라는 사실을 확인해줄 방법이 전혀 없다. 주민등록번호가 잘못 통보된 에이즈 환자는 전산시스템이 오류를 일으켜 아예 헌혈유보군으로 등재조차 되지 않는다. 감사결과도 이를 뒷받침한다. 실제 적십자사의 전산시스템에는 199명 중 115명(성명 오류)은 다른 사람 이름으로 헌혈유보군에 등재되어 있었고, 나머지 84명은 헌혈유보군으로 등록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

    헌혈을 통해 자신의 에이즈 감염 여부를 재차 확인하려는 에이즈 감염자의 특성상 199명 중 몇 사람은 다시 헌혈을 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존재한다. 감사원은 “이들의 혈액이 수혈용 등으로 공급될 경우 2차 감염자가 발생할 염려가 있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실제 지난해 8월 에이즈 환자의 혈액을 수혈받은 60대 환자 2명이 에이즈에 감염돼 이중 한 사람이 최근 사망했다.

    떠도는 ‘에이즈 혈액’ 누구 탓인가

    감사원의 감사결과, 적십자사는 법적으로 헌혈 자체가 금지된 ‘헌혈유보군’ 대상에게서도 무작위로 헌혈을 받아온 것으로 드러났다.

    적십자사 혈액본부의 직무유기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적십자 혈액본부 산하 16개 혈액원에서 헌혈 당시 실시한 1차 혈액검사 결과 에이즈 양성반응이 나온 헌혈자를 헌혈유보군으로 등록하지 않고 계속 미루다 부적격 혈액을 그대로 유통시킨 것. 감사결과 적십자사 혈액수혈연구원은 2000년 4월부터 2003년 2월까지 각 혈액원에서 헌혈유보군 등록을 의뢰한 6498명 중 63명을 짧게는 8일, 길게는 3년 5개월간 지정을 미룸으로써 그 기간에 이들의 혈액이 각 대학병원 등 의료기관에 수혈용으로 147건, 제약회사에 의약품 원료로 81건이 공급됐다. 적십자사 혈액본부는 또 2002년 12월26일에서 2003년 5월26일까지 혈액정보관리시스템을 변경하면서 기존 시스템에 있던 헌혈유보군 헌혈자 36명을 신규 시스템으로 제때 옮기지 않아(최대 7개월) 이들의 부적격 혈액이 수혈용으로 53건, 제약회사에 25건이 유통됐다. 결국 적십자사의 직무유기로 에이즈 감염 우려자 총 99명에 대한 헌혈유보군 지정이 연기됨으로써 부적격 혈액이 306건이나 유통된 셈이다.

    B형·C형 간염은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 감사원은 적십자사가 혈액관리법에 헌혈유보군 규정이 마련된 1999년 4월1일 이전, 1차 혈액검사에서 간염 양성판정을 받은 30만3946명의 간염 의심자를 헌혈유보군으로 등록하지 않은 채 현재까지 방치하고 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때문에 99년 4월1일 이후 올 1월까지 헌혈유보군으로 묶여 유통이 금지됐어야 할 부적격 혈액이 각 의료기관에 수혈용으로 4만8551건, 제약회사에 의약품 원료로 2만4317건이 출고됐다. 적십자사 내부의 한 관계자는 “헌혈유보군은 법에 명문화되기 이전에도 적십자 내부 규정상 ‘헌혈부적격자’라는 이름으로 관리되고 있었는데 이를 헌혈유보군으로 옮기지 않은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더욱이 적십자사는 2000년 5월 헌혈유보군을 전산상에서 조회할 수 있는 시스템을 새로 도입하면서 B형·C형 간염은 제외했다. 이로 인해 지난해 5월26일까지 3년 동안 B형·C형 간염의 헌혈유보군 조회가 되지 않음으로써 732명의 부적격 혈액 2232건이 병원으로, 1271건이 제약회사로 각각 공급됐다. 적십자사의 안이한 대응으로 B형·C형 간염의 감염 우려가 있는 총 7만6369건의 부적격 혈액이 유통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유출된 부적격 혈액은 어떻게 되었을까. 적십자사는 지난해 10월부터 실시한 자체 수혈감염 추적조사에 대한 발표(주간동아 424호 최초 보도)를 통해 “2000년 4월1일 이후 유출된 부적격 혈액 2550건에 대한 조사결과 부적격 혈액 수혈로 인한 에이즈 감염자는 한 명도 없고, B형·C형 간염 감염자만 각각 5명씩 10명이 발생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감사원 감사결과로 본다면 2000년 4월1일 이후 유출된 부적격 혈액은 적게 잡아도 7만 건이 넘는다. 즉 적십자사의 추적조사가 자의적 선택에 의해 날림으로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다.

    감사원은 이번 감사에 따른 조치사항으로 혈액안전관리를 소홀히 한 관련자에 대한 문책을 요구했다. 하지만 적십자사는 사과와 반성을 하는 대신 감사결과를 언론에 알린 직원 2명(내부 제보자)을 3월29일 징계위원회에 회부했다. 적십자사가 과연 구호와 봉사를 위해 성금을 거두고, 국민의 혈액을 무료로 모집할 자격이 있는 기관인지 다시 한번 생각케 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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