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7

2004.03.25

일본 출판계도 ‘노래방 풍경’

찍어내도 읽는 이 없어 불황 깊은 골 … 지난해 1500개 서점 문닫아 ‘암흑시대’ 큰 걱정

  • 도쿄=조헌주 동아일보 특파원 hanscho@donga.com

    입력2004-03-18 13: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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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출판계도 ‘노래방 풍경’

    도쿄의 한 대형 서점에서 책을 읽고 있는 직장인.

    ‘책을 읽지 않는 시대.’

    세계 톱클래스의 출판대국, 일본에 ‘출판 암흑시대’가 도래했다고들 난리다.

    도쿄를 자주 찾는 한국인들도 일본의 책 문화가 달라지고 있음을 느낄 정도다. 수년 전만 해도 도쿄의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손에서 책을 떼지 않는 일본인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고, 그것은 일본의 풍물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 풍경을 보며 ‘한국인들도 저렇게 책을 좀 많이 보았으면…’ 하고 부러워했던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모습을 보기가 점점 어렵다. 자리에 털썩 앉자마자 고개를 푹 숙이고 잠을 청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혹은 휴대전화를 꺼내 문자메시지를 작성하거나 하릴없이 메일박스를 뒤적이거나 게임 하는 모습만 늘어간다.

    어찌된 영문인지 한창 책을 보아야 할 나이일수록 책을 멀리하는 것 같다. ‘대체 저 연세에 책은 읽어 뭐 하시려나’ 싶은 노인들만 지성스레 책을 본다. 돋보기를 치켜 올려가며, 돈이 없어 보고 싶어도 책을 보지 못했던 ‘활자 굶주림’의 세월을 만회하려는 것일까. 이렇다 보니 젊은 사람들이 책을 읽고 있으면 기특해 보일 정도다. 물론 슬쩍 곁눈질을 해보면 읽고 있는 책은 십중팔구 만화책이나 주간지지만.

    일본의 연간 출판물 판매 실적을 보면 7년 연속 전년도에 비해 줄고 있다. 2003년은 전년도에 비해 3.8%가 줄었다. 책의 반품률도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2003년의 경우 서적은 38.8%에 이르고 잡지는 30.9%라고 한다.



    책을 읽지 않으니 전업하거나 폐업하는 서점이 늘고 있다. 지난 한 해에만 1500개 서점이 문을 닫아 2004년 3월 현재 일본의 전국 서점 수는 1만9000개로 줄었다. 하루 5개의 서점이 셔터를 내린 셈이다.

    지하철 안 젊은이들 ‘꾸벅꾸벅’

    2002년 출판시장은, 과연 읽을 가치가 있는지는 차치하고 ‘해리 포터’ 시리즈가 판매 호조를 보여 그럭저럭 버텼다. 그러나 지난해에는 해리 포터 인기마저 시들해지면서 출판계 사정이 더욱 나빠졌다. 300만부를 넘은 ‘바보의 벽’ 이란 책 말고는 지난해 ‘밀리언셀러’가 한 권도 없었다고 한다. 매년 3~4권의 밀리언셀러를 만들어낸 일본 출판계는 이제 ‘암흑시대’를 맞고 있다고들 걱정이다.

    ‘바보의 벽’이란 히트작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신쵸샤(新潮社) 표정이 썩 좋지 않다는 점을 보면 출판업계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최고일 때 신쵸사의 연간 매출액은 340억엔(약 3400억원)이었으나 지난해에는 320억엔대에 머물렀다.

    일본 출판업계 최대 규모인 고단샤(講談社)를 보아도 사정은 비슷하다. 1909년 설립된 이 출판사는 일본 출판업계 간판이다. 2002년도 1750종의 단행본을 펴냈다. 60만부가 팔리는 ‘주간현대’도 내고 있다. 연간 매출 총액은 1713억엔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익계산서를 두드려보니 1945년 이래 최초의 적자를 기록했다. 2003년에는 간신히 흑자로 돌아섰다고 하나 불안해한다.

    일본 출판계가 아직도 세로쓰기 전통을 지키고 있는 것이 젊은 세대의 독서 이탈을 가속화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증거로 가로쓰기 방식으로 출판된 휴대전화 연재소설 ‘딥 러브’가 총 100만부(4권 시리즈 누계)를 가볍게 넘어선 것을 들기도 한다. 1억2000만 인구 중 휴대전화 가입자가 8000만이나 되니 휴대전화의 가로쓰기 메시지 방식이 읽기 문화에도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말이 나올 만하다. 가로쓰기, 가로읽기에 익숙한 젊은층은 세로쓰기 자체에 거부감을 가질 법하다. 세로쓰기를 끈질기게 고집하고 있는 신문의 구독자 수도 해마다 감소하고 있는데 역시 젊은층을 새로운 독자로 끌어들이는 데 실패했기 때문으로 지적된다.

    일본 출판계도 ‘노래방 풍경’
    일본과 같은 한자문화권 국가이지만 한국이나 중국의 출판이 가로쓰기 체제로 완벽히 이행했는데도 일본만 구시대적인 세로쓰기 체제에 매달려 있는 데 대한 자성의 소리도 들린다.

    최근 10년간의 서적과 잡지 판매금액 추이를 보면 최고를 기록한 것은 1996년이다(표 참조). 영상 중심 시대로의 이행이란 측면 말고도 낮은 출산율의 영향으로 인구 증가 추세가 멈추며 절대인구가 감소하는 단계에 들어간 일본의 인구학적 요소도 책 소비 감소의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한편 종이 인쇄물 대신 전자서적을 선호하는 경향도 뚜렷해지고 있다.

    사전이 전형적인 예다. 4월 개학을 맞아 입학 선물로 여전히 인기 품목인 사전을 사기 위해 서점을 찾지 않고 가전제품 양판점을 찾는 이들이 많다. 휴대하기 간편하고 조회하기 쉬운 전자사전을 찾는 것이다. 전자사전의 매출액은 연간 440억엔에 이를 만큼 크게 늘어났다. 반면 전통적인 종이사전은 250억엔 규모로 줄어들었다. 앞으로도 전자사전 선호 추세는 더욱 강화될 것이란 예상이 지배적이다.

    인구 감소 전자서적 선호도 한몫

    디지털 정보매체에 대한 신세대의 호감을 겨냥해 소니 등은 전자서적출판 회사를 신설했다. 전용 단말기는 전자사전 기능 외에도 인터넷 등을 통해 다운받은 파일을 읽을 수 있다. 물론 책장을 넘기며 읽어야 독서의 제 맛이 난다는 세대에게는 ‘페이지다운’ 키를 누르며 화면을 보는 데 대해 저항감이 크다. 하지만 단말기에 거부감을 느끼기는커녕 친밀감을 느끼는 계층이 늘어가고 있다.

    일본의 서적이나 잡지 통계를 세계적으로 비교해보면 아직도 출판대국임은 틀림없다. 연간 8만종, 하루 230종꼴로 새 책을 만든다. 그만큼 다양한 주제와 내용의 책이 독자를 부르고 있다. 일본을 세계 강국 반열에 낄 수 있게 해준 원동력인 지적 탐구열이 식기는 했으되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증표다. 출판사 수도 갈수록 늘고 있다.

    외형상으로는 여전히 출판대국이나 속으로는 골병이 들고 있다. 출판되는 종수는 많지만 어느 사이 대개 1만부였던 초판 발행 부수가 수년 사이 5000부로 줄었다. 책의 성격에 따라 초판 부수는 다르지만 평균적으로 보아 그렇다는 말이다. 출판사는 확실해 보이는 책 1권을 1만부 찍어 반품으로 곤란을 겪느니 5000권씩 2권을 펴내는 쪽을 택한다.

    일본 출판계도 ‘노래방 풍경’

    도쿄 신주쿠의 대형 서점 기노구니야의 옥외매장에 설치된 잡학서적.

    팔리지 않는 책이지만 계속 발행할 수밖에 없는 마의 순환에 빠진 듯한 일본 출판계. 이런 사정을 ‘출판업계의 노래방화(化)’라고 부르는 이도 있다.

    노래방에 가보자. 제 순서가 되면 마이크를 잡고 다들 열창한다. 멋지게 뽑아대는데 아무도 안 들어준다고 열 낼 것 없다. 당신도 딴사람 노래 부를 때 딴 짓 했으니. 다들 그런 곳이 노래방이다. 열심히 책을 찍어대는 이가 있을 뿐, 읽어주는 이가 없는 출판계 역시 노래방 풍경이나 마찬가지라는 자조적 표현이다.

    출판 암흑기라고는 하지만 아직 일본에 간행서적이 많고, 출판사 수도 늘어났으니 희망이 있다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과연 그렇다고 해서 출판의 질이 좋아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느냐는 비관론도 많다. 노래방이 늘어나고, 가정에도 노래방 기기가 보급되다 보니 웬만한 사람도 가수 뺨치게 노래를 잘 부른다. 그렇다고 해서 가요 수준이 올라갔다거나 음악성이 풍부한 사회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출판계 역시 그렇다는 것이다. 책 읽는 즐거움을 무가치한 일로 치부하고 외면한 채 오로지 돈 셈하는 즐거움만 추구하는 사회에 무슨 희망이 있겠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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