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14

2003.12.18

웅진땅에 강력한 세력 살았었네

공주 수촌리 백제고분군 발굴 … 국보급 유물 상당수 ‘백제史’ 고쳐 쓸 실마리 제공

  • 글/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사진/ 김성남 기자 photo7@donga.com

    입력2003-12-11 16: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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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웅진땅에 강력한 세력 살았었네

    1600년 만에 햇빛을 본 공주 수촌리 고분군 발굴현장. 각종 토기류가 구석에 몰려 있고 아래쪽 흙더미에는 금동신발이 묻혀 있다. 강종원(왼쪽) 이훈 책임조사연구원이 옥으로 만든 목걸이를 가리키고 있다.12월 초 현재 발굴작업이 80% 정도 진행됐다. 한성 백제 시절 지배계층이 이 지역 토착세력에게 하사한 것으로 보이는 중국제 네 귀 달린 자기와 닭머리 장식이 달린 자기(왼쪽 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최근 발굴 소식이 알려진 충남 공주시 의당면 수촌리 고분군에서 국보급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는 1971년 무령왕릉 발굴 이후 최대 규모다. 땅속에 잠들어 있다 1600년 만에 햇빛을 본 번쩍이는 금동관모 두 점과 금동신발 세 켤레, 매끈거리는 중국제 계수호(닭머리 모양 장식이 달린 흑유도기) 등은 사학계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충남발전연구원 발굴조사팀 이훈 책임조사연구원은 “백제사를 다시 써야 할 정도로 대단한 발견”이라고 말했다.

    백제사 연구자들은 그동안 백제사를 설명해줄 문헌이나 고고학적 유물이 많지 않아 상상력을 동원해 역사를 해석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번 발굴은 그동안 풀지 못했던 많은 의문을 풀 실마리를 제공해줄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475년 한성(지금의 서울 강남지역) 백제 시절 고구려의 공격으로 도읍이 함락되자 문주왕이 주저 없이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천도한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그동안 학계에선 한성 백제가 웅진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발굴된 계수호 등 중국 자기들과 금동신발 등이 이 주장을 뒤집는 결정적 증거가 된 것이다. 토기만 생산할 수 있었던 당시 백제에서 중국 자기는 최고의 사치품이었으며, 지배계층 외에는 소장할 수 없었던 특별한 위세품(威勢品·신분과 계급을 상징하는 물건)이었다. 이 유물들은 당시 중국과 교역한 중앙 정부가 이곳 지배세력들에게 하사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중앙의 힘이 이곳에도 직접 미쳤다는 것을 설명해주는 것이다.

    한성 백제 웅진 천도 설명 가능

    조유전 문화재위원은 “문주왕은 선왕이 죽고 수도가 유린돼 나라가 결딴난 상황에서 공주로 천도했는데, 만약 공주지역을 장악하지 못한 상황이었다면 공주 지배세력이 고구려의 침입 등을 우려해서 크게 반발했을 것”이라며 “그럼에도 이를 설명해줄 어떤 기록도 없었는데 이번 발굴이 그것을 설명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발굴을 이끈 이훈 연구원은 “발굴된 유물들은 왕족이나 그에 버금가는 세력이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며, 백제의 지방통치조직인 담로의 것일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우리 사서에는 담로에 대한 기록이 없지만 중국 사서 양서(梁書) 백제전에 백제가 자제 종족을 22곳에 파견해 통치하는 담로제를 실시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역사적 발굴에 얽힌 뒷얘기도 유물 못지않게 흥미롭다. 수촌리 일대는 공주시가 2005년까지 6만7760평 규모의 농공단지 조성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곳이다. 현행 문화재보호법은 사업대상 예정지가 9000평 이상이면 사전 문화재 조사를 의무화하고 있다. 이번 발굴은 사업 주체인 공주시가 충남발전연구원 부설 충남역사문화연구소에 이 일대 문화재 지표조사를 의뢰한 것을 계기로 시작됐다. 농공단지로 지정되지 않았다면 이번에 발굴된 유물들도 결코 빛을 볼 수 없었다는 얘기다. 그래서 이훈 연구원은 “천운이 따랐다”고 말했다.

    결국 이를 계기로 지난해 10월 연구원 조사팀(책임조사연구원 강종원·이훈)이 이 지역에 대한 지표조사를 실시했다. 당시 조사팀은 실제 발굴된 무덤의 조성 시기보다 훨씬 이전인 마한시대 것으로 보이는 토기 조각들을 찾아냈고, 지형적으로 무덤이 있을 만한 곳으로 추정돼 더 정밀한 시굴조사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공주시측에 제시했다. 작은 토기 조각 몇 개가 역사적 발굴의 단서가 된 것.

    웅진땅에 강력한 세력 살았었네

    붉은색 파편들은 목관에 쓰였던 꺾쇠들이다.

    올해 5월 조사팀은 가로 세로 1m 폭으로 10m 정도를 파는 시굴조사를 통해 돌무덤과 널무덤(土壙墓·땅을 파고 매장 주체를 안치한 무덤) 일부를 확인했다. 이 결과를 토대로 조사팀은 9월29일부터 본격적인 발굴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조사팀은 이번 같은 수확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발굴조사는 1지구(1000평)와 2지구(300평)로 나눠 이뤄졌다. 10월 중순 조사팀은 1지역에서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와 초기 철기시대의 세형동검을 비롯해 백제, 고려, 조선시대 유물들을 대거 발굴했다. 이에 흥분을 감추지 못한 조사팀은 세형동검 등 중요 유물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 보내 보존처리를 요청했고, 언론에 발표할 계획까지 세웠다.

    그런데 더 중요한 유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11월10일께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2지구의 널무덤(1호)에서 금동신발과 환두대도(손잡이 부분이 둥글게 처리된 큰 칼)가 나온 것이다. 이것은 무령왕릉 발굴 때 나왔던 것과 비슷한 것이어서 조사팀을 놀라게 했다. 이후 대형 널무덤 2기와 돌방무덤(石室墳) 3기, 돌곽무덤(石槨墓) 1기 등 모두 6기의 백제고분에서 금동관모와 사이호(네 귀 달린 호리병형 자기) 등 중요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훈 연구원은 “실제로 이런 중요한 발굴은 평생에 한 번 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팀원들은 가슴 떨리는 감동을 느꼈고, 밤잠을 설칠 정도로 흥분했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금동관모·신발 등 중요한 의미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하나같이 중요한 의미가 있다. 특히 단일 고분에서 왕이나 최고 수장급이 소유했던 금동관과 금동신발이 두 점 이상씩 출토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고구려시대의 대표적 상징인 삼족오(태양 안에서 산다는 세 발 달린 상상의 까마귀)를 연상시키는 삼족부형토기, 말재갈과 마구, 꺾쇠와 관못 등 녹슨 철기류, 순금 귀고리와 옥으로 만든 목걸이 등도 당시 생활사를 복원하는 중요한 사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2지구 일대는 발굴 전 조경업자가 조경수를 기르던 곳이어서 거대한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 3호 돌방무덤은 은행나무 뿌리 때문에 한쪽 벽 상단이 안으로 밀려들어 갔다. 조사팀이 은행나무를 베지 않고 뿌리를 파냈다면 내부의 유물들이 크게 훼손됐을 가능성도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발굴 과정은 살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조심스러워 12월4일 현재 발굴은 80% 정도만 이루어졌다. 애초 12월11일까지만 발굴할 계획이었지만 중요 유물 발굴로 불가피하게 발굴 기간을 연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역사적인 발굴로 인해 이 일대에 농공단지를 조성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던 공주시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45억원을 들여 토지까지 매입해둔 상황인데 이곳이 문화유적지로 지정되면 사업 변경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공주시 윤석형 지역경제과장은 “워낙 중요한 유물들이 많이 나와 사업 변경 가능성이 높아졌지만 농촌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 조성하는 농공단지인 만큼 일부 지역에서라도 추진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충남발전연구원측은 12월10일 문화재청과 문화재위원회, 공주시 관계자들을 발굴 현장으로 불러 설명회를 갖고 문화유적지 지정문제를 논의할 예정이다. 강종원 책임조사연구원(41)은 “개발의 논리로 보면 엄청난 노력과 경제적 손해를 감수해야 하지만 문화의 눈으로 보면 유적지 지정이 훨씬 더 큰 과실을 가져다 줄 것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또 다른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이번에 유물이 대거 발견된 2지구는 사유지와 농공단지의 경계 지역이다. 그런데 2지구 밖의 남쪽 능선에서도 토기가 발견됐다는 주민의 증언이 있어 좀더 넓은 지역에 걸쳐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는 게 조사단의 견해다.

    중국이 자국 역사에 고구려사를 편입하려고 애쓰고 있고, 일본이 역사 교과서 왜곡 등을 통해 자국 역사에 대한 집착을 보이는 상황에서 이번 발굴은 잊혀졌던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을 되살려냈다는 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조유전 문화재위원은 “그동안 학계에서 삼국사기 기록을 불신하고 3세기가 돼서야 백제가 한강변에서 집권세력을 갖췄다고 폄하해온 게 사실이다”며 “이번 발굴을 계기로 500년 역사의 백제사가 더욱 풍요롭게 해석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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