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14

2003.12.18

“이래도 안 불어” 대쪽 또 부러지나

검찰, 이회창 전 총재 분신 서정우 변호사 긴급체포 … 최병렬 대표 ‘물갈이론’ 더욱더 탄력

  • 김시관 기자 sk21@donga.com

    입력2003-12-11 13: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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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래도 안 불어” 대쪽 또 부러지나

    10월30일 한나라당사에서 SK 비자금 문제와 관련, 사과 기자회견을 하는 이회창 전 총재.

    ”신라면에 밥을 말아 먹고 싶다.”

    12월5일,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가 특검 재의결 표결을 위해 단식장(한나라당사 7층 대표실)을 나서기 전 한 말이다. 최대표의 단식은 ‘남는’ 장사였다. 당 정세분석팀은 ‘민심 일부 이탈. 그러나 전통적 지지자들 급속 결속. 대표 지도력 급상승’ 등으로 단식정치 대차대조표를 정리했다. 특검제 통과도 최대표 단식과 무관치 않다. 특히 209표의 괴력은 최대표 단식 덕으로 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최대표의 신라면 타령은 그만큼 여유가 있다는 방증이다.

    단식을 끝낸 최대표는 어제의 ‘최병렬’이 아니다. 일방적으로 검찰에 끌려다니며 정국주도권을 놓친 지난 몇 개월과 달리 특검을 앞세워 제1야당의 권위를 찾겠다는 의지가 곳곳에서 감지됐다. 최대표는 몸을 병원으로 옮긴 직후 제1의 총선전략인 물갈이 구상의 일단을 공개했다. 이 구상은 당내외 인사들을 만나 오랫동안 다듬은 것이다. 단식을 시작하던 11월26일 아침, 최대표는 서울 여의도 M호텔에서 영남권 K의원과 H의원 등 당 중진 2명과 조찬을 함께했다. 이 자리에서 최대표는 두 인사에게 단식 배경과 향후 당의 진로 등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다. 당개혁과 총선에 대한 강한 의지도 피력했다.

    영남 여론조사 ‘충격과 공포’

    최대표는 이 자리에서 “영남의 절반을 물갈이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최대표의 한 측근은 “영남은 반, 전체적으로는 30% 물갈이가 최대표의 의중”이라고 전했다. 최대표의 제의에 K의원도 동의했다고 한다. 물갈이에 대한 최대표의 의지에는 당무감사 결과와 각종 여론조사 결과가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인 사례가 경북지역 유권자들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 결과.



    한나라당 L의원은 11월21, 22일 이틀간 대구지역 모 여론조사기관에 ‘17대 총선 준비를 위한 경북지역 정치의식 조사(경북 전 지역 만20세 이상 성인남녀 1200여명 대상. 신뢰수준 95% ±2.83%)’를 의뢰했다. 조사 결과 한나라당 지지도는 32.7%. 1위였지만 부동층이 과반수(51.3%)를 넘었다. 한나라당의 텃밭임을 감안하면 충격적인 수치였다. 유권자 10명 중 6명(63.3%)은 정치권의 세대교체가 필요하다고 응답했고 유권자 절반 이상(53.3%)은 현역의원 교체를 희망했다. 경북 출신 의원 15명은 11월28일 이 여론조사 결과를 놓고 서울 마포 홀리데이인서울 호텔에서 대책회의를 했지만 ‘물갈이’라는 대세론을 뚫고 나갈 대책 마련에는 실패했다. 이들은 이 여론조사 결과를 쉬쉬했지만 당 지도부는 비공식적으로 내용을 파악했고 매우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

    11월 말 끝난 당무감사 1차 결과도 ‘영남 위기론’의 실체를 감지하게 한다. 영남 13석이 위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당무감사팀은 부패비리에 연루된 인사, 당 기여도가 낮은 사람, 자질이 떨어지거나 당선 가능성이 낮은 후보 등은 공천 과정에서 아예 제외시킬 것을 주문했다. 12월8일 오전 양정규 의원 등 몇몇 당 중진들은 불출마 입장을 밝혀 최대표의 물갈이에 동조하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단식을 통해 확보한 최병렬 카리스마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이래도 안 불어” 대쪽 또 부러지나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가 11월28일 단식 중 두 손을 모은 채 눈을 감고 있다. 10월30일 한나라당사를 찾은 이회창 전 총재와 최병렬 대표가 나란히 앉아 있다(오른쪽).

    그러나 검찰이 바로 이날 지난해 대선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개인후원회(부국팀) 부회장 겸 법률고문을 지낸 서정우 변호사를 긴급체포하면서 분위기는 반전되기 시작했다. 그는 이 전 총재의 복심이자 분신이다. 중진의원들의 보고는 미뤄도 서변호사의 보고는 깐깐하게 챙길 정도로 절친한 관계였다. 대선 당시 서변호사는 이 전 총재와 한인옥씨 등 몇몇 인사들만 상대했다. 대검찰청 문효남 수사기획관은 서변호사의 역할을 “이석희씨나 이회성씨와 같은 존재로 봐도 무리가 없다”고 말했다. 서변호사의 죄질이 그만큼 나쁘다는 의미로 엄청난 폭풍이 정치권을 덮칠 것을 예고한 것. 이에 앞서 6일에는 썬앤문그룹과 관련, 한나라당 전임 지도부 핵심인사의 정치자금 문제가 석간신문의 톱을 장식하기도 했다.

    최대표측은 “이 모든 것이 특검의 후폭풍”이라고 설명한다. 특검제 도입에불만을 품은 검찰과 청와대가 의도적으로 대선자금 문제를 물고 늘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검찰 주변에서는 노대통령의 핵심측근인 이광재 전 청와대상황실장의 구속설까지 나돌 정도로 강한 기운이 감돈다. 이 전 실장이 구속될 경우 한나라당은 초토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검찰 주변의 평가.

    상황이 이처럼 꼬이자 최대표 주변에서는 이회창 전 총재가 결자해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터져 나온다. 이른바 희생양론이다. ‘이회창 희생양론’이 처음 흘러 나온 것은 최대표 단식장이다. 12월3일 오후 5시경 최대표 단식장을 찾은 영남권 출신 K의원은 “이 전 총재가 기자를 만나 모든 게 내 책임이다. 내가 검찰에 출두해 조사받겠다. 그리고 감옥에 가겠다. 시대가 변했다. 당에서 나를 따랐던 중진들도 물러나라. 당도 해체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라. 이런 식의 입장을 취해주면 해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이 전 총재가 스스로 자기를 버리는 희생정신을 보여주면 어려움에 처한 한나라당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최대표는 K의원의 말을 듣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회창 희생양론’은 이날 처음 나온 것이 아니다. SK 비자금 사건이 터진 10월부터 당내 일각에서는 “누군가 책임져야 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됐다. 최대표 한 측근의 말이다.

    “2000년 누구도 예상치 못한 허주(김윤환 전 의원) 날리기를 감행했기 때문에 총선 승리가 가능했다. 이번에도 같은 충격요법이 필요하다. 두 번이나 대선에서 패한 한나라당이 아무런 변화 없이 유권자 앞에 설 경우 그들의 평가가 어떻겠느냐.”

    검찰이 서정우 변호사를 전격 체포하면서 이 전 총재 결자해지론은 한층 탄력을 받고 있다. 이 전 총재가 십자가에 매달릴 경우 보수층의 동정정서도 자극할 수 있다.

    문제는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하는 점. 최대표와 단식장에서 마주 앉았던 K의원은 12월4일 “대선 당시 당직을 맡은 내가 나서 이 전 총재에게 그런 청을 넣기도 그렇고…”라고 말했다.

    이 전 총재는 검찰과 한나라당 내부의 이런 미묘한 기류를 감지, 지난 5일 비밀리에 최대표 병문안에 나섰다. 두 사람은 좋은 관계가 아니다. 최대표의 한 측근은 “검찰 움직임을 감지한 이 전 총재가 최대표에게 뭔가 도움을 요청한 것 아니겠느냐”고 이날 회동 성격을 규정했다.

    이 전 총재의 한 측근은 “이 전 총재가 강경하게 노대통령과 검찰에 자신의 입장을 전달하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유승민 전 여의도연구소장 등 몇몇 측근들은 서변호사가 체포되기 전 이미 상황을 파악,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는 후문이다. 유 전 소장 소환설도 나돈다.

    이 전 총재측의 다급함과 달리 최대표는 서초동에서 불어오는 ‘검풍(檢風)’을 예견한 듯 무표정하다. 최대표의 측근 K씨는 “서초동에서 출발한 먹구름을 특검제와 정치개혁이라는 카드로 정면돌파할 것”이라고 말했다. 당이 인지하지 못한 대선자금과 관련한 의혹들이 제기될 수 있지만 피하지 않고 정면돌파하겠다는 것. 최대표는 5일 “한나라당도 재창당할 각오로 고칠 것은 확실히 뜯어고쳐서 낡은 이미지를 털어내고 새롭게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향후 획기적인 인적 물갈이와 당 쇄신을 예고한 것으로, 버릴 것은 버리고 가겠다는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풍전등화. 2003년 연말 이 전 총재의 현주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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