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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포장마차, 2003 한국 자화상

이밤도 한잔 술에 ‘포장마차’ 졸고 있다

지치고 쓰린 가슴 달래주는 ‘서민들 안식처’ … 서울에만 1만5800여개 불안한 영업 중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이밤도 한잔 술에 ‘포장마차’ 졸고 있다

이밤도 한잔 술에 ‘포장마차’   졸고 있다
대한민국의 겨울은 거리에서부터 온다. 두툼한 목도리를 두르고 종종걸음 치는 행인들, 공사장에서 피어 오르는 모닥불, 그리고 어스름한 가로등 아래 주황색으로 빛나는 포장마차. 싸늘하지만 구수한 겨울 향기와 함께, 어느새 포장마차의 계절이다.

세상사에 부딪히고 꺾여 비틀대는 이에게, 눈보라 속에서도 등대처럼 환하게 불을 밝히는 포장마차는 얼마나 따뜻한 위로가 되는가. 그래서 포장마차의 주인공은 언제나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이다.

비닐 한 장으로 세상과 구별된 그곳에서 노동자들은 ‘전쟁 같은 밤 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박노해 ‘노동의 새벽’ 중에서)를 붓고, 서민들은 ‘가슴 밑바닥의 이야기, 혼자 견뎌내는 이야기, 서로의 생을 묵묵히 인정할 수 있을 때만 말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임영태 ‘포장마차’ 중에서)를 나누는 것이다.

이밤도 한잔 술에 ‘포장마차’   졸고 있다

포장마차, 그 많은 닭발은 다 어디서 오나.

우리나라에 ‘포장마차’가 처음 생겨난 것은 1950년대. 두꺼운 광목천으로 윗도리만 가린 ‘마차’에서 참새구이와 소주를 팔기 시작한 것이 시초다. 이후 포장마차는 86 아시안게임, 88 올림픽으로 거리 일제단속이 벌어지기 전까지 서민의 친구로 그 역사를 이어왔다. 이 시절 포장마차는 소주 반 병만 시켜도 오이와 당근, 초고추장으로 차려진 넉넉한 안주상을 받을 수 있고, 꼼장어 한 접시 시키면 밤새워 소주를 마실 수 있었던, 돈 없는 술꾼들의 천국이었다.

1980년대 후반 포장마차 일제단속 이후 많이 사라졌던 포장마차가 다시 호황을 누린 것은 1997년 외환위기가 찾아오면서부터. 어느 날 갑자기 ‘퇴출’당한 샐러리맨들은 그들의 안식처였던 포장마차로 다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포장마차는 대규모 자본이 투입되고, 1만원대의 안주를 파는 일종의 대중식당으로 변모해갔다.



서울 신당동 중앙시장에서 30년째 포장마차를 만들고 있는 윤유혁씨(71)는 그때를 “포장마차 제작 주문이 하도 밀려 15일씩 기다려야 제품을 받아갈 수 있었던 시절”이라고 기억했다. 퇴직금을 받은 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자기 사업’으로 포장마차를 생각했고, 그만큼 성황을 이뤘다는 것이다.

이밤도 한잔 술에 ‘포장마차’   졸고 있다

더운 김이 오르는 만두, 구수한 곱창볶음과 매콤한 꼼장어구이는 겨울밤 퇴근길 직장인들을 포장마차로 유혹하는 추억의 음식들이다.

중앙시장은 지금도 포장마차를 차리려는 이는 누구나 한 번쯤 찾아가는 곳이다. 황학동 벼룩시장에서 도로 하나를 건너면 포장마차를 만들어주는 철물점과 포장마차용 식재료상들이 밀집해 있다. 아무리 초보자라도 중앙시장을 한 바퀴만 돌면 프로 포장마차 주인으로 변신할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곳에는 포장마차를 위한 모든 것이 갖춰져 있다.

포장마차를 하나 만들려면 불구멍 두 개, 불판, 가스 설치를 포함하는 기본 사양에 70만원 정도 잡아야 한다. 술을 팔고, 간단한 안주까지 조리하려면 초기 투자금이 좀더 든다. 디자인을 가미하거나 4구형 포장마차, 지붕을 넓힌 포장마차 등 대형 포장마차를 만들 경우 비용은 수백만원을 훌쩍 넘는다.

포장마차 제작이 끝났으면 이제 식재료 구입이다. 떡볶이용 가래떡, 각종 반죽에 조미료, 고추장까지 수백여종의 포장마차용 재료는 모두 중앙시장에서 찾을 수 있다. 닭은 다리와 닭발, 껍질, 똥집 등으로 ‘해체’돼 팔려나가고 돼지머리와 오징어튀김용으로 나갈 오징어채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국물과 양념까지 완벽하게 조리돼 있기 때문에 포장마차 주인의 손이 다시 갈 데가 없다는 게 이곳 상인들의 자랑이다.

포장마차에도 이른바 ‘트렌드’란 것이 있으니, 중앙시장의 베테랑들은 초보자를 위해 창업상담도 해준다. 올겨울 포장마차의 유행은 단연 찐만두. 재작년 유행했던 계란빵이나 작년에 사랑받았던 미니 피자는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대신 시장거리 곳곳에는 구멍이 숭숭 뚫린 찐만두용 만두판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한 개에 3800원. 아무리 작은 포장마차라도 최소 10개는 필요하단다.

그러나 외환위기 시절 호황을 누렸다는 중앙시장은 요즘 눈에 띄게 한산해졌다. 상인들은 저마다 “매출이 예년의 절반 이하로 줄었다”며 울상을 짓는다. 최근 심해진 노점상 단속의 여파가 여기까지 미치고 있다는 것. 포장마차를 제작했다가 장사가 안 돼 중고로 다시 팔 수 없는지 문의하는 이까지 있다고 한다.

실제로 서울시의 포장마차 단속은 점점 엄격해지고 있다. 서울 종로구가 올 들어 9월까지 수거한 포장마차는 506개. 강남구는 327개, 관악구는 504개를 수거했다. 현재 서울에는 1만5800여개의 노점상이 영업 중이지만, 최근 청계천 일대에서 이루어진 단속에서 보듯 이들 대부분은 언제든 당장 철거될 수 있는 불안한 상황이다.

성업중인 기업형 포장마차도 정통 포장마차를 위협하는 존재 가운데 하나다. 강남의 유명 포장마차들은 권리금 수억원, 월세 2000만원선을 부담하면서도 하루 매출 1000만원대를 넘기며 무섭게 커나가고 있다. 이들의 확장으로 ‘포장마차’ 하면 떠오르던 낭만과 정취는 조금씩 옛이야기가 되는 듯하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여전히 추운 겨울 거리에서 주황 깃발을 펄럭이는 포장마차가 필요하다. 그곳이 없다면 어디서 닭발에 소주 한 잔을 마시며 삶과 아픔을 나누겠는가.

‘…눈보라 속에 발갛게 몸 달군 포장마차 한 마리/ 그 더운 몸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거라/ 갑자기, 내 안경은 흐려지겠지만/ 마음은 백열 전구처럼 환하게 눈을 뜰 테니까….’

안도현 시인의 ‘숭어 한 접시’는 추운 겨울밤, 두툼한 포장을 걷고 들어가면 열리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따뜻한 헌사였다. ‘세상은 혁명을 해도/ 나는 찬 소주 한 병에다/ 숭어회 한 접시를 주문하는 거라.’

그래서 오늘 밤도 사람들은 또 한 번 삶을 살아볼 힘을 얻기 위해 그곳을 찾는 것이 아닐까.

이밤도 한잔 술에 ‘포장마차’   졸고 있다

서울 신당동 중앙시장에 가면 포장마차 제작부터 주방기구와 식자재 구입까지(왼쪽부터) 포장마차 설비를 원스톱으로 끝낼 수 있다.





주간동아 414호 (p20~21)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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