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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건 총리’는 역할 다하고 있나

중요 국정 현안 ‘멈칫멈칫’ 행보 여전 … 盧 정치 공백 메울 ‘책임 총리’ 멀고 험한 길

  • 김시관 기자 sk21@donga.com

‘고건 총리’는 역할 다하고 있나

‘고건 총리’는 역할 다하고 있나

10월22일 사회 분야 대정부질문 답변 도중 물을 마시는 고건 총리.

고건 국무총리는 11월19일 전북 전주의 한 지방행사에 참석, 부안 방사성폐기물 처리장(이하 방폐장) 설치 여부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발언을 했다.

“주민과 합의만 된다면 주민투표법이 국회에서 통과되기 이전에라도 연내 주민투표가 가능하지 않겠느냐.”

전날까지 정부는 주민투표법과 정밀지질조사, 총선 연계 등의 이유를 들어 주민투표 연내 실시 불가 입장을 밝혔었다. 당연히 파장은 컸다. 총궐기대회를 준비하던 핵폐기장 백지화 핵발전 추방 범부안군민 대책위원회(부안 대책위)는 즉각 기대감을 표했다. 그러나 고총리의 이런 발언은 다음날 번복됐다. 고총리는 20일 국회 예결위 회의장에서 “주민투표법이 제정돼야 부안 문제에 대한 투표가 가능하다”며 말을 바꿨다. 부안 주민과 시위대가 들고일어선 것은 불문가지. 부안 주민들은 “정부를 믿지 못하겠다”며 더욱 강경한 쪽으로 돌아섰다. 언론도 “정부의 안일한 대책이 부안사태를 불러왔다”고 질타했다. 사면초가였다. 고총리는 부안 주민여론이 방폐장 반대 쪽으로 급격히 쏠리던 지난 9월 “모든 문제는 주민과 합의해 진행할 것”이라면서 민관합동 대화기구를 만든 당사자. 고총리가 다른 어떤 현안보다 방폐장 문제에 매달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방폐장 문제는 ‘고냐, 스톱이냐’ 분명한 선택을 요구한다. 그러나 ‘행정의 달인’으로 불렸던 고총리는 이런 상황에서 딱 떨어지는 선택을 하는 데 서툴러 보인다. 그래서일까. 요즘 부안 주민들은 고총리에게 호된 비난을 퍼붓는다.

“못 믿겠다” 부안 대책위 청와대와 직거래 움직임

“별 결정권도 없고 대화할 의지도 없으면서 시간만 끌고 있다”는 게 요지. 더 민망한 것은 부안 대책위가 고총리를 제쳐두고 청와대와 ‘직거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총리 취임 9개월. ‘스마일 총리’의 얼굴엔 요즘 웃음기가 없다. TV 카메라에 잡히는 고총리 얼굴은 굳어 있다. 취임 이후 각계 인사들을 총리공관으로 불러 대화를 나누며 민심을 파악하던 ‘만찬정치’도 잠정 중단했다. 중단 결정을 내린 것이 아니라 여유가 없기 때문이라는 게 총리실측의 해명이다.

고총리는 지난 9개월 동안 ‘안정총리’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주력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개혁대통령과 안정총리와의 만남’을 컨셉트로 잡았고 “부족한 행정경험을 보완해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다음은 노대통령 한 측근의 말.

“사실 고총리를 발탁하는 데에는 많은 반대가 있었다. 그럼에도 노대통령이 고집을 피운 것은 자신의 부족한 행정경험을 고총리가 메워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노대통령은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 국무회의에 배석한 고건 서울시장이 장관들이 풀지 못하는 국정현안을 한두 마디 핵심어로 맥을 짚어내자 “아, 행정이란 이런 것이구나”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안정총리는 국정경험이 없고 여러 면에서 불안했던 노대통령의 ‘칼라’와 어우러지며 빛을 발한 것이 사실이다. 노대통령은 몇 차례 말실수로 스스로 국정혼란을 초래했고 국방과 외교적 문제에 있어 아마추어적인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무게중심을 잡은 것이 고총리였다. 이 때문에 고총리의 존재감은 매우 커 보였다. 노대통령은 그런 고총리에게 애초 책임총리로서 실질적인 ‘파워’를 행사할 것을 요청했다. 청와대와 내각에 새로운 바람을 요구한 노대통령의 요청에 화답하듯 고총리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지난 5월, 고총리는 ‘국정현안 정책조정회의’라는 다소 긴 이름의 회의체를 구성했다. 이 조직은 교육 법무 재정경제 건설교통 행정자치 환경 노동부 장관 등이 참석해 사회적 갈등요인을 안고 있는 사안에 대해 대책을 논의하는 회의체다.

고총리는 초기 이 회의체를 통해 내각을 장악, 컨트롤했다. 총리로서 역할과 위상을 확대할 때에도 이 회의체가 유용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고총리의 설 자리는 좁아지기 시작했다. 특히 책임총리제와 관련, 고총리의 역할이 기대에 못 미친다는 지적이 많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민주당 한 관계자는 고총리 본인을 1차 책임자로 지목한다. 그의 말이다.

‘고건 총리’는 역할 다하고 있나

11월8일 저녁 노동자대회에 참가했던 민주노총 소속 조합원들의 시위.

“2001년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라는 책에서 고총리는 ‘직업관료답게 매사에 조심스럽고 항상 상사의 입장을 깊이 헤아리며 처신했다’고 적었다. 그게 그 사람의 성장동력이기도 하지만 발목을 잡는 덫이기도 하다. 때로는 결단성 있는 자기 고집이 필요한 것이 총리라는 자리다. 이회창 전 총리가 사표를 들고 김영삼 전 대통령(YS)과 맞서는 것으로 비치면서 소신을 평가받지 않았는가.”

치고 나갈 때 치고 나가고 숙일 때 숙여야 하는데 고총리가 이런 정치적 판단에 서툴다는 지적이다. 노대통령의 재신임 문제가 불거진 후 고총리는 소위 책임총리로서의 면모를 보일 기회가 많았다. 당시 현안인 이라크 추가파병 문제와 6자회담 등 그동안 청와대 핵심참모들이 다뤘던 문제들이 고스란히 고총리 손으로 넘어왔다. 행정부를 통할하는 위치상 대통령 재신임 문제가 매듭지어질 때까지 고총리의 국정 관여 정도는 그 이전보다 커질 수밖에 없고 고총리가 활동영역을 넓히더라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총리실 주변에서는 “고총리가 정치력을 극대화할 것”이라는 진단들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고총리는 멈칫거렸다. 당시 한 언론은 이런 고총리의 모습을 ‘좌고우면’이라고 표현했고 총리실 주변에서도 크게 이의를 달지 않았다. 총리실 한 인사는 “정치적 상황이 혼란스럽지만 고총리가 지나치게 나서는 모습을 보일 경우 월권 시비에 휘말릴 우려가 있다”고 해명했다.

노대통령은 강한 정치적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다. 개혁을 표방한 정국운영 스타일도 때로는 즉홍적이라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혼란을 빚을 때가 많다. 이런 노대통령의 스타일은 차분한 고총리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다. 이런 다른 색깔은 때로 노대통령이 고총리를 ‘왕따’시키는 모양새로 표출된다. 10월10일 노대통령이 재신임 선언을 할 당시 고총리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고총리는 나중에 소식을 접하고 “홍두깨로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고총리가 중요한 현안 논의에서 제외된 것은 사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10월21일 국회 본회의장에 출석한 고총리는 토지공개념 도입과 관련, 의원들로부터 “상의가 있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한참 망설이던 고총리는 “부동산 문제를 걱정하는 자리가 여러 번 있었다”고 답했다. 핵심을 비켜간 그의 답변은 사실상 사전논의가 없었음을 시인한 것이다. 총리실 정무팀 한 관계자는 “솔직히 책임총리라는 이름만 있었지, 중요한 사안을 결정할 때 총리와 사전에 상의한 적이 거의 없다”고 전했다.

노대통령 재신임 선언 이후 고총리에게는 과거보다 훨씬 많은 주문과 기대, 우려가 쏟아진다. 언론과 국민들은 노대통령의 정치적 공백을 그가 메워주길 기대했다. 고총리도 이런 언론과 여론의 요구에 부응하듯 지난 9개월 동안 지금까지 한 말보다 훨씬 더 많은 말을 재신임 정국 이후 쏟아내며 의욕을 보였다. 고총리는 10월 말 국정혼란의 책임에 대해 “대통령과 측근, 정부가 잘못했다”고 말했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공전하는 대형국책사업과 화물연대 파업사태 등의 책임 문제를 표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통령의 일부 부적절한 표현에 대해 묻는 질문에 “나라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라고도 했다. 국정이 난맥상을 보일 때마다 “총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들어야 했던 고총리로서는 큰 결단을 내린 후의 발언이었다. 의전총리가 아닌 책임총리로 거듭나려는 고총리가 갈 길은 멀고도 험해 보인다.



주간동아 2003.12.04 412호 (p22~24)

김시관 기자 sk2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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