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03

2003.10.02

국감 발목 잡힌 기업들 ‘죽을맛’

사실 관계 확인 않고 무차별(?) 증인 채택 … 의원 찾아 사정 설명하면 슬며시 ‘청탁’

  • 윤영호 기자 yyoungho@donga.com

    입력2003-09-24 14: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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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감 발목 잡힌 기업들 ‘죽을맛’

    지난해 10월4일 국회 재경위의 산업은행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엄낙용 전 산업은행 총재(왼쪽)가 산업은행의 현대상선 4000억원 대출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이번에 국회 정무위원회(이하 정무위) 소속 의원들을 만나보고 그래도 지금까지 주로 접촉했던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이하 과기정위) 소속 의원들에게 순수한 측면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정말 정무위 소속 일부 의원들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통신업체는 앞으로 회사 이름을 모두 ㈜동네북으로 바꿔야 하는 것 아니냐는 탄식이 절로 나왔습니다.”

    최근 이동통신업체 사장들의 증인 채택 문제로 국회 정무위 소속 의원들을 만나본 이동통신업체 관계자의 소감이다. 이 관계자는 “다른 이동통신회사 관계자들을 만나 사정을 들어봤더니 똑같이 당했더라”면서 “그나마 서로 만나 동병상련의 심정을 확인한 것을 위안 삼았다”고 털어놓았다.

    이동통신업체 관계자들 사이에 이처럼 비상이 걸린 것은 과기정위와 정무위가 각각 SK텔레콤 표문수 사장, LG텔레콤 남용 사장, KTF 남중수 사장 등 이동통신 3사 대표를 국정감사(이하 국감) 증인으로 채택했기 때문. 정무위의 증인 채택 이유는 발신번호표시(CID) 요금 때문이고, 과기정위는 번호이동성 및 010 번호 통합 문제 등 때문이다.

    번호이동성 및 010 번호 통합 문제는 이동통신 3사간 이해관계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사안. 이 때문에 이동통신업체 관계자들은 과기정위가 당연히 자사 대표들을 국감 증인으로 부를 것으로 예상했다. 번호이동성 제도는 이동통신 가입자가 번호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사업자를 맘대로 바꿀 수 있는 제도고, 번호 통합 문제는 011, 016, 019 등의 번호를 모두 010으로 통합한다는 내용이다.

    정무위에 덴 통신업체들 “동네북으로 이름 바꾸자”



    문제는 정무위였다. 정무위가 이동통신 3사 대표를 증인으로 채택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이동통신업체는 굳이 따지자면 정보통신부를 관할하는 과기정위 관할이다. 그러나 정무위는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휴대전화 CID가 기본 서비스인데도 불구하고 그간 별도의 요금을 부과한 것에 대해 이동통신사의 담합이 있었는지 여부를 따지겠다는 입장이다. 요금 담합 행위 단속은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 업무이기 때문에 정무위가 나섰다는 얘기다. CID 요금은 10월1일부터 월 2000원에서 1000원으로 인하된다.

    그럼에도 정무위 의원들이 이동통신회사 대표를 증인으로 채택한 것을 두고 뒷말이 무성하다. 정무위 소속 한 민주당 의원도 “이동통신 3사 대표를 증인으로 신청한 한나라당 의원들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국감을 빌미로 기업에 ‘압력’을 넣기 위한 차원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동통신회사 관계자들은 자사 대표들의 국감 증인 채택으로 하반기 사업 일정에 차질을 빚을 수도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특히 해외출장 일정에 차질이 생길 것을 우려한다. SK텔레콤 표문수 사장은 10월6~15일까지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릴 예정인 국제전기통신연합(ITU) 컨퍼런스 및 전시회에 참가할 계획이다. KTF 남중수 사장도 국감 기간 중에 해외 IR(기업설명회) 일정이 예정돼 있다. KTF 관계자는 “국회가 기업의 발목을 잡는다는 소리는 안 나오게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국감 발목 잡힌 기업들 ‘죽을맛’

    정무위와 과기정위에서 국감 증인으로 채택된 표문수 SK텔레콤 사장, 남용 LG텔레콤 사장, 남중수 KTF 사장(위부터).

    이동통신회사뿐 아니라 대부분의 회사들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자사 대표가 국감 증인으로 채택되는 것만은 막으려 한다. 자사 대표가 국회로 불려가 하루종일 대기하다 의원들의 호된 추궁을 견뎌내야 하는 것을 보는 것도 민망하지만 무엇보다 ‘큰 잘못이나 저질러 대표가 국회에 불려 다니는’ 회사라는 오명을 쓸 것을 우려하기 때문.

    당연히 증인 채택을 주도한 의원들을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는 등 ‘로비’를 할 수밖에 없다. 의원들의 ‘저의’가 드러나는 것도 이 과정에서다. 한 이동통신업계 관계자의 증언.

    “어떤 의원이 증인으로 불렀는지 뻔히 알고 찾아갔는데도 처음에는 ‘나는 안 했는데…’라고 시치미를 뗀다. 그래도 계속 회사 사정을 설명하면 ‘고생이 많겠다’면서 위로까지 해준다. 그러고 나서 방을 나설 무렵 본론을 꺼낸다. ‘그런데 말이야, 사실은 이런 애로사항이 있다’는 식이다. 아무리 국회의원이라고 해도 기업을 이렇게까지 우롱해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악명 높은 의원들은 뻔한 내용 몇 번씩 우려먹어

    청탁 내용도 가지각색이다. 그러나 어떤 행사에 ‘후원’해달라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물론 의원이 알고 있는 하청업체를 잘 봐달라는 청탁도 있다. 직접 돈을 달라는 얘기는 아니지만 실제로 돈이 들어가는 일이 대부분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이런 청탁에 대해 ‘노’라고 말할 수 있는 기업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대국회 ‘로비’ 업무를 담당하는 한 대기업 관계자는 “기본적으로 국회 활동을 존중해야 하지만 기업을 상대로 한 국감 활동은 그 의도가 순수하지 않게 비쳐 뒷맛이 개운치 않을 때가 많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무엇보다 사실 관계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기업 관계자들을 증인으로 채택하는 것은 속 보이는 일 아니냐”고 반문했다.

    올해 정무위의 국감 증인 채택 과정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졌다. 정무위는 대형 할인점의 불공정거래행위와 관련해 롯데마트 이철우 사장, 홈플러스 이승한 사장, 이마트 구학서 사장을 증인으로 채택했다. 이에 대해 신세계 관계자는 “롯데의 경우 이인원 총괄대표를 놔두고 롯데마트사업본부 이철우 대표를 증인으로 채택했는데, 신세계의 경우 이마트사업본부 대표가 있음에도 왜 구학서 총괄사장을 증인으로 채택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심지어는 공공연히 알려진 대기업들의 문제를 물고 늘어져 ‘로비’를 유도하는 경우마저 있다는 게 기업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삼성자동차 채권 회수 문제나 삼성 이건희 회장 외아들 재용씨에 대한 편법 증여 의혹, 현대자동차의 계열사 편법 지원 의혹 등은 의원들이 그동안 몇 차례씩 우려먹은 단골 메뉴다.

    국감 발목 잡힌 기업들 ‘죽을맛’
    기업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기업들을 괴롭히는 악명 높은 의원들 리스트가 떠돈다. 16대 국회의 경우 올 초 비리 혐의로 구속된 K의원이 이 리스트의 앞줄에 이름을 올렸다. K의원의 경우 2000년 9월 공정위가 군납 유류 구매 입찰 과정에서 담합을 통해 부당이득을 취한 혐의로 SK㈜ LG칼텍스정유 등 국내 5개 정유사에 대해 1901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한 것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정유업계 관계자들이 지금도 K의원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

    15대 국회에선 또 다른 K의원이 악명 높았다. S그룹 관계자들은 K의원에게 크게 데인 경우. S그룹 관계자는 “K의원은 S그룹이 중소기업 영역을 침해했다며 공정위를 통해 집요하게 관련자료를 요청해왔는데, 나중에 수천만원의 ‘후원금’ 제공을 통해 겨우 입막음을 할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흥미로운 점은 기업 관계자들이 오히려 의원들의 이런 행태를 이해할 수도 있다는 반응을 보인다는 점.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재벌 그룹의 고위 임원은 “의원들이 당선을 위해 엄청난 돈을 쓰는 현실을 감안하면 당선된 후 기업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는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정치권이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분명해지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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