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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2003 우리들의 추석

그래도 가족사랑 켜켜이 쌓인다

“신경전 생각만 해도 골치 아프고 피곤? … 지내고 나면 둥근 달만큼 가슴이 뿌듯”

  • 이현수/ 소설가 hyunsu415@hanmail.net

그래도 가족사랑 켜켜이 쌓인다

그래도 가족사랑 켜켜이 쌓인다
빗속에 여름 한 철 다 보내고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하늘이 푸르러지고 바람은 소슬해졌습니다. 지난 여름은 더위보다는 습기와 싸우느라 지쳐 늘어졌었지요. 누구라도 8월의 달력은 넘기기가 힘듭니다. 가을로 접어드는 길목에 추석 명절이 떡하니 버티고 있기 때문이지요. 만산홍엽, 쓸쓸한 가을의 정취를 제대로 느끼려면 일단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난 후에나 가능합니다.

“1년에 한바탕 홍역 치른다고 죽는 거 아니잖아”

추석을 맞이하는 곳이 시골이든 서울이든, 가족이 많든 적든 간에 추석은 성인 남녀 모두에게 번거로운 행사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도로란 도로는 또 한 번 차들로 빼곡하게 뒤덮일 것입니다. 무려 한 달 전부터 명절증후군에 시달리는 왕초보 새댁도 있을 것이고, 제사 80번 치르며 팔뚝만 굵어졌노라는, 아무 거칠 것 없어 보이는 결혼 16년차 프로 아줌마도 일주일 전부터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할 것입니다.

남자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추석 연휴 동안 본가와 처가 양쪽을 뛸 수밖에 없는 ‘불행한’ 처지에 놓인 남성들도 많습니다. 정체되는 도로에서 짜증내는 아내와 아이들을 다독이며 머릿속으로는 계산하기 바쁩니다. 처가에서 화투판이 벌어질 때 장인이나 손위 처남에게 얼마를 잃어줘야 하나, 더듬더듬 계산하는 ‘초짜’ 사위들도 있겠지요. 처가에 가면 장인과 처남들이 방 한 칸씩을 차지하고 있는 바람에 사나이 대장부 폼 안 나게 부엌에나 얼쩡거리다 거실 한켠에 놓인 소파에 자리가 나기 무섭게 엉덩이를 붙이고 있자면 처량 맞기 이를 데 없습니다. 부엌에서 종종걸음 치는 처남댁들에게 무한한 동질감과 연대감을 느끼는 것도 이때입니다.

본가에서는 잠시도 부엌에서 떠나지 못하고 죽기 살기로 일만 해서 자신의 콧등을 시큰하게 만들던 아내가 친정에 오면 180도 달라집니다. 손끝에 물이라도 튈세라 마른 일만 살살 하면서 맛이 있네 없네 음식 타박은 기본이요, 거기다 한 술 더 떠 김서방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그간에 저지른 비리들을 잘도 일러바칩니다.



“쯧! 네가 오죽했으면…, 저게 언제나 철이 들꼬.”

말로는 사위를 두둔하는 척하지만 자신의 뒤통수에 꽂힌 장모의 눈길이 곱지 않다는 것쯤은 아무리 둔한 사위도 다 압니다. 장모에 이어 딸의 철없음을 나무라는 장인의 헛기침 소리에도 자신에 대한 서운함과 마뜩찮음이 묻어 있다는 걸 사위들은 즉각 눈치챕니다. 사위는 백년손님이어서 장모가 버선발로 뛰어나와 반기고 장인이 뒤란에서 씨암탉을 잡는 일은 이제 옛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1년 열두 달 아내에게 잘하지 않고는 양념치킨 뒷다리 하나도 얻어먹기 어렵다는 것을 요즘 사위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가족사랑 켜켜이 쌓인다

추석 연휴 마지막 날엔 찜질방에서 피로를 푼다. 그래, 전생의 업을 풀었다 치자. 비로소 가슴이 활짝 열린다.

사위의 불편이 이런 거라면 며느리들의 불편과 노고는 이루 다 말로 하지 못합니다. 이 땅의 모든 여성들은 한 집안의 며느리 신분일 때는 재투성이 신데렐라 신세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추석 무렵이면 잡지나 신문에서는 여자들이 우아하게 한복 차려입고 송편을 빚는 사진들이 꼭 실리게 마련이지요. 날이 날이니 만큼 한복 치맛자락 끌려가며 지내고 싶지 않은 여자가 어디 있겠습니까만 며느리에게는 언감생심, 그림의 떡이지요. 추석 명절, 며느리의 복장은 일하기에 불편하지 않은 바지이거나 무릎 나온 트레이닝 바지이기 십상입니다. 한복은 딸이나 나이 든 아내에게만 해당되는 옷차림입니다.

집 안팎으로 뛰어다니거나, 부엌에 박혀서 씻고 닦고 만들고 차리고를 반복해야 하는 명절의 일거리들. 이제 차례가 끝났구나 싶어 허리 좀 펼라치면 여기저기서 커피 달라고 성화를 부립니다. 명절의 기름진 음식들이 죄지, 입이 죄는 아닙니다. 부엌 바닥에 널린 제기들 씻을 틈도 없이, 음식 찌꺼기 묻은 교자상 위에 커피잔 꺼내놓으랴, 물 끓이랴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나마 대가 센 요즘 며느리들은 남편에게 들으라는 식으로 한마디 하기도 하지요.

“커피, 하루 좀 참는다고 죽는 거 아니잖아.”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시어머니의 호통이 날아옵니다.

“뭐 한 게 있다고! 옛날처럼 다식을 하나, 식혜를 하나, 증편을 만드나. 그 알량한 송편마저도 샀지 않느냐.”

듣고 보니 정말 그렇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허리에 깁스를 할 정도로 며칠 밤낮 정신 없이 일했는데 한 게 없다니요? 열받습니다. 한켠에서는 커피 마시고, 다른 한켠에서는 마무리 설거지를 하는 그 즈음이면 집집마다 슬슬 갈등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사소하게 뭔가 불편한 기미나 얼굴 붉히게 되는 일이 발단이 되어 해묵은 가족 간의 갈등으로 비화되게 마련이지요. 큰소리 내며 한판 싸우거나, 쉬쉬 덮어두거나, 용케 뒤로 물러서서 위기를 넘겨도 속이 더부룩하기는 마찬가집니다. 돌아오는 차 안에 앉아 있으면 더부룩함의 원인이 가족간의 크고 작은 마찰 때문인지 기름진 명절음식 탓인지 헷갈리기 일쑤지요. 아, 고아로 자란 똑똑한 남자와 결혼할걸. 이 땅 며느리들의 때늦은 후회가 시작됩니다.

그래서 추석 쇠고 돌아오자마자 진짜 가족이 없는 집에 시집 간 친구나 홀로 사는 친구들에게 전화합니다. 넌 편했겠다, 호젓해서 좋았겠다 등등. 그러나 친구는 조금도 편안했던 것 같지 않습니다. 명절날 갈 데 없는 것처럼 서글픈 일이 없다고, 명절날 기름냄새 풍기지 않는 집이 어디 사람 사는 집이냐며 도리어 하소연합니다. 더러 부모 잘 만나 한 재산 넉넉히 물려받았거나 일찍 출세해 잘사는 친구들은 명절 연휴도 폼나게 보냅니다. 해외로 골프 원정을 가거나, 피서지에서 차례를 지내는 팔자 좋은 친구들도 더러 있습니다.

“미친놈, 때가 어느 땐데” 하고 속으로 욕을 해봐도 뭔가 굉장히 억울한 느낌이 듭니다. 이럴 땐 잽싸게 다른 친구를 찾습니다. 팔자 기구해서 종갓집으로 시집 가 추석날 송편만 200접시 차려내야 하는 그런 친구들의 신세한탄을 듣고 있노라면 내가 겪은 일은 새발의 피였다 싶어 더부룩했던 속이 뚫리는 기분입니다.

남자고 여자고 연휴 마지막날은 찜질방이나 목욕탕에서 찌뿌드드한 몸을 풉니다. 뽀얀 수증기가 눈앞을 가리는 탕에 들어가 앉아 있노라면 이런저런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결혼생활 17년에 명절, 기제사만 80번. 한 번 차릴 때 20인분의 밥을 해댔으니 그간 푼 밥그릇 수만도 1600그릇. 그래, 그 수만큼 세상에 맺힌 고를 풀었다 생각하자. 그 수만큼 내가 진 전생의 업을 풀었다 생각하자. 단단히 뭉쳤던 어깻죽지가 풀리면서 마음도 넉넉해집니다. 사는 게 다 그런 것 아닌가. 목욕탕의 열기와 습기에 땀구멍이 확장되면서 배포 커지고 마침내 가슴도 활짝 열립니다.

집에 돌아와 본가나 처가에서 가져온 가방을 열면 1년 내내 농사지어 올려보낸 남루한 것들이 고개를 내밀지요. 그것들을 보면 약간의 불안과 체증, 약간의 짜증과 티격태격 다툼이 언제 그랬나 싶게 꼬리를 감추고 사라집니다. 그럭저럭 올해도 해냈구나, 이상야릇하게 뿌듯해집니다. 이것이 명절의 이면이 아닌지요. 그러면서 또 한 번의 명절을 맞을 힘을 얻는 게 아닌지요. 둥근 보름달을 보며 그래도 가족뿐이다, 저절로 중얼거리게 되는 게 아닌지요.



주간동아 401호 (p38~40)

이현수/ 소설가 hyunsu41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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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67호

2022.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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