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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2003 우리들의 추석

세상의 갈등 안방서 ‘충돌’

세대·사회·가족 문제 한꺼번에 분출 … 겉치레 줄이고 ‘축제와 해방의 장’ 만들어야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세상의 갈등 안방서 ‘충돌’

세상의 갈등 안방서 ‘충돌’

매해 추석이 다가오면 사람들은 고향집을 찾아 ‘민족 대이동’을 벌인다.

추석은 전쟁이다. 아니, 명절은 전쟁이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형님과 아우, 큰동서와 작은동서가 한자리에 모이는 순간 곳곳에서 갈등과 분쟁이 시작된다.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가슴에서 피를 쏟는다. 피아도 없고 승패도 알 수 없는, 결국 모두를 피해자로 만들어버리는 긴긴 전쟁. 그래서 명절이 끝나는 순간,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는 사람들은 다음 명절까지의 한 고비가 지나갔음을 안도하는 큰 숨을 내쉰다. 지나친 비약인가.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려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행운아다.

1999년부터 ‘웃어라 명절’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한국여성민우회의 인터넷 설문조사에 따르면 ‘가까운 친지나 친구들을 볼 수 있어 명절이 즐겁다’고 답한 응답자는 전체 여성의 25%, 남성의 16%에 불과했다. 남성의 75%는 ‘쉴 수 있기 때문에 명절을 기다린다’고 답했고, 여성의 30%는 ‘명절의 좋은 점은 단 한 가지도 없다’고 말했다. 여성의 66%, 남성의 8%는 ‘명절은 노동절일 뿐’이라고 답하기도 했다. ‘온 가족이 모여 정담을 나누는 따뜻한 민족의 축제’라는 명절의 이미지는 이미 상당부분 환상에 불과한 것임을 보여주는 결과다.

대면 인터뷰 결과도 마찬가지다. 한 30대 여성은 최근 남편이 집을 판 것이 부담스러워 시댁에 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결혼 전에 남편이 마련한 집을 최근에 팔았거든요. 큰아들이라 시댁 식구들이 그 집에서 함께 모여 살았는데 (당장 돈이 필요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 그런데 (그 집 판 돈을) 자기들에게 나눠주지 않았다고 (시동생과 동서들이) 얼마나 잡아먹을 듯이 따지는지 한바탕 시끄러웠죠.”

“차라리 없으면 좋겠다” 사회 곳곳서 ‘명절 포비아’



세상의 갈등 안방서 ‘충돌’

남녀노소 모두가 즐거운 추석을 만들기 위해서는 현실에 맞게 가족 문화를 바꿔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번 명절에 얼굴을 대하면 그 이야기가 또 나올 것이 두렵다는 고백이다.

결혼한 지 갓 1년이 지난 한 20대 여성은 동서와의 갈등 때문에 명절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저에겐 형님 한 분이 계세요. 결혼하고 집들이할 때부터 저희 집 크다고(24평) 이젠 시댁 모임도 여기서 하고 부모님 제사도 여기서 지내자더군요. 그냥 웃고 넘겼죠. 여긴 지방이라 집값이 싸요. 대출 끼고 산 거라 지금 그 돈 갚느라고 아이도 못 낳고 있고요. 그런데 그 후부터 볼 때마다 항상 집 커서 좋겠다는 이야기를 꺼내는 거예요. 돈 쓸 때도 ‘집 크기’ 운운하며 왜 더 안 내나 하는 눈치를 주죠. 사실 저는 목표가 32평이라 화장품 하나, 옷 한 벌 제대로 안 사고 악착같이 사는 건데. 쓸 거 다 쓰고 살면서 모일 때마다 돈 가지고 말하시니까 너무 짜증이 나요. 얼굴 볼 생각하니 벌써부터 싫네요.”

동생의 카드빚을 대신 갚아주라는 부모의 성화에 골머리를 앓는 중년 신사, 왜 결혼을 안 하냐는 어른들의 타박이 듣기 싫어 가족모임에 가지 않겠다는 노처녀 노총각, 학교 졸업 후 직장을 잡지 못해 명절을 피하고 싶어하는 취업 재수생들까지. ‘명절 포비아’는 사회 곳곳에 널리 퍼져 있다.

세상의 갈등 안방서 ‘충돌’

명절 때마다 반복되는 가족 사이의 충돌의 피하기 위해서는 가까운 사이일수록 적정한 거리를 두는 '고슴도치 딜레마'를 기억해야 한다

최근 몇 년 사이 명절 무렵만 되면 연휴 내내 가사노동과 반여성적 가족 분위기에 상처 입는 젊은 주부들의 ‘명절 증후군’ 이야기가 매스컴을 타왔다. 그때마다 반복된 것이 ‘가정의 평화를 위해 고작 그 며칠을 참지 못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반박이었다. 한편에서는 명절 문화를 바꾸기 위해 온 가족이 함께 가사노동을 하자는 ‘명절 문화 개선 캠페인’이 시작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의 양상은 이때와 분명히 다르다. 가사노동이 아닌, 명절 분위기 전반에 대한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시어머니와 남편은 쉬운 줄 아느냐. 똑같이 눈치보고, 똑같이 힘들다’는 탄식이 나오고, 젊은이들은 명절을 외면한다. 가족모임 대신 해외여행을 떠나는 이들이 늘고, 명절에 맞추어 출장을 가는 직장인들도 적지 않다. 심지어 명절이면 끊이지 않고 벌어지는 가족들간의 다툼에 대비하기 위해 경찰들이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일가 친척간 재산싸움 급증 … 천덕꾸러기로 전락

“추석 때면 사건사고가 줄어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늘어요. 음주사고, 폭행사고…. 원인이야 대개 일가친척 간 재산다툼이지요”라는 한 경찰관의 얘기를 듣노라면 ‘이렇게 모두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명절이라면 왜 우리는 명절을 지내야 하는가’라는 의문까지 들게 된다.

실제로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30대 직장인은 “이제 우리에게 명절의 의미는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기 위해 ‘모여주는 것’ 정도뿐”이라며 “지금의 20, 30대가 어른이 되면 명절 자체가 사라질 것”이라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왜 명절은 이처럼 ‘천덕꾸러기’로 전락하고 만 것인가. 그것은 서로 다른 삶의 공간에서 살아오던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순간, 그곳에서는 이 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가 집약적으로 터져나오기 때문이다.

‘가족과 성 상담소’ 유경희 소장은 “명절 문화를 논하는 것은 쉽지 않다. 갈등의 원인은 명절 그 자체가 아니라 양성 불평등, 고부 갈등, 신용불량, 젊은층의 미취업 등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가족주의적인 틀로 해결하려 할 때부터 모든 구성원들 사이에서 갈등과 불화가 생기고 만다”라고 분석했다.

웹진 ‘@ZOOMA’의 강시현씨도 “많은 부부들이 명절을 전후해서 싸웠을 것이고 이것이 쌓여서 이혼으로까지 가는 경우도 많을 것”이라며 “명절 당시만을 문제삼을 것이 아니라 불평등한 남녀관계, 가족제도, 제사제도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지 않는 한 지금의 명절 담론은 한계가 많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현대 한국사회의 모든 갈등을 수면 위로 끌어내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버리는 명절은 이제 ‘애물단지’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는 것일까. ‘가족 모임’은 모든 가족 구성원들의 공격을 받다 결국 자연스레 소멸해버리고 말 것인가.

그러나 이처럼 비관적이 되는 것은 아직 적절치 않다. 명절과 가족이 우리 사회에서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이 적지 않다고 믿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지금의 명절 문화가 갖고 있는 폭력성이 극복된다면, 그래서 가족 구성원 모두를 위한 명절이 된다면 그것은 충분히 가치 있는 축제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이화여대 사학과 이배용 교수는 “농경사회에서 명절은 자연의 변화를 체험하며 주위의 모든 것에 감사하고, 화합하는 자리였다. 특히 여성들은 추석 명절 동안 엄한 유교 규율에서 벗어나 강강수월래를 즐기고 친정 식구들과 ‘반보기’를 하며 휴식을 취했다”며 “급격한 현대화의 결과, 현대인들이 이 같은 전통에서 멀어지면서 명절 본연의 정신이 왜곡되기 시작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세상의 갈등 안방서 ‘충돌’

명절 때마다 반복되는 가족 사이의 충돌의 피하기 위해서는 가까운 사이일수록 적정한 거리를 두는 '고슴도치 딜레마'를 기억해야 한다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인 이순구씨도 한 명절 관련 토론회 발제문에서 “원래 명절은 생산 노동에 종사하는 지역민들의 공동체적 성격을 띠는 축제의 장이었으며, 혈연적 성격을 띠는 제사가 강화되고 차례가 명절의 중요 행사로 자리잡게 된 것은 개항 이후 근·현대의 일”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씨에 따르면 요즘 대부분의 가정에서 ‘명절 갈등’을 일으키는 주범인 부계가족제도가 확립된 것도 17세기 이후의 일이다.

이 때문에 현대사회에 맞는 명절의 의미를 찾고, 명절이 본질적으로 지닌 ‘축제와 해방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복원하기 위한 노력이 시작돼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계명대 철학과 이진우 교수는 “오자마자 떠나고 싶어하는 자식들의 표정, 돌아오는 차 안에서 종종 일어나는 부부 사이의 말다툼, 성한 곳 하나 없으면서도 짐짓 건강한 체하며 또 다음 명절을 기다리는 늙은 부모님들의 눈길이 오늘 우리의 명절 풍경”이라며 “‘민족 대이동’과 같은 무의미한 통과의례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변화된 사회에 맞게 가족간의 친밀성을 키워나가려는 노력이 더 중요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소설가 김별아씨도 “사람들은 명절 때 모이면 습관처럼 형식을 답습하고 산더미 같은 음식을 처리하느라 정작 세상에서 하나뿐인 ‘가족’들이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지 못한다”며 “불필요한 노동과 겉치레를 줄이고 한자리에 모여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명절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 길일 것”이라고 제안했다.

지나친 가족애가 오히려 가장 큰 상처로 남는다면? 신경정신과 전문의 양창순 박사의 조언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양박사는 ‘고슴도치 딜레마’를 언급하며 “가까운 사이일수록, 설령 가족일지라도 살아가면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서로 상대방의 가시에 찔리지 않으면서도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절묘한 거리를 발견해 그 거리를 절대적으로 유지하는 고슴도치의 지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도 유효하다”고 말했다. ‘서로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도 애정을 잃지 않는 거리를 발견하는 것’. 이번 추석을 행복하게 보내고 싶은 모두가 함께 풀어야 할 과제다.





주간동아 401호 (p32~36)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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