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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삶

정신질환과 싸우며 편견 퇴치 ‘뷰티풀 마인드’

한국의 존 내시 윤석희

  •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정신질환과 싸우며 편견 퇴치 ‘뷰티풀 마인드’

정신질환과 싸우며 편견 퇴치 ‘뷰티풀 마인드’

서울시립 고양정신병원 앞에 선 윤석희씨.

‘북괴가 나를 납치해 스파이로 만들려 한다. 잡혀가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지나가던 개도 웃을 만한 망상이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그 망상은 그에겐 너무나 진지한 현실,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탈출구는 죽음뿐. 포크로 가슴을 찌르고 칼로 손목의 동맥을 그어댔다. 스카프로 목을 매 눈은 개구리처럼 튀어나왔고, 얼굴은 퉁퉁 부었다. 서른두 살의 영문학도는 그렇게 매일 죽어가고 있었다.

한국장애인협회 회장 윤석희씨(55). 정신분열증 환자인 그는 그러나, 불사조처럼 살아남았다. 수십 차례의 자살 시도와 다섯 차례의 정신병원 입원에도 그는 굴하지 않았다. 스무 살 때부터 시작된 정신분열증, 공황장애의 악령과 싸워온 지 35년, 그는 암울한 상황에서도 공부를 계속했고, 결국 꿈에도 그리던 대학 강단에 섰다(명지대, 부경대 영문학과). 비록 심각한 망상증세는 사라졌지만 아직도 그에겐 외출을 꺼리는 정신분열증 음성증세와 공황장애가 일부 남아 있다.

재수 시절 발병 목숨 담보 35년간 전쟁

그에게 정신질환은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없애야 할 ‘난적’이었다. 이마저도 자신이 정신병자임을 스스로 인정한 서른두 살이 돼서야 안 사실이다. 정신질환과 싸워 이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데만 12년이 걸린 셈. 하지만 그 전쟁의 승패는 쉽게 나지 않았다. 불시에 찾아오는 정신분열증(망상증)과의 전쟁에서 패할 때면 어김없이 정신병원에 실려가야 했다. 그리고 이겼을 때는 공부를 했다. 학생 때도 그랬지만 대학강사가 된 후에도 그는 자신이 정신질환자임을 숨기지 않았다. 아니 숨길 수가 없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정신병자임을 밝히고 다녔다. 혼자의 힘만으로는 정신질환과의 싸움에서 승산이 없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던 터. 정신질환을 숨기는 것은 질환을 악화시키고, 끝내는 자신을 죽이는 행위였다. 윤씨는 스스로를 가리켜 “운이 좋은 정신질환자”라고 말한다. 정신질환을 악성 전염병처럼 여기는 세상에서, 정신질환자라는 사실을 밝히고 산다는 것은 크나큰 모험이다.

하지만 윤씨는 지난해 초 그렇게 좋아하던 대학강사 생활을 13년 만에 그만뒀다. 동료 정신질환자들을 위한 재활 강의에 좀더 충실하고 싶었기 때문. 1998년부터 국립정신병원과 서울시립정신병원에서 정신질환 재활 강의와 프로그램을 진행한 지 어언 4년째. 윤씨는 이미 정신질환자와 그 가족에게 밝은 등대가 되어 있다. 그의 처절한 정신질환 투병기는 정신질환자에게 그 자체가 희망이요, 치료제다. 자신에 대한, 미래에 대한, 그리고 사회에 대한 절망은 그 어떤 약물이나 처방도 무력화하고 환자 자신을 황폐화한다는 사실을 윤씨는 경험으로 체득해왔다. 그런 그의 강의가 환자와 환자 가족들에게 한 줄기 빛으로 다가간 것은 당연지사. “우리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희망은 그 어떤 약물보다 강한 치료 효과를 발휘했다.



이런 그의 이력 때문인지 그는 환자 가족과 의료진들 사이에서 한국판 ‘존 내시’라고 불린다. 존 내시,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미국의 천재 수학자이자 ‘균형이론’으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인물. 윤씨를 영화 ‘뷰티풀 마인드’로 잘 알려진 그에게 비유하는 이유는 젊은 시절, 같은 망상성 정신분열증을 심하게 앓았고(내시의 경우 소련의 스파이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망상), 공부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천재성이 정신질환을 불러왔다는 점 등 인생유전의 많은 부분이 서로 닮아 있는 까닭. 심지어 불타는 향학열로 정신분열증을 극복했다는 점과 서슬 퍼런 반공 이데올로기와 냉전논리에 상처를 받은 점도 일치한다.

정신질환과 싸우며 편견 퇴치 ‘뷰티풀 마인드’

서울시립 고양정신병원에서 정신질환 재활 프로그램을 진행중인 윤석희씨.

윤씨가 정신분열증 현상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치른 입시에서 지원한 서울대 화학과에 떨어지면서부터. 4남매가 모두 경기고와 경기여고를 나온 엘리트 집안에서 자란 그는 재수 시절부터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다.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지 못한 것이 모두 하느님의 탓이라며 욕을 하고 다니고 수녀처럼 옷을 입고 다녔다. 정신분열증의 한 증상인 조정망상 증세가 시작된 것이다. 다음해 서강대 사학과에 입학한 그는 결국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정신병원을 들락날락한다. 조정망상 증상은 더욱 심해져 심지어 교수(신부)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며 난리를 피우기까지 했다. 수개월씩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기를 반복하면서 그는 점점 무기력해졌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윤씨는 공부만큼은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입원해 있으면서도 영어공부를 계속한 그는 결국 명지대 사범대 영문과 2학년에 편입해 76년 졸업장을 따냈다. 물론 이때도 정신질환 증세는 계속됐다.

대학강사 접고 장애인협회장으로 변신

그의 정신분열증이 최고조에 다다른 것도 바로 이즈음.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온 그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과 자기를 어떤 식으로든 연관지어 생각하는 관계망상증에 시달린다. 북한군이 자신을 납치하려 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힌 것도 바로 이때다. 그는 끊임없이 자살을 시도한다.

그러던 윤씨가 이런 망상증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32세 때 국립정신병원에 수용되면서부터. 어떤 약을 먹고 난 후부터 그의 망상증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8년 동안의 회복기를 거치는 동안 그는 쉬지 않고 공부했다. 영문학과 대학원에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한 차례의 낙방을 거쳐 대학원에 들어갔을 때 그의 나이는 이미 불혹. 43세에 석사학위를 딴 그는 44세의 나이에 강단에 섰다. 그리고 48세 때에 박사 코스를 밟기 시작했다.

정신질환과 싸우며 편견 퇴치 ‘뷰티풀 마인드’
“강의를 듣거나 강의를 하다가도 갑자기 불안하고 초조해지기 시작하면 어디에든 누워야 했기 때문에 양호실이 어디 있는지부터 알아두어야 했죠.” 망상증상은 사라졌지만 공황장애와 정신분열증 증세가 일부 남아 있어 공부를 하는 것도, 강의를 하는 것도 쉬운 노릇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순간만 참고 싸워 이겨내면 뿌듯하고 보람찬 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설렘으로 이 모든 것을 이겨냈다.

대학강사의 매력에 푹 빠져 있던 그가 환우들을 돕기 시작한 것은 우연히 국립정신병원 재활봉사단에 참가하면서부터. 뼈저린 재활 경험이 녹아든 그의 강의는 환자와 환자 보호자에게 진정한 안식을 가져다 줬고, 그는 곧 정신질환자의 가장 가까운 벗이 될 수 있었다. 2002년 10월 그가 한국장애인협회 회장으로 추대된 것도 바로 그런 연유.

“정신질환자가 누구에게 해를 입히거나 자살을 했다고 하면 그 사람이 왜 정신질환에 노출됐는지에 대해서 고민하거나 그런 환경에 놓인 이들을 따뜻하게 안아줄 생각은 하지 않고, 정신질환자 전체를 벌레 취급하는 것은 사회적 편견일 뿐입니다. 정신질환자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사람은 처방전만 내미는 의사가 아니라 힘들고 괴로울 때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진정한 ‘지지자’입니다.” 이제 그는 한 정신질환자 단체의 회장으로서 사회적 편견과의 싸움에 나선 투사로 변신중이다. 정신질환자라는 이유로 소외받지 않기 위해 항상 웃고 다녔다는 그의 얼굴에는 이제 자연스런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정신질환자를 차별하지 않는, 그리고 정신질환자가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모든 사람들에게 그가 던진 한 마디 말은 “뷰티풀 마인드를 갖자”는 것이다.



주간동아 396호 (p52~53)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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