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행 제도상 정치헌금 수수와 알선수재는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분석도 있다. 굿모닝시티와 관련, 돈을 주고받은 윤창열씨(오른쪽)와 정대철 의원.
민주당 정대철 대표가 7월24일 저녁 한 모임에 나타나 쇼핑몰 굿모닝시티측으로부터 4억원을 받은 혐의로 사전구속영장이 청구된 것과 관련, 소회를 토로하기 시작했다. 그는 “내가 지금 (검찰에) 들어가면 신당이 날아가기 때문에 신당 문제가 마무리된 후에 검찰에 출두하겠다”는 뜻을 밝히면서도 알선수재 혐의에 대한 법조문 자체를 조심스럽게 문제삼았다. 동석한 김상현 의원은 “여론이 악화되기 전에, 적어도 7월 말 안에는 검찰에 출두하는 게 좋겠다”고 거들었다. 정대표가 말을 이었다.
“가령 지역구 내에서 상가지역이 확대됐는데, 이에 대한 민원이 들어오면 다음 선거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국회의원으로서는 당연히 관할 관청에 전화도 해보고 사정을 알아볼 수밖에 없지 않느냐. 그런데 그 민원인이 이전에 후원금이라도 냈다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다행히 영수증 처리했다면 그냥 넘어가겠지만 영수증 처리하지 못했다면 꼼짝없이 알선수재 혐의에 걸려들 수밖에 없지 않느냐.”
특가법(특정범죄 가중 처벌 등에 관한 법률) 또는 특경가법(특정경제범죄 가중 처벌 등에 관한 법률)상 알선수재 죄는 정치인들이 대가성 있는 ‘검은돈’을 받은 경우 적용되는 범죄 혐의. 청탁 내용이 공무원의 직무에 관한 사항이냐(특가법상 알선수재), 아니면 금융기관 임직원의 직무에 속한 사항이냐(특경가법상 알선수재)에 따라 다를 뿐 알선 대가로 금품이나 이익을 수수·요구 또는 약속한 경우에 처벌받게 된다.
미국 의원들 거액 받아도 내역 공개하면 그만
정치인의 알선수재 혐의가 드러났을 때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게 바로 브로커다. 굳이 다른 예를 들 필요도 없이 정대표 자신이 알선수재 혐의로 구속됐던 1998년 9월 ‘경성비리’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정대표는 당시 ㈜경성측 브로커로 활동하던 B건설 이모 사장과 경성 이사장으로부터 각각 3000만원과 1000만원을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런 정대표인지라 ‘사석에서야’ 조심스럽게 알선수재 혐의의 비현실성을 제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인치고 정대표의 말에 공감하지 않을 사람은 드물 것이다. 시민단체 관계자들까지 정치인들의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가 ‘알선’이라는 점은 인정한다.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소장 조국 교수(서울대 법대)는 “국회에 로비하는 것은 민주정치의 자연스러운 과정이고, 국회의원이 지역구의 온갖 민원과 청탁을 해결하는 과정 자체가 알선이다”고 말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정대표에게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국회의원들이 알선수재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는데도 이를 소홀히 한 것은 정대표를 비롯한 정치인들 자신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알선수재 죄는 몰래 돈을 받고 싶어하는 유혹을 떨치지 못하는 한국 정치인의 당연한 업보라고도 할 수 있다.
미국의 경우를 보자. 미국에서 거액을 뿌리는 곳으로 유명한 단체가 바로 총기협회다. 의원들은 이 단체로부터 ‘대가성’ 있는 거액을 받아도 문제가 안 된다. 로비자금은 얼마든지 받되 대신 그 내역을 공개함으로써 시민의 감시를 받는 제도가 만들어져 있기 때문. 당연히 한국과 달리 브로커가 설 자리가 없다.
한국에서 브로커가 활개치는 것은 로비가 합법화하지 않은 것과도 관련이 있다. 현실적으로 로비가 필요한 경우가 많은데도 로비스트가 없기 때문에 정치인 이름을 팔아 청탁과 함께 돈을 받아 챙긴 브로커가 기생할 수밖에 없는 것. 법무법인 태평양 오양호 변호사는 “자신만의 노하우나 인맥을 통해 의뢰인의 의사를 정책 결정권자나 의원들에게 합리적으로 전달해 설득한다는 점에서 로비스트의 순기능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현실적으로 로비를 합법화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당장 로비를 합법화할 경우 재벌 등 돈 있는 이익집단에 의해 한국 정치가 좌지우지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소비자단체나 노조 등에서 재벌의 이익이 과도하게 반영되는 입법 등을 막기 위해 로비를 하려 해도 ‘실탄’이 없어 눈 뜨고 당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익집단 개념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 탓이다.
이런 점에서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이하 인수위) 시절 인수위 내에 설치된 정치개혁연구실(이하 연구실)의 개혁안은 주목할 만하다. 당시 연구실에서는 로비 합법화에 따르는 이런 문제 때문에 로비 문제에 관해 별다른 논의는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대신 연구실에서 심도 있게 논의한 것은 정치 신인들도 정치자금을 모금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하는 방안이었다고 한다. 연구실에 참여했던 한 관계자의 설명이다.
제왕적 지구당위원장제 개혁이 필수적 요소
“특정 단체가 지구당위원장에게 로비를 집중할 경우 이 단체와 대립적인 관계에 있는 다른 단체가 그와 경쟁관계에 있는 정치 신인에게 정치자금을 내고 로비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특정 단체의 이익만 과도하게 보장되는 일이 없어진다. 또 정치자금을 투명하게 공개하면 정치인들이 브로커들로부터 돈을 받는 일은 많이 없어지게 된다.”
문제는 정치자금의 흐름을 풀기 위해서는 지구당 개혁이 필수적이라는 점. 현재와 같은 ‘제왕적’ 지구당위원장제 하에서는 정치 신인에게 정치자금이 흘러갈 수 없기 때문. 결국 연구실 개혁안의 핵심은 돈의 흐름을 풀어주되 일정 금액 이상 기부자는 공개함으로써 투명성을 강화하고, 이 규칙을 위반한 사람은 엄벌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최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가 마련한 정치개혁안 역시 연구실의 개혁안과 상당 부분 유사하다. 선관위 개혁안의 핵심 역시 각종 규제를 과감히 풀어 누구나 지킬 수 있는 선거제도를 만들자는 것이다. 이에 대해 연구실에 참여했던 한 관계자는 “선관위와 연구실 사이에 교감이 있었다기보다는 인수위나 선관위 개혁안이 정치학계 등에서는 광범위한 공감대를 얻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선관위 개혁안이 그대로 실현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우선 무엇보다 고액 기부자의 인적 사항 공개에 대해서는 야당 쪽의 반발이 예상된다. 벌써부터 한나라당에서는 “한국적 현실에서 정치자금 제공자가 전면 공개되면 야당 의원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할 사람이 없어져 야당은 고사할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지구당위원장제 폐지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민주당 내에서도 반발이 터져 나온다. 무엇보다 현역 의원들의 기득권을 송두리째 박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결국 노무현 대통령의 리더십이 요구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아울러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신세를 벗어나기 위한 정치인들 스스로의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