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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기회의 땅 ‘시베리아’로 간다

“사업 전망 탁월” 한국인들 본격 진출 … 9월엔 노보시비르스크에 무역관 설치

  • 모스크바=김기현 특파원 kimkihy@donga.com

우린 기회의 땅 ‘시베리아’로 간다

우린 기회의 땅 ‘시베리아’로 간다

눈 덮인 시베리아 전경. 석유 가스 등 지하자원이 풍부한 시베리아는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엘도라도인지도 모른다.

”신이 우리에게 무엇을 선물로 주셨는지 우리도 아직 모른다. 다만 추정할 뿐….”

러시아 동시베리아에 있는 톰스크주의 보리스 말리체프 주의회 의장은 시베리아의 풍부한 자원을 이렇게 설명했다.

한때 국내에 시베리아 열풍이 분 적이 있다. 6·15선언으로 남북한 철도 연결이 추진될 때였다. 당장이라도 한반도종단철도(TKR)와 시베리아횡단철도(TSR)가 연결돼 부산에서 출발한 열차를 타고 시베리아 대륙을 달리는 꿈이 이뤄질 것 같았다. 그러나 한반도를 둘러싼 분위기가 냉각되면서 ‘시베리아 바람’은 잠잠해졌다.

최근 다시 시베리아 관련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이번에는 철도가 아닌 에너지다. 동시베리아 유전에서 채굴된 석유를 확보하기 위해 중국과 일본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고, 이르쿠츠크 인근의 코빅타 가스전에서 나온 가스를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공급하는 시베리아 가스전 사업도 가시화하고 있다. 특히 가스 사업은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하는 카드의 하나로 주목받기도 했다.

식당·운수업·카지노 등 수완 발휘



그러나 ‘시베리아 시대’는 이런 정치적 부침과 상관 없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다. 엄청난 크기의 땅덩이에 풍부한 천연자원, 그리고 텅 빈 땅. 시베리아는 과연 21세기의 엘도라도인가? 낯선 시베리아 땅에서 새로운 기회를 잡으려는 한국인들이 벌써 곳곳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인구 150만명의 러시아 제3의 도시이자 시베리아의 중심지인 노보시비르스크. TSR가 지나가는 교통의 요지이자 물류중심지이며 인근에 대덕연구단지와 비슷한 아카뎀고로독(과학도시)이 있는 것이 대전과 흡사하다.

노보시비르스크는 이미 한국을 오가는 주 1회 직항(시비르 항공) 노선이 생겼을 정도로 한국과의 교류가 활발하다. 유럽풍의 시내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운전대가 오른쪽에 있는 일본제 중고차들이다. 블라디보스토크 등 러시아 극동의 자동차 시장을 석권한 일제 중고차들이 시베리아에까지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버스는 ‘○○동 방면’이라고 쓴 한글 표지판을 그대로 단 채 운행하고 있는 한국산이 더 많다.

우린 기회의 땅 ‘시베리아’로 간다

남북한 학생들이 함께 유학하고 있는 시베리아 철도대.시베리아의 고려인 사업가 박벤냐민씨.철도대에 유학중인 북한 학생들이 탁구를 치고 있다(왼쪽부터).

중심가에서 조금 떨어진 칼 마르크스 거리에는 시베리아에서 제일 큰 한식당인 ‘서울 레스토랑’이 있다. 총 360석 규모의 이 대형 식당 주인은 한국인 박상범씨(43)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우전자 노보시비르스크 현지법인장으로 시베리아 전역에 가전제품을 팔던 박씨는 대우가 해외현지법인을 축소하며 철수를 지시하자 사표를 내고 현지에 눌러앉았다. 고려인 동포 박벤냐민씨(42)와 손잡고 한식당을 내기로 결심한 그는 내부장식까지 직접 챙기는 정성을 쏟은 끝에 지난해 11월 식당을 열었다.

그러나 어려움이 많았다. 우선 이곳까지 와서 일하겠다는 한국인 요리사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밤을 새워가며 직접 요리를 배웠고 이를 다시 고려인 요리사에게 가르쳤다. 박씨는 식당이 안정궤도에 오르면 경험을 살려 유통업을 시작할 생각이다.

그가 시베리아에 남기로 한 것은 사업전망이 밝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베리아 특유의 여유 있고 ‘스케일 큰’ 삶에 푹 빠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휴일이면 가족과 함께 타이가(시베리아 원시림) 속으로 들어가 샤슬릭(러시아식 꼬치구이)을 구워 먹고 하루종일 낚시를 즐기는 생활은 서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 “겨울에 떠나는 곰 사냥이나 시베리아식 바냐(사우나)의 멋도 특별합니다.”

박희수씨(39)는 꼼꼼히 따져본 끝에 시베리아에 정착하기로 결심한 경우다. 한국에서 증권회사에 다니던 박씨는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토크 등 러시아 각지를 배낭여행하며 현지 사정을 익혔다.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곳이 노보시비르스크. 비행기로 5시간45분이면 한국을 오갈 수 있고 경제적 잠재력도 엄청난 데다가 앞으로 한국과의 교류가 훨씬 활발해질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시베리아의 자연환경을 이용해 골프장을 열 생각이었으나 아직은 이르다는 판단에 따라 우선 한국에서 버스를 들여와 시내버스 노선을 따내 운수업에 뛰어들었다. 지금까지 혼자 한국과 러시아를 오가며 살던 박씨는 시베리아 생활이 안정되는 9월 즈음에는 한국에 있는 가족을 불러들일 생각이다.

박상범씨와 함께 서울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는 고려인 사업가 박벤냐민씨는 노보시비르스크 고려인회 회장이자 노보시비르스크 주의회 의원이다. 극동 나홋카에서 태어난 그는 전기공학을 전공했지만 가라데에 심취해 세계가라데연맹(WFK) 공인 6단을 따고 세 번이나 전 소련 가라데 챔피언에 올랐다. 시베리아에서 가장 큰 도장을 운영하는 그는 90년 한-러 수교를 계기로 한국의 태권도를 만난 후 태권도 보급에 나서면서 고국을 알게 됐다. 대우 지사장으로 이곳에 온 박상범씨도 이때 만났다. 성이 같다는 이유로 의형제를 맺은 두 사람은 박상범씨가 사업을 시작하자 동업자 사이가 됐다.

박벤냐민씨는 서울 레스토랑말고도 노보시비르스크 중심가에서 ‘베네치아’라는 대형 피잣집과 카지노를 운영하고 있다. 이 지역에 사는 고려인들은 1500여명. 노보시비르스크 공대의 최알렉산드르 부총장과 가구공장을 하는 정봉명 전 고려인회장 등이 장로격이다.

이곳에 사는 한국인은 80여명의 유학생을 포함해 모두 100명 정도. 유학생 중에는 음악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많다. 또 철도 관련 분야의 최고 명문대인 시베리아철도대에는 한국 학생 15명과 북한 학생 24명이 유학중이다.

지난달에는 아카뎀고로독의 과학단지에 있는 반도체물리연구소에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주도로 한·러 시베리아 과학기술협력센터가 설치됐다. 러시아의 기술을 국내에 소개하고 공동연구와 기술제휴 등에 나서는 협력 창구를 만든 것이다. 센터장인 박해조씨(34)는 노보시비르스크대 대학원에서 공부한 러시아통이다. 앞으로 노보시비르스크로 오는 이공계 유학생들도 늘어날 전망이다.

이처럼 시베리아의 하늘 아래에는 고려인 동포와 한국 교민, 조선사람(북한인)들이 섞여 살고 있다. 400여명에 이르는 북한인들은 철도대 유학생을 제외하고 대부분이 건설노동자 등 외화벌이에 나선 일꾼이다.

이국땅에서도 서먹서먹한 남북한 사람들을 중간에서 이어주는 것은 고려인들의 몫이다. 건축업을 하는 김우광 사장은 철도대의 남북한 유학생들을 차별 없이 도와주고 어색해하는 양측 학생들간에 축구시합을 주선하기도 했다. 또 시베리아의 한인들은 해마다 설날이면 500여명씩 모여드는 큰 잔치를 벌인다. 이날만은 고려인인지 한국인인지 조선인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한민족일 따름이다.

앞으로 시베리아에 드나들고 이곳에 삶의 둥지를 트는 한국인들은 더 많아질 전망이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가 9월에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토크에 이어 세 번째로 노보시비르스크에 무역관을 설치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중국 독일 미국은 이미 총영사관을 설치했거나 개설을 서두르고 있고, 일본과 영국은 문화원을 여는 등 시베리아에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한 다른 나라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지구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미개척지대인 시베리아에 진출하기 위한 경쟁이 본격화하고 있는 것이다.



주간동아 393호 (p50~51)

모스크바=김기현 특파원 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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