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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제2 외교관 맞추방’ 사태 오나

한-러 냉랭한 관계 지속 우려 목소리 … 일부에선 정상회담 개최 불투명 전망도

  • 김기영 기자 hades@donga.com

‘제2 외교관 맞추방’ 사태 오나

‘제2 외교관 맞추방’ 사태 오나

노무현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 추진이 순조롭지 않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4월10일 청와대에서 방한중인 세르게이 이바노프 러시아 국방장관(맨 왼쪽)과 인사하고 있는 노대통령.

최근 한 중앙일간지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 및 한러 정상회담 일정이 8월 말에서 10월로 연기됐다는 기사가 실렸다. 8월이 러시아의 휴가철이라 일정을 소화하기 어렵다는 게 이유. 단신이었지만 궁금증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아무리 여름휴가를 철저히 챙기는 러시아인이지만 정상회담 같은 중대 행사를 휴가 때문에 미룬다는 게 과연 상식에 맞는 일인가. 또 휴가철이라지만 러시아 외무공무원 모두가 휴가를 떠나는 것은 아닐 텐데 한국의 대통령을 맞을 사람이 없다는 얘기인가. 8월 말이라고 일정까지 정해놓고서 이제 와서 웬 휴가 타령일까 등등.

“한마디로 오보다. 한러 정상회담 일정과 관련해 아직 정해진 것은 없다. 실무 차원의 협의가 진행중이다.” 외교통상부의 반응은 이랬다. 외교통상부 러시아 CIS과 관계자는 “러시아를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 노대통령의 방문을 두고 이런저런 말들이 있었을 것이고, 마침 8월이 러시아의 휴가철이라 ‘휴가철인데 정상회담이 잘 될까’ 하고 의구심을 나타낸 것이 와전돼 그런 기사가 난 것 같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해프닝일 뿐 정상회담 준비작업에는 별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노대통령 방러 찬반 분위기 팽팽

하지만 정부의 이런 해명에도 한러 관계가 삐걱거리고 있다는 관측은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심지어 외교가에서는 한러 정상회담이 개최될지조차 불투명하다는 전망마저 나오고 있다. 외교관 맞추방 사태를 빚으며 한러 관계가 악화됐던 1998년 김대중 정부 초기와 같은 상황이 재연될 수도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러시아 사정에 정통한 한 인사는 최근 모스크바의 고위 공직자로부터 받은 전화 내역을 공개했다. 이 인사는 “러시아 공직자 사이에 최근 노무현 대통령의 방러에 대해 찬반 논란이 일고 있는데 찬반 양론이 50대 50으로 팽팽히 맞서고 있다”고 전하며 “내게 전화를 건 고위 공직자는 ‘한국 내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인기가 어느 정도냐’고 물어왔다”고 말했다. 이 인사는 “이 공직자는 러시아 내부에 노대통령의 한국 내 지지율이 높으면 노대통령의 방러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그렇지 않으면 방러 자체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여론이 팽배해 있다고 전해왔다”고 덧붙였다.



사실 러시아는 몇 가지 이유에서 노무현 정부에 대해 섭섭한 감정을 품어왔다. 러시아측 인사들이 가장 먼저 거론하는 불만은 한국이 주변 4강 가운데 러시아를 홀대하고 있다는 것. 앞서의 인사는 “노대통령이 취임 후 첫 방문 국가로 미국을 택한 것에 대해서는 러시아도 이해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그 다음 방문국은 당연히 러시아가 돼야 한다는 게 그쪽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일본, 중국에 이어 마지막 방문 국가로 거론되자 러시아 고위층이 적지 않게 자존심이 상한 것 같다”고 해석했다.

한반도 주변국가 가운데 노무현 정권의 출범을 가장 두드러지게 환영했던 나라는 러시아였다. 최근까지 러시아 현지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한 공무원은 “조야(朝野)를 막론하고 서민 출신인 노대통령의 당선을 축하하고, 한러 관계의 발전을 기대하는 분위기였다”고 전했다.

실제 러시아는 노대통령의 취임식 참석 특사를 통해 북핵 문제 해결에 역할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오기도 했다. 당시 러시아 대표단이 들고 온 북핵 문제 해결 카드는 북한이 핵 개발을 포기한다는 조건으로 러시아가 북한에 가스와 화력발전소를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러시아 대표단은 대신 장기적으로 러시아가 국책사업으로 추진중인 이르쿠츠크 가스전에서 시작해 한반도를 관통하는 가스관 연결사업과 시베리아횡단철도사업에서 한국 정부가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해달라고 요구해왔다. 러시아 대표단은 그것이 노무현 정부가 표방한 동북아중심국가 프로젝트를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길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고 한다.

이런 제안에 처음에는 노대통령도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취임식 특사로 방한한 세르게이 밀로노프 상원의장을 만난 자리에서 노대통령은 “현재 북한에는 안전과 경제, 특히 경제 중에서도 에너지 문제가 심각한데 러시아가 이 문제 해결에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라며 기대를 나타내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 정부의 태도가 신중해지자 러시아측의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다. 6월2일, 취임 100일 기념 기자회견에서 노대통령은 “천연가스 (북한) 지원 문제는 실무적으로 검토중”이라고 말한 뒤 “(이 사업이) 남북 문제와 북핵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남북 관계가 잘 풀려야 실행할 수 있는 만큼 이것이 남북 문제를 푸는 결정적 지렛대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러시아가 제안한, 북한에 대한 가스 제공을 통한 북핵 해결 방안에 큰 기대를 걸지 않는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시베리아횡단철도사업과 관련, 러시아측과 민간 차원의 협력 파트너로 활동하고 있는 한러문제연구소 권영갑 소장은 “노대통령 취임 초, 고려인 3세인 텐 유리(한국명 정홍식) 의원 등 러시아의 지한파 정치인이 중심이 돼 가스관 연결사업과 시베리아횡단철도사업을 통해 한반도 긴장 완화와 공동번영에 관한 아이디어를 제안했지만 5개월이 다 되도록 우리 정부로부터 책임 있는 답변이 없었다”며 “이런 우리 정부의 태도가 러시아의 자존심을 자극하고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를 자극할 만한 사건은 이후로도 몇 가지 더 있었다. 외교가의 한 소식통은 “러시아 입장에서는 ‘기피 인물’인 나종일 전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 1차장을 대통령 외교안보정책 최고 참모로 임명한 점이 불만일 것”이라고 말했다. 나보좌관이 러시아에 기피 인물로 찍힌 것은 김대중 정부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러시아측 ‘무리한 부탁’ 원인?

1998년 여름, 한러 양국 관계는 긴장감을 더해갔다. 바로 러시아 주재 한국 참사관 추방에 이은 한국 정부의 러시아 외교관 맞추방 사건 때문이었다. 당시 러시아는 문제의 국정원 소속 한국 외교관이 러시아 외무공무원에게 뇌물을 주고 정보를 빼내가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그 당시 국정원의 해외파트 총책임자인 1차장이 바로 나종일 현 국가안보보좌관이다.

이 소식통은 “나보좌관의 중용이 간접적인 불만요인이라면 직접적인 불만요인은 한국 정부가 두 차례나 노대통령의 방러 일정을 연기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소식통에 따르면 “처음에는 6월에 방문하겠다고 하더니 그 뒤 7월, 8월로 방러 일정을 미룬 한국 정부의 태도에 대해 러시아 정부의 불만이 높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주장에 대해 외교통상부측은 “확인해줄 수 없다”는 입장이다. 외교통상부 관계자는 “양국 국가원수가 만나는 중대 행사인 만큼, 완벽한 사전조율을 끝낸 뒤 같은 날, 같은 시각에 그 결과를 발표하는 게 관행이다. 그때까지는 일정을 공개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말했다.

북핵 문제 해결방안으로 다자간 협상이 전면에 떠오르면서 남북한과 미국 중국 일본은 협상의 당사자로 거론되는 반면, 러시아는 끝내 참석자로 거론되지 않는 데 대해서도 러시아측이 불만스러워한다고 한다. 권영갑 소장은 “김대중 정권도 출범 초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한 6자 회담을 국제사회에 제안했다. 가급적 이해관계가 있는 여러 나라를 끌어들여 부담을 나누는 게 국익을 위한 외교 아닌가. 새 정부가 러시아를 배제한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정가 일각에서는 한러 관계가 삐걱거리는 데는 또 다른 배경이 있다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정상회담을 앞두고 러시아측이 선뜻 들어주기 어려운 ‘부탁’을 하고 나섰다는 것. 이와 관련 여권의 한 고위 인사는 “구체적 내용은 밝힐 수 없지만 정상회담 일정이 순조롭게 잡히지 않는 데는 러시아측의 ‘무리한 부탁’도 한몫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 정부 입장에서 한반도 주변 4강 가운데 러시아의 비중이 과거 같지 않은 것은 사실인 듯하다. 이에 맞대응이라도 하듯 한국 정부에 대한 러시아의 시선도 곱지만은 않다. 지난 6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45개국 정상회담 때 한국을 초대하지 않은 러시아의 태도가 양국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라는 분석도 있다.

과연 냉랭한 두 나라 관계는 회복될 것인가. 4강 외교의 세 번째 이벤트인 중국 방문길에 나선 노무현 대통령의 어깨 너머로 러시아라는 만만찮은 고민거리가 다가오고 있다.



주간동아 393호 (p30~31)

김기영 기자 hade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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