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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임 후 DJ, 동교동 은둔생활

대북송금 파문으로 활동 위축 불 보듯 … 외국 나들이 자제·손님도 당분간 사절

  • 김시관 기자 sk21@donga.com

퇴임 후 DJ, 동교동 은둔생활

퇴임 후 DJ, 동교동 은둔생활

김대중 대통령의 동교동 사저 전경. 원 안은 한문으로 된 김대통령과 이여사의 문패.

2월24일 낮, 김대중 대통령(DJ)은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찾는다. 참배를 끝내고 청와대로 돌아온 김대통령은 마지막 국무회의를 주재한다. 현안에 대한 토론보다 마지막 인사를 하는 자리다. 이 회의가 끝나면 5년간의 대통령 활동은 공식적으로 마무리된다. 이날 오후 청와대를 떠난 김대통령은 동교동 사저로 돌아온다. ‘현직’에서 ‘전직’으로 신분이 바뀌는 순간이다.

동교동은 이미 ‘전직’ 대통령을 맞을 채비를 끝냈다. 사저 대문에는 김대통령이 직접 쓴 대통령 내외의 한문문패가 앙증맞게 걸려 있다. 옷과 책, 상장, 메달 등 청와대에 있던 짐은 이미 2월 초부터 동교동으로 옮겨졌다. 동교동 인근 LG팰리스 건물 창고에 있던 미술품, 병풍 등도 지난 1월 사저로 운반돼 자기 자리를 찾았다. 모두가 김대통령 부부가 30여년간 사용한 세간살이들이다. 지하 1층, 지상 2층 등 총건평 199평인 사저는 이런 짐이 들어오면서 활기를 띠는 모습이다. 동교동을 지킬 비서진도 확정됐다. 김한정 제1부속실장, 김형민 제1부속실국장, 윤철구 관저비서관, 운전기사 등 4명이 동교동에서 김대통령의 수발을 들 계획이다.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 등 일부 동교동 식구들도 말동무로 동교동을 찾을 가능성이 있다. 경찰은 1월26일부터 동교동 사저 경비초소를 2개에서 5개로 늘려 경비를 강화하고 있다. 사저 앞에 경호실 사람들을 위한 사무실도 마련했다. 감시카메라까지 설치된 동교동 사저는 외형상 퇴임하는 DJ를 맞는 데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사저생활을 준비해온 김대통령 측근들은 당초 명예로운 은퇴를 꿈꿨다. 다른 전직 대통령과 달리 왕성한 대외활동도 구상했다. 1월3일 박지원 대통령비서실장은 “퇴임 후 평범한 국민으로서, 전직 대통령으로서 현직 대통령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돕고, 대한민국이 발전하고 세계가 평화를 유지하도록 협력하는 일에 전념할 것”이라며 김대통령의 퇴임 후 역할을 암시했다. 그러나 동교동을 휘감고 있는 바람은 이런 기대와 사뭇 다르다. 특히 대북송금 문제가 터지면서 동교동에는 얼음장같이 싸늘한 기류가 감돈다. 김대통령 최고의 ‘작품’인 햇볕정책이 오히려 그의 발목을 잡고 있는 형국이다.

“사실상 칩거 … 상당 기간 DJ는 없다”

이런 외부 흐름은 전직 대통령의 활동공간을 극도로 위축시키고 있다. 퇴임 이후 동교동 비서진으로 합류할 예정인 김한정 제1부속실장은 퇴임하는 김대통령의 활동에 대해 “어떤 계획도 없다”고 말한다. “세계 평화 유지를 위해 활동하겠다”는 당초 구상과 정반대의 설명이다. 계획이 없다는 것은 “공개 석상에 나서지 않겠다”는 말이다. 김대통령의 한 측근은 “사실상 칩거 아니겠느냐”며 ‘DJ의 존재를 잊어달라’는 주문으로 해석한다. 상당 기간 동안 “DJ는 없다”는 것이 김한정 실장의 설명이다. 그의 말이다.



“동교동계는 해체됐고, 정치에도 개입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지난 40년 동안 감옥에 있는 동안을 빼면 한 번도 쉰 적이 없다. 그동안 나이에 비해 과도한 활동을 했다. 이제 안식년을 가질 계획이다.”

이런 계획에 따라 퇴임 후 김대통령은 철저하게 세상과 등을 지는 것으로 계획과 일정이 짜여지고 있다. 김대통령은 퇴임 후 당분간(1년 정도) 동교동을 찾는 손님들을 만나지 않을 계획이다. 외국손님 등 특별한 경우는 예외지만 정치권 인사는 물론 각계의 퇴임 인사도 사양하겠다는 것이 김대통령측의 입장이다. 특히 동교동계 출신 인사들의 출입을 매우 부담스러워하는 눈치다. 이들과 만나면 말이 나고, 언론에 다시 김대통령의 동정이 언급되는 악순환에 대한 우려다.

퇴임 후 DJ, 동교동 은둔생활

2월14일 대북송금 문제와 관련,‘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발표하는 김대중 대통령(위).2000년 6월 청와대 경내를 산책중인 김대통령 부부.

김대통령측은 이미 지난해부터 해외 유수대학 및 연구단체들로부터 초청 및 연설 요청을 받았다. 한때 “이런 기회를 통해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 같은 세계평화지도자로서의 위상을 확보하자”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김한정 실장은 “이 모든 일정이 취소되거나 뒤로 미뤄졌다”고 말했다. 어떤 명목이든 비행기 트랩을 오르는 모습이 국민들 눈에 좋게 비칠 리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김대통령의 한 측근이 “퇴임한 김대통령의 동교동 생활은 철저하게 ‘사저’로 국한될 전망이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퇴임 이후 활동공간으로 준비했던 아태재단도 이제 김대통령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아태재단의 자산과 부채는 모두 연세대로 넘어갔다. 김대중 도서관(Kim Dae―jung Presidential Library)으로 이름이 바뀐 이곳에, 김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옮긴 3만권의 장서를 기증하며 애정을 보였다. 연세대측도 재단 5층을 김대통령의 연구실로 제공했다. 그러나 김대통령으로서는 선뜻 발걸음을 옮기기 어렵다. 재단을 헌납한 김대통령이 “재단에 출입한다”는 여론이 또 다른 부담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김한정 실장은 “연구실(재단 5층) 사용 여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말을 얼버무렸다.

퇴임한 김대통령의 유일한 계획은 ‘회고록’을 집필하는 일이다. ‘전직’들이 흔히 쓰는 정치 회고록이다. 물론 이것도 당장은 아니다. 청와대 한 측근은 “대북송금 문제 등으로 심신이 지친 김대통령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회고록 집필이 아니라 휴식”이라고 말한다. 김실장은 “자료준비야 하겠지만 집필에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유일한 계획은 ‘회고록’ 집필

김대통령의 정치여정에는 동반자가 있다. 부인 이희호 여사다. 이여사는 누구보다 동교동 사저생활에 대한 기대감으로 설렌다고 한다. 지난해 두 아들이 감옥에 가고, 청와대에 비난 여론이 쏟아지자 “빨리 (임기가) 끝나, 돌아갔으면…”이라며 동교동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이여사는 청와대를 찾은 민주당 한 지인에게 신축되기 전 동교동 앞마당에 꽃을 심고, 새 모이를 주던 일을 회상하기도 했다고 한다. 다른 한 지인에게는 “가서 손자 손녀들과 손잡고 노년을 보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이여사는 김대통령에게 때로는 동지요, 때로는 친구였다. 김대통령이 있는 곳이면 항상 자리를 함께했던 이여사의 과거도 김대통령 못지않게 파란만장하다. 이여사는 이런 자신의 내조자로서의 삶을 기록(회고록)으로 남길 계획이다. 노부부가 동시에 회고록을 준비중인 셈이다. 이여사의 회고록 집필 작업이 김대통령보다 먼저 진행될 것이라는 게 청와대 한 관계자의 설명이다.

김대통령의 하산길의 가장 큰 애로점 가운데 하나는 ‘외로움’이라고 청와대 출입을 자주하는 민주당 한 관계자는 전했다. 권력의 정점에 섰을 때 고개를 숙이고 밀려들던 사람들은 이제 흔적조차 없다. 동지요 형제였던 동교동계 식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미 김대통령 스스로 지난해 연말 해체를 선언, 실체가 없어진 동교동계다. 그들 가운데 몇몇 의원들은 아직 김대통령에 대해 깊은 애정을 보이지만, 상당수 인사들은 이미 ‘지는 해’인 김대통령 곁을 떠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측은 최근 퇴임하는 김대통령을 맞기 위해 24일 동교동행을 계획하고 있다. 그러나 측근 그룹 가운데 일부가 “속도 없느냐”며 동교동 방문을 반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김대통령의 한 측근은 “그것이 권력의 속성이라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허망하기만 하다”며 썰렁한 김대통령 주변 분위기를 설명한다. 측근들은 평생을 ‘정치와 권력’ 속에서 살아온 김대통령이 이런 상황변화가 몰고 올 금단현상을 견뎌낼지 벌써부터 근심스럽다는 표정이다.

김대통령의 뜻과 달리 살아온 자식들 문제도 김대통령의 마음을 짓누른다. 둘째아들 홍업씨는 지금도 감옥에 갇혀 있고 홍걸씨는 재판중이다. 이들은 지난해부터 김대통령의 웃음을 앗아간 주인공들이다. 그나마 홍걸씨가 가족들을 데리고 영구귀국, 김대통령 부부 곁을 지킬 계획이라 말년의 외로움은 다소 줄어들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상자기사 참조). 3월 초로 예정된 홍걸씨 가족의 귀국이 이루어질 경우 이여사는 소원대로 손자 손녀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홍걸씨 가족의 영구귀국은 김대통령과 이여사의 뜻에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퇴임 후 DJ, 동교동 은둔생활

박지원 대통령비서실장.

김대통령의 평범한 사저생활을 위협하는 핵심 이슈는 대북송금 문제다. 당초 김대통령은 송금 사실을 부인하다가 뒤늦게 통치행위라며 시인했다. 이로 인해 김대통령의 도덕성은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상처를 입었다. 검찰은 수사 유보 입장을 밝혔지만, 특검의 칼날은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더욱이 남북정상회담마저 뇌물회담으로 비쳐지면서 빛이 바래고, 노벨평화상 수상 로비설까지 잇따르고 있다. 이런 문제가 불거질 경우 전두환-노태우-김영삼으로 이어지는 불명예 ‘전직’ 대열에 이름을 올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럼에도 퇴임을 앞둔 김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어 보인다. 심하게 말하면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의 선처와, 야당의 정치적 결정을 지켜봐야 하는 처지다. 김대통령의 한 측근은 “어차피 권력이란 게 그런 것 아니냐”며 무기력한 김대통령의 처지를 설명했다. 김대통령은 요즘 불면의 날을 보내고 있다. 2월14일 대북송금과 관련해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발표하는 김대통령의 얼굴에는 짙은 그림자가 깔려 있었다. 40여년, 먼 여정을 끝내고 동교동에 마지막 둥지를 틀려는 김대통령이 이 위기를 어떻게 헤쳐나갈까.





주간동아 373호 (p20~22)

김시관 기자 sk2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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