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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대출 해명 누락이 불씨 키웠다

한나라당 공세의 결정적 빌미 … ‘특검제·국정조사 연계’ 내부전략 세운 듯

  • 허만섭 기자 mshue@donga.com

산은 대출 해명 누락이 불씨 키웠다

산은 대출 해명 누락이 불씨 키웠다

김대중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이 2월14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에서 대북송금 파문과 관련해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2월14일 오전 8시 조순용 대통령 정무수석비서관이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권한대행에게 전화를 했다. “오늘 오전 10시 김대중 대통령이 대북송금 문제와 관련한 대국민 담화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날 오전 9시50분에는 청와대 정무비서관이 한나라당을 찾아와 대통령 담화문을 전했다. 청와대측은 이로써 야당에 예의를 갖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반응은 냉담했다. “적어도 하루 전에는 들고 와야 야당 의견을 묻는 것이지, 생방송 10분 전에 갖고 온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새벽까지 대통령이 원고를 다듬느라 늦어졌다”는 청와대측의 설명에 대해서도 한나라당은 “첫 금강산 육로관광을 떠나는 날에 맞추려고 청와대가 꽤나 노력한 것 같다”고 일축했다.

김대통령의 대국민 담화를 지켜본 직후 한나라당 박종희 대변인은 기자에게 “국민들에게 미안하다고 하면서 미안한 기색이 없다”고 말했다. 박 대표권한대행은 점심식사 전 한 문장으로 된 ‘시청소감’을 밝히며 ‘거짓말’ ‘궤변’ ‘왜곡’ ‘회피’ ‘급급’ 등 최고 수준의 부정적 단어들을 쏟아냈다.

인수위측 “청와대의 전략적 실수”

한나라당은 김대통령의 대국민 담화와 관련, 12대 의혹을 다시 제기했다. 이중 가장 큰 의혹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담화에서 산업은행(이하 산은)의 현대상선 대출에 대한 해명과 현대에 대한 각종 특혜지원 의혹에 대한 해명이 없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김대통령과 임동원 대통령 외교안보통일특보는 모두발언에서 두 문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모두발언이 끝난 뒤 경향신문, 연합뉴스, KBS, MBC 등 4개 언론사 기자가 나서 김대통령과 박지원 대통령비서실장, 임특보에게 질문을 던졌다. 4명의 질문자 수는 청와대측과 사전조율된 것이었고 질문자는 청와대 출입기자단이 자체 결정했으며 질문 내용은 사전에 청와대측에 통보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 4명의 기자들도 대북송금 의혹의 핵심 사안이라고 볼 수 있는 산은 대출과정과 현대 특혜 의혹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았다.

청와대 관계자는 “기자들이 왜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는지 의아스러웠다”고 말했다. 청와대는 기자의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그 부분에 대해서도 해명할 의지가 있었다는 것이다. “국가정보원 개입 사실까지 다 밝혔는데 그 부분을 일부러 말 안 하겠느냐”는 얘기다. 한 출입기자는 “모두발언을 들은 뒤 즉석질문을 던져야 하는 과정에서 아마 질문자들이 그 부분을 빠뜨린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의도되지 않은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이는 야당에게 큰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애초 대북송금 의혹은 엄낙용 전 산은 총재가 “외압을 받아 현대상선에 4000억원을 대출했다”고 국회에서 증언하면서 터져나온 것이었다.

김대통령은 담화에서 “대북송금은 대북 7대사업의 독점권 확보를 위해 현대가 북한에 송금한 민간 사업상 거래일 뿐이고 국정원 등 정부는 국익을 고려, 환전 등 약간의 편의만 제공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얘기가 먹혀들려면 현대가 북한으로 보낸 돈의 원천인 산은 대출과정의 투명성이 제시되어야 했다.

산은 대출 해명 누락이 불씨 키웠다

2월14일 한나라당 기자회견장에서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권한대행이 대통령 대국민 담화 발표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청와대측이 전략적으로 실수한 것 같다”고 말했다. 청와대는 산은 특혜대출 의혹 해명을 빠뜨림으로써 “담화가 의혹만 더 키웠다”는 평가를 자초했다는 것이다.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도 대북송금 관련 발표에서 산은 대출과정에 대해선 해명하지 않았다.

청와대측은 또한 현대 특혜지원 의혹에 대한 해명도 생략했다. 한나라당의 주장에 따르면 2000년 중반 이후 정부가 공적자금 제공 등의 형태로 현대그룹에 지원한 자금 규모는 33조원에 이른다. 이중 24조원이 회수불능 상태라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가 ‘대북송금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현대에 국민혈세를 마구 퍼줬다”는 것이 야당의 의심이다. 이와 관련, 야당의 ‘대여 공세 스케줄’은 주목할 만하다. 한나라당 핵심 관계자가 기자에게 밝힌 바에 따르면 한나라당 내부전략은 ‘특검제+국정조사’다. 즉 올 상반기 안에 대북송금 특검수사가 실시되도록 하고 국회에선 공적자금 국정조사를 함께 열어 국정조사의 포인트를 현대에 대한 공적자금 지원 문제에 집중해 대북송금 의혹 특검수사와 연동시킨다는 것이다. 현재 한나라당은 국정조사 개최 여부에 대해선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전술적 침묵’일 공산이 크다. 특검제를 관철시킨 뒤 한나라당은 곧바로 “공적자금 국정조사도 하자”고 여당을 압박할 것으로 보인다.

노당선자, DJ 보호 의지도 관건

산은 대출 해명 누락이 불씨 키웠다

금강산 육로관광 사전답사팀을 태울 버스들이 북측 고성항을 출발, 북방한계선을 통과해 남측 비무장지대로 들어오고 있는 모습. 버스 뒤로 금강산 끝자락인 적벽산이 보인다.

야당이 장내·외에서 이렇게 ‘초강경 파상공세’를 펴게 될 경우에도 퇴임하는 김대통령측은 대응 카드가 거의 없다. 산은 대출과정과 현대 특혜지원 의혹에 대한 해명 없이 김대통령 담화가 끝난 것은 이런 관점에서 김대통령에게 부담이라는 것이다. 5억 달러 송금 경위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은 부분도 마찬가지다. “그만하면 됐다”는 여론을 형성해 ‘김을 빼는 것’이 담화의 목표였을 텐데 오히려 핵심적인 부분에 대한 해명을 빠뜨림으로써 야당에 역공의 빌미를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담화를 안 하는 것보다는 한 것이 훨씬 나았다”는 여론도 만만찮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 일부 법조계, 비정치 사회단체에서 “특검 반대”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대북송금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김대통령의 대북 화해정책은 성공적이었다”는 한 언론사 여론조사 결과도 김대통령을 고무시킬 만하다. 호남에선 김대통령 담화를 납득하는 여론이 이미 절반을 넘어섰다. 소위 ‘진보진영’에선 “남북문제에서 보수층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김대통령을 ‘전략적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한나라당이나 김대통령이나 어느 쪽도 여론의 우세를 확실히 점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김대통령측의 특검제-청문회 회부 여부는 전적으로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와 민주당 구주류가 ‘자기 일처럼’ 김대통령측을 보호해주느냐에 달려 있다. 김대통령은 이들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노당선자측은 대외적으로 김대통령 담화를 공식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김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우려해 특검법안 처리를 김대통령 퇴임 이후로 미루자 노당선자측은 “국회결정을 존중할 수밖에 없다”는 반응도 함께 흘렸다. 한나라당에겐 “계획대로 해도 된다”는 일종의 ‘힌트’로 들렸다. 노당선자측의 최종선택이 확정되지는 않았으나 이러한 행보는 김대통령측에겐 ‘얄미운 이중플레이’로 보일 수도 있다.

김대통령 담화 직후 한나라당 이규택 원내총무는 민주당 정균환 원내총무를 만났다. 정총무는 여전히 특검제에 반대했다. 그러나 이총무는 정총무와 면담한 뒤 한나라당 임인배 수석 부총무에게 “한숨 돌렸다”고 말했다. 임부총무는 “정총무가 며칠 전까지는 ‘실력으로 특검제를 저지하겠다’고 말해왔으나 담화 후엔 ‘실력으로야 어떻게 막겠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총무가 안도한 것”이라고 기자에게 설명했다.

정국 상황의 변화로 김대통령측이 대북송금 의혹의 굴레에서 벗어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검찰에게 수사를 맡기는 안이 다시 논의되는 것도 그 징조 중 하나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상황은, 퇴임이 가까워지면서 김대통령이 점차 홀로 ‘황야’에 내몰리는 모양새다.



주간동아 373호 (p24~25)

허만섭 기자 mshu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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