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73

2003.02.27

‘차카게 살자’ 소리없이 확산

자원봉사 헌혈 등 따뜻한 이웃 의외로 많아 … 올 봄 패션계 화두 악역 없는 드라마도 양산

  • 구미화 기자 mhkoo@donga.com

    입력2003-02-20 16: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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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카게 살자’ 소리없이 확산

    올 봄과 여름엔 화이트와 연한 핑크가 어우러져 여성미를 강조한 옷차림이 유행할 전망이다

    지난해 12월24일, 거리는 온통 젊은이들로 가득 차고 대학가 술집은 예약을 하지 않고서는 자리를 차지할 수 없을 정도로 붐볐다. 그러나 같은 날, 강두석씨(23·가톨릭대 2년)는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를 만났다. 평범한 대학생인 강씨가 노무현 당선자를 만날 수 있었던 건 그가 그날 서울 녹번동 ‘소년의 집’을 찾았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해서 특별히 할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모여봤자 술이나 마실 테고 해서 차라리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뜻이 맞은 친구 다섯 명이 모여 소년의 집을 찾았는데 노당선자가 그곳을 방문한 것. 이번 주말에도 강씨는 소년의 집을 찾아갈 생각이다. 강씨는 대학에서도 1학점밖에 인정되지 않는 사회봉사 과목을 신청해 수강하며 점자도서관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앞 못 보는 사람들을 위해 책 내용을 녹음하고, 병원을 찾아다니며 환자들에게 책을 읽어준다. 강씨는 “그저 즐거운 ‘놀이’를 한다는 생각으로 참여하는 봉사 현장에는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전한다.

    부드럽고 온화한 분위기 선호

    ‘차카게 살자’ 소리없이 확산

    악역이 없는 드라마 '아내'의 두 여자 주인공 김희애(왼쪽)와 엄정화.

    최근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소리 없는 움직임이 체감온도를 높이고 있다. 이른바 ‘차카게 살자’는 신드롬이 확산되고 있는 것. ‘차카게 살자’는 ‘착하게 살자’를 소리나는 대로 표기한 것으로 가수 이승환씨는 2001년부터 매년 같은 이름의 자선콘서트를 열고 있다. 올해 1월에도 ‘2003 차카게 살자’ 공연을 한 이승환씨는 지금까지 자선콘서트를 통해 400여명의 백혈병 어린이를 도왔고, 이날 수익금도 전액 한국백혈병어린이재단에 전달됐다. 인터넷 다음 사이트에는 헌혈 관련 사이트만 85개에 달하고, 게시판에는 ‘100번째 헌혈’을 한 사연, ‘815번 헌혈’을 목표로 한다는 등 따끈따끈한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2월14일, 발렌타인데이에 초콜릿 대신 나란히 누워 헌혈을 하고, 헌혈증을 맞바꿔 간직하는 게 어떠냐는 제안도 나온다.

    ‘차카게’ 신드롬을 경험한 사람들에 따르면 그 증상은 답답할 만큼 참는 ‘착함’과는 달리 부드럽고 온화한 분위기를 선호하고, 인위적인 선악구도에 현혹되지 않는다.



    ‘차카게 살자’ 소리없이 확산

    2001년부터 매년 ‘차카게 살자’는 이름의 자선콘서트를 열고 있는 가수 이승환.

    이미 봄옷으로 갈아입은 패션계에도 ‘차카게’ 신드롬이 반영되고 있다. 제일모직 ‘로질리’ 디자인실 최원영 전임 디자이너는 “올 봄과 여름 세계 패션계의 화두는 ‘굿 걸(Good Girl)’”이라고 말한다. 돌체 앤 가바나, 구찌 등은 지난해 유행한 블랙과 강한 컬러를 강조한 섹시무드를 이어가겠지만 마크 제이콥스, 도나 카란 등 9·11테러의 영향을 받은 뉴욕컬렉션 디자이너들의 주요 테마는 ‘굿 걸’이라는 것.

    이들이 선보이는 의상은 대개 상의는 몸에 꼭 맞고, 하의는 바지보다는 밑단이 넓게 퍼지는 스커트 정장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색상은 순수한 이미지의 화이트와 연한 핑크가 많이 쓰인다. 지난해 가을 열린 2003년 봄 여름 뉴욕컬렉션에서 마크 제이콥스는 꽃무늬 문양에 허리선이 높은 원피스와 칠부 소매 재킷을 선보였는데 당시 외신은 그의 컬렉션을 “남편을 위한 모임이나 교회 예배 등 사교모임에 갈 때 신경 써서 차려 입었으면서도 그런 티를 내지 않은 1950년대 여성들을 모티브로 했다”고 평한 바 있다. 최원영 전임 디자이너도 “사랑스러운 여성미를 강조하는 패션 테마 ‘굿 걸’은 1950년∼60년대 영화배우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복고풍일 것”이라고 예측했다. 헤어스타일과 메이크업도 오드리 헵번처럼 앞머리로 이마를 살짝 가린 스타일과 화사한 볼터치, 핑크빛 입술이 유행할 것으로 전망된다. ‘차카게’ 신드롬은 안방극장에서도 확인된다. 연일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던 SBS 드라마 ‘야인시대’의 인기가 최근 주춤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동시간대 방송되는 KBS 드라마 ‘아내’ 때문이다. 기억상실증에 걸려 7년간 행방불명된 남편 상진(유동근 분)을 두고, 두 명의 아내 나영(김희애 분)과 현자(엄정화 분)가 가슴앓이를 하는 내용을 담은 이 드라마는 진부한 소재라는 지적에도 시청률이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다. 닐슨미디어리서치 조사에 따르면 ‘아내’ 첫 방영일인 1월16일 시청률은 12.8%에 불과했다. 이날 야인시대는 42.1%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그런데 두 주가 채 지나지 않은 1월28일, 아내의 시청률은 21.2%를 기록했고, 야인시대는 33.8%로 떨어졌다. 최근까지 아내는 시청률이 지속적인 상승세를 보이며 20% 안팎의 안정된 수치를 나타내고 있다.

    “인간적 캐릭터에서 위안받아”

    이처럼 대작을 무너뜨린 ‘아내’의 여러 가지 성공요인 중 특징적인 것은 ‘악역’이 없다는 점. 보통의 멜로물이라면 나영을 사랑하는 현필(정보석 분)이 상진을 발견하고도 사실을 밝히지 않아야 하지만, ‘아내’에서는 나영과의 결혼을 거의 마무리지은 단계인데도 현필이 상진의 존재를 나영에게 알리고 그녀를 적극적으로 돕는다.

    ‘차카게 살자’ 소리없이 확산

    착한 사람들의 솔직한 이야기로 마니아층을 확보한 MBC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의 DVD.

    악역이 사라지고 있기는 SBS 드라마 ‘올인’ MBC 드라마 ‘눈사람’에서도 마찬가지다. 악역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선과 악을 가르는 구도가 드라마의 핵심은 아니다. 그런데 이렇듯 안방극장의 판도가 바뀐 것은 지난해 화제를 모았던 MBC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드라마는 시한부 삶을 사는 복수(양동근 분)와 그를 사랑하는 두 여자 경(이나영)과 미래(공효진)의 이야기를 담은 것으로 마음에 상처가 있는 등장인물은 있을망정 인위적인 악역은 없었다. 이러한 독특한 구도는 방영기간 내내 시청률이 15%대에 머물렀던 드라마를 드라마가 종영된 뒤 팬들이 DVD 제작을 요구하는 기현상을 불러오며 적극적인 마니아층을 확보했다. 이 드라마는 지난해 12월 DVD가 출시되기 전부터 ‘네 멋대로 해라’ 인터넷 팬 카페인 ‘네멋30’을 통해 1200세트가 예약 판매됐고, 이후 3300세트가 추가로 판매돼 지금까지 4500세트, 총 3만6000장의 판매고를 기록하고 있다. DVD 판매량 최고기록은 영화 ‘엽기적인 그녀’가 세운 4만장. DVD 제작사인 비트윈의 김정우씨는 “케이블 방송으로 재방영되는 TV드라마라는 약점과, 1세트(8장) 9만9000원이라는 고가에도 불구하고 경이적인 기록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 말했다. ‘네 멋대로 해라’의 박성수 PD는 “악인이 등장하지 않는 드라마를 만드는 동안 ‘골통’ 취급을 받았지만 인터넷 등을 통해 시청자들과 교감하면서 그들이 원하는 것이 제작자의 생각과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극단적인 선악구도를 흥행보증수표로 여긴 것은 작가나 연출자의 안이한 고정관념일 뿐, 오히려 드라마의 사실성을 떨어뜨리고 시청자들이 거부감을 갖게 했던 것. 경제정의실천을위한시민연합 미디어워치 김태현 부장은 “사실상 그동안 흥행한 드라마는 뻔한 스토리에 스타를 기용해 시청자를 사로잡았을 뿐 제대로 된 기획력이나 시나리오로 승부했던 것은 아니다”며 “네 멋대로 해라, 아내, 올인, 눈사람 등이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정형화된 갈등구조만이 시청률을 보장한다는 제작진의 안이한 생각에 직격탄을 날린 셈”이라고 평했다. 그는 또 차카게 신드롬이 “제작진에 의해 인위적으로 제한됐던 시청자 권리를 되찾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고 덧붙였다.

    한편 대중문화 평론가이자 정신과 전문의인 백상빈씨는 ‘차카게’ 신드롬이 현재 대중의 심리상태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분석한다. 그는 “일반인의 힘으로는 상황을 크게 반전시키기 어려운 최근의 정세 때문에 시청자들이 악역보다는 착하고 인간적인 캐릭터에 공감하고, 그들에게서 발견하는 희망으로 위안을 받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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