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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 땐 느리게 사는 種이 유리”

치열한 생존경쟁 뒤집는 ‘붉은 왕’ 이론 등장 … “진화 빠를수록 스트레스 훨씬 더 받아”

  • 허두영/ 한국과학문화재단 전문위원 huhh20@hanmail.net

“공생 땐 느리게 사는 種이 유리”

“공생 땐 느리게 사는 種이 유리”

개미와 나비 애벌레처럼 공생관계일 경우 진화가 빠른 생명체가 상대적으로 느린 생명체의 속도에 맞추는 것으로 나타났다. 뿔개미가 점박이부전나비 애벌레의 입에 먹이를 넣어주고 있는 모습(왼쪽).

”이정도 속도로 달리면 같은 장소에서 벗어날 수 없어. 어딘가 다른 곳으로 가려면 적어도 지금 속도의 두 배로 달려야 한단다.”

루이스 캐럴의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붉은 여왕’의 세계는 마치 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것과 같다. 아무리 달려도 주위는 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속도가 떨어지면 그 자리에서 탈락하고 만다. 따라서 최소한 그 자리에 머물러 있기만이라도 하려면 힘껏 달려야 한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려면 더욱 빨리 달려야 한다. 숨가쁘게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현대인의 삶과 꼭 닮아 있다.

진화생물학 용어 가운데 ‘붉은 여왕 이론(The Red Queen Theory)’이 여기서 유래했다. 모든 생명체는 자신을 위협하는 다른 생물의 진화에 발맞춰 끊임없이 진화하지만 환경도 빠르게 변화하기 때문에 진보가 점점 둔화한다는 이 이론은 기생생물과 숙주, 한 유전자와 다른 유전자, 같은 종의 암컷과 수컷 사이에도 적용된다.

붉은 여왕 이론이 의미가 있는 건 생물의 진화에 영향을 미치는 환경이 기후 조건이나 서식지 같은 물리적인 환경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생물은 다른 생물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기 때문에 적자생존의 ‘생물 환경’이 매우 중요하다. 자신의 천적을 물리쳐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같은 종의 다른 구성원들과도 끊임없이 경쟁해야 한다. 그런데 이 생물 환경은 물리적인 환경과 달라서 그 자체가 진화한다. 육상동물 가운데 순간속력이 가장 빠른 치타는 영양을 더 잘 사냥하기 위해 진화해왔지만, 영양은 영양대로 더 잘 도망갈 수 있도록 진화해왔다.

현대 문명 설명하는 ‘붉은 여왕’ 이론



이렇듯 진화에는 상대적인 의미가 있음을 보여주는 붉은 여왕 이론은 생물의 진화과정은 물론 현대 문명을 설명하는 새로운 이론으로도 각광받고 있다. 최신형 컴퓨터를 구입해도 소프트웨어 용량의 증가로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고물 취급을 받게 되는 것도 이 같은 진화의 상대성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진화경제학이다.

지난해 국내에 소개된 매트 리들리의 명저 ‘붉은 여왕’은 백만장자가 미인을 밝히고, 여자들이 유행에 민감하고, 의처증과 질투, 아름다움의 기준 등 성과 관련된 모든 것이 유전자를 번식하기 위한 진화적 기원을 갖고 있다고 주장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붉은 여왕 이론이 인간에게도 적용되고, 그 최고의 전략은 ‘성’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붉은 여왕 이론에 도전하는 이론이 나와 화제를 모으고 있다. 미국 워싱턴 대학의 칼 버그스트롬(Carl Bergstrom) 박사와 독일 막스플랑크 연구소의 미카엘 라흐만(Michael Lachmann) 박사팀이 미국 국립과학아카데미에 ‘붉은 왕 이론’이라고 명명한 연구결과를 발표한 것. 붉은 왕 이론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주변환경보다 더욱 빠르게 진화해야 한다는 붉은 여왕 이론과 달리, ‘공생관계’에 있어서만은 느리게 진화하는 종이 유리하다고 주장한다.

말미잘과 집게, 뿌리혹박테리아와 콩과(科) 식물, 악어와 악어새, 개미와 진딧물 같은 공생관계에서 각각 진화가 일어날 때 이익을 더 많이 누리는 쪽은 오히려 느리게 진화하는 종이라는 것이다.

개미와 나비 애벌레의 경우를 보자. 캐나다 토론토 대학의 애누라그 애그라왈 박사팀은 2000년 개미와 나비 애벌레의 유기적인 공생관계를 밝혀낸 바 있다. 나비 애벌레는 몸에서 단물을 뿜어내어 개미가 모여들게 하고, 개미는 나비 애벌레에게서 단물을 얻는 대가로 나비 애벌레를 다른 벌레들로부터 보호해준다. 연구팀이 나비 애벌레를 핀셋으로 살짝 눌러 위협하자, 나비 애벌레가 곧바로 평소보다 두 배나 많은 단물을 뿜어냈다. 주변에 있는 개미들을 빨리 불러모아 위기에서 벗어나려는 본능이다. 개미 역시 바빠졌다. 빠르게 몰려든 개미들은 나비 애벌레를 지키기 위해 평소보다 더 오랜 시간을 애벌레 주변에서 머물렀다. 이런 사실은 자연에서도 자신에게 이로운 대상이라면 기꺼이 시간을 할애하고 혜택을 베풀고 있음을 보여준다.

“공생 땐 느리게 사는 種이 유리”

지난해 국내에서 출간되어 화제를 모은 책 ‘붉은 여왕’은 붉은 여왕 이론을 인간에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나비 애벌레가 공급하는 단물의 양과 개미가 요구하는 양을 맞출 수 있느냐는 것이다. 버그스트롬 박사와 라흐만 박사팀은 개미와 나비 애벌레가 공생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 나비 애벌레는 단물을 얼마나 제공해야 하고, 개미는 얼마나 받아야 하는지 하는 협상관계에 대해 연구했다. 그리고 진화적인 게임 이론을 적용한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이 문제의 해답을 얻었다. 단물의 양은 나비 애벌레와 개미가 얼마나 빨리 진화하는가에 달려 있는데 만약 일부 개미가 빨리 진화해서 더 많은 단물을 필요로 해도 나비 애벌레가 적은 양의 단물밖에 공급할 수 없다면 그 개미들은 다른 공급처를 찾아야만 한다. 그러나 모든 개미들이 좀더 많은 단물을 제공하는 다른 애벌레를 찾아 나선다면 애벌레는 더 많은 양의 단물을 공급하는 방향으로 진화할 것이다. 그래야만 개미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미들이 다른 공급처를 찾아 떠나지 않는다면 적은 양의 단물에 만족하는 쪽으로 진화할 수밖에 없다.

나비 애벌레가 개미가 요구하는 만큼 많은 단물을 제공할 수 없고, 개미도 새로운 단물의 원천을 쉽게 발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타협이 불가피한 것. 이럴 경우 개미는 단물의 요구량을 조금 줄이고, 애벌레는 단물의 생산량을 조금 늘리며 느린 속도로 함께 진화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버그스트롬 박사는 “따라서 빠르게 진화하는 종은 느리게 진화하는 종에 비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공생관계에서는 느리게 진화하는 쪽이 빠르게 진화하는 쪽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이번 실험결과만을 가지고 ‘자연선택설’이 느리게 진화하는 쪽을 선택할 것으로 내다보지는 않았다. 그는 “다만 이번 연구는 진화론의 한 부분을 보여주는 것”이며 “붉은 왕 이론이 공생관계의 형태와 특징을 결정짓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공생관계의 협상과정에서 한쪽이 협상의 여지가 없을 경우 다른 한쪽은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게 사실이다. 체스 게임에서도 이러한 경우를 보게 되는데 여왕은 가로, 세로 및 대각선 방향으로는 어디든지 움직일 수 있는 반면 왕은 어느 방향으로든 한 칸밖에 움직일 수 없다.

그렇다면 왕과 여왕 중 누가 유리할까? 왕은 한 번에 한 칸씩 움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둘의 만남을 서두르려면 결국 여왕이 가능한 자주 움직여서 왕이 있는 쪽으로 와야 한다. 서로 안 보고 살 수 없는 관계라면 조급해하고 답답해하는 것은 빠른 쪽이라는 이야기다.



주간동아 373호 (p62~63)

허두영/ 한국과학문화재단 전문위원 huhh2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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