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72

2003.02.20

강남 뭉칫돈 어디로 가시나이까

큰손들, 증시·부동산 떠나 장외시장·해외펀드로 눈길 … 초단기상품 투자하며 관망세 유지 경향도

  • 구미화 기자 mhkoo@donga.com

    입력2003-02-14 13: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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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남 뭉칫돈 어디로  가시나이까

    마땅한 재테크 방법이 없어 골머리를 앓는 초저금리 시대, 강남 큰손들의 뭉칫돈 행방이 관심을 모은다.

    2월7일 오전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동부금융센터 25층에 자리잡은 신한은행 강남PB(프라이빗 뱅크)센터 이벤트 룸. 신한은행 PB센터가 새 고객으로 ‘모시기’ 위해 특별히 초청한 17명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중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그룹의 고문도 끼여 있었다. 신한은행 PB센터가 대상을 10억원 이상의 금융자산 예탁고객으로 한정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최소 10억원의 여유자금을 굴리고 있는 고액 자산가, 소위 ‘큰손’들이 모인 셈이다.

    신한은행 PB센터가 예비고객을 사로잡기 위한 방법으로 택한 건 ‘상속 증여세 완전포괄주의’에 관한 세무강의. 신한은행 PB센터 위성호 센터장은 “새 정부 경제정책 메시지가 확실하게 전달되지 않은 상황이라 고객들이 불안해하고 있어 포괄주의에 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자리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전화로 초청한 18명 가운데 17명이 이날 강연회에 참석했다. 강남 ‘큰손’들이 새 정부의 상속 증여세 완전포괄주의 실시 방침에 얼마나 민감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삼성증권 PB센터인 삼성FnHonors 청담점 고객 110명이 맡긴 자산의 평균 금액은 15억~20억원. 고객의 나이와 직업, 투자성향 등에 따라 자산을 배분한 포트폴리오는 천차만별이지만 평균적으로 보면 20억원 중 60%는 머니마켓펀드(MMF)와 단기채권형펀드, 20%는 직접 국공채나 회사채를 매입하는 채권 실무투자, 그리고 나머지 20%는 주식에 투자하고 있다고 한다.

    새 정부 경제정책 향방 ‘불안 속 예의 주시’

    MMF는 투신사가 고객의 돈을 양도성예금증서(CD) 기업어음(CP) 단기채권 등 단기상품에 집중투자해 여기서 생기는 수익을 돌려주는 실적배당형 상품. 주식은 삼성전자, SK텔레콤, 국민은행 등 우량주만 고집한다. 김선열 지점장은 “PB센터를 찾는 고객들은 수익률이 은행 예금금리보다 1%포인트만 높아도 만족한다”며 “대박을 노리며 투자 자문을 구하는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지난해 강남의 한 PB센터에서는 10여명의 고객이 50~100%의 높은 수익률을 올렸다. 이들은 하나같이 부동산으로 재미를 봤는데 주로 30억~50억원 가량의 자금을 건물에 5~6개월 투자한 뒤 매매차익을 노리는 방식을 이용했다. 정부의 감시 대상이 되는 아파트는 이들의 영역이 아니다.

    실제 고객 A씨는 지난해 17억원에 매입한 청담동 지역 토지에 다시 17억원을 들여 건물을 지었는데 건물이 완공되자마자 60억원에 팔렸다. 앉은자리에서 26억원을 번 셈이다. A씨는 이 돈으로 같은 해 10월, 고급 수입명품 매장이 밀집해 있는 청담동 거리에 위치한 5층짜리 건물을 샀다. 현재 이 건물의 시세는 80억원을 넘어섰다. A씨는 1년 이내에 100억원에 팔 수 있을 것이라며 여유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최근 부동산 투기 억제 바람이 강하게 불면서 부동산 쪽 자금은 씨가 말랐다고 한다. 한 투자자문회사 사장은 “최근엔 부동산을 매각하는 등 자산을 현금화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고 말했다. 하나은행 PB지원팀 김성엽 재테크팀장도 “지난해 상반기를 지나면서 부동산을 사기 위해 거액이 빠져나가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며 “대부분의 고객들이 올해 부동산 수익률이 높지 않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부동산 틈새상품으로 펜션 임대사업 정도에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PB 매니저들은 큰손들이 여전히 부동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전한다. 큰손들에게 투자 자문을 하고, 장외거래를 주선하는 사업가 B씨는 “금융상품으로는 자산을 늘리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큰손들은 언제든 부동산으로 한탕 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고 말한다.

    강남 뭉칫돈 어디로  가시나이까

    대우증권 PB센터. 큰손들은 지난해부터 본격 서비스에 들어간 PB센터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적절한 절세 방법과 투자처를 모색한다. 대한투자신탁증권의 자산관리 프로그램 광고. 고급스럽게 꾸며진 삼성증권 PB센터. 큰손들의 일부 자금이 국공채 및 우량 기업의 채권으로도 흘러들고 있다(왼쪽 부터).

    일부 공격적인 큰손들은 거래소와 코스닥 침체가 계속되자 장외시장으로 자금을 옮기고 있다. 사업가 B씨는 “큰손들이 비상장사 중 삼성캐피탈, 교보자동차보험 등 우량기업과 로또 관련 기업의 주식을 대량 매입해 재미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로또 당첨금이 이월되기 시작한 지난달 로또 시스템 사업자인 코리아로터리서비스(KLS) 주식 60만주를 매입해 한 달여 만에 수십억원을 번 사람도 있다. 장외시장에서 KLS의 주당 가격은 2월7일 현재 2만9200원으로, 이는 주초보다 8700원 오른 금액이다.

    일명 ‘묻지마 채권’으로 불리는 비실명 채권도 부유층이 선호하는 재테크 수단 중 하나다. 비실명 채권은 채권 발행시 실명확인 절차가 없고, 채권 소지인에게 어떤 자금으로 채권을 취득했는지 묻지 않을 뿐 아니라 취득 전에 성립된 어떤 세금도 부과하지 않아 거액의 금융 자산가들이 자녀에게 상속 및 증여의 목적으로 사용하기 적합하기 때문. 일반 채권은 만기일까지 남은 기간에 따라 할인된 가격으로 판매되는 것이 보통이나 비실명 채권은 오히려 프리미엄을 얹어서 거래되고 있다. 그러나 신한은행 PB센터 위성호 센터장은 “비실명 채권을 만기일까지 보유하지 않고 중간에 양도할 경우 적용되는 세율에 대한 뚜렷한 유권해석이 없고, 진위 여부를 가리기 어려운 위조채권도 많아 위험이 따른다”고 지적했다.

    일부 큰손들 가운데는 국내에는 마땅한 투자처가 없다고 판단, 해외로 눈을 돌리는 사람도 있다. 한 투자자문회사 사장은 “일부 큰손들은 한국이 최악의 경우 중국 성장의 역풍을 맞고 중남미 정도는 아니어도 일본과 같이 장기 불황에 빠질 수도 있다고까지 우려하며 자산의 해외 이전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더욱이 성장과 분배의 조화를 외치는 새 정부 경제정책이 어떤 것인지 확실한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은 상황이라 해외투자를 선호한다는 것.

    “큰손들 자산 해외로 옮겨지면 자본공동화 우려”

    이를 증명하듯 슈로더, 피델리티 등 세계적인 전문투자기관이 운용하는 해외펀드가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해까지 일부 증권사와 외국계 은행들에서만 판매되던 해외펀드가 최근엔 시중은행과 대부분의 증권회사로 확산되는 추세다.

    지난해 12월 말부터 미 달러화 채권펀드 피델리티를 판매하기 시작한 미래에셋증권의 경우 2월 초까지 모두 410억원어치가 팔렸는데 이중 160억원이 개인투자자에게 판매됐다.

    미래에셋증권 최수환 금융상품 마케팅 팀장은 “지난해와 달리 올해 해외채권펀드가 인기를 끄는 것은 국내 채권 금리가 하락한 반면 해외펀드는 환율변동 위험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정기예금 금리가 연 4∼5%에 머무는 상황에서 이들 펀드는 ‘정기예금 금리+α’의 수익률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 만기 때 환율 변동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미리 펀드 설정 때 ‘환위험 헤지’를 함으로써 약 2.5%의 수익률을 가입 당시 확정짓는 이점까지 있다는 것.

    그러나 해외펀드의 경우 미국 주가가 회복되고 금리가 오를 경우 국내 펀드보다 리스크가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전문가들은 또 “해외 간접투자 형태로 큰손들의 자산이 해외로 옮겨지는 현상이 심화되면 자본공동화 현상이 일어나 일본과 같은 장기 불황이 올 수도 있다”고 전망한다.

    요즘 들어 PB센터나 투자자문회사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10억원 이상의 여유자금을 가진 큰손들이 대부분 관망하고 있다고 말한다. 지금 같은 불확실성 시대에는 큰손들이 두드렸던 돌다리도 다시 두드리는 추세라는 것. 신한은행 위성호 PB센터장은 “지난해 6개월~1년 단위로 투자하던 자금이 올해 들어 3개월 미만의 초단기성으로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시중자금이 MMF를 비롯한 초단기 상품으로 몰리고 있다. MMF는 시중금리가 아닌 편입 당시 장부가로 평가하기 때문에 확정금리 효과를 얻을 수 있고, 비교적 입출금이 자유로워 금리가 오르면 언제든 갈아탈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지난해 12월, 40조원대에 불과했던 MMF 수탁고는 2월8일 현재 57조7052억원을 기록하고 있으며 1월중 한때 60조원을 넘어서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결국 새 정부의 경제정책이 확실한 모습을 드러내야 큰손들의 본격적인 움직임도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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