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72

2003.02.20

방화=코미디 외화=드라마 ‘편식’

우리 관객들 영화 선택 성향 … ‘웃겨야 대박’ 한국영화 제작 환경도 바꿔

  • 전찬일 / 영화평론가 chanilj@hanafos.com

    입력2003-02-13 13: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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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화=코미디 외화=드라마 ‘편식’

    ▲ 국내 관객은 전통적으로 드라마를 선호했지만 92년 ‘결혼 이야기’ 이후 코미디를 선호하기 시작했다. 크게 히트한 ‘색즉시공’(왼쪽)과 ‘가문의 영광’. <br> ▼국내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장르의 외화들. ‘오션스 일레븐’ ‘마이너리티 리포트’ ‘사랑과 영혼’(왼쪽부터).

    요즘 강하게 표출되고 있는 우리 관객들의 영화 선택 성향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결과가 나온다. 외국영화는 예나 지금이나 드라마를 선호하는 반면 국산영화는 뚜렷하게 코미디를 선호하는 것 같다.

    부연하면 외국영화를 볼 때는 ‘스펙터클’-여기엔 특수효과와 스타 등 화려한 볼거리뿐만 아니라 인상적 음악 등 음향 요소들도 포함된다-이 뒷받침되는 이야기를 중시하고 국산영화를 볼 때는 액션, 멜로, 섹스 등이 적당히 가미된 화끈한 웃음을 추구한다. 결론적으로 영화의 국적에 따라 대조적인(혹은 이중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지나친 일반화의 위험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간의 흥행기록을 보면 이 같은 결론을 도출하기는 어렵지 않다. 2002년의 경우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부터 ‘오션스 일레븐’에 이르는 외국영화 흥행 10선 중에 코미디물은 7위작 ‘맨 인 블랙 2’가 유일하다. 반면 한국영화 흥행 순위를 보면 1위작 ‘가문의 영광’을 필두로 4위작 ‘광복절 특사’, 6위작 ‘색즉시공’, 8위작 ‘몽정기’, 9위작 ‘YMCA 야구단’ 등이 모두 코미디물이다.

    사실 우리나라 관객들은 전통적으로 드라마를 선호해왔다. 특히 외국영화의 경우는 두말할 나위 없다. 무려 168만3000여명(이하 서울 기준)의 관객을 동원하는 기염을 토하며 1991년 흥행 1위에 등극한 ‘사랑과 영혼’-당시 우리 영화 1위는 임권택 감독의 ‘장군의 아들 2’였는데 관객 수는 겨우 35만7000여명이었다-을 비롯해 ‘E.T.’(1984) ‘킬링 필드’(1985) ‘아마데우스’(1986) ‘플래툰’(1987) ‘원초적 본능’(1992) ‘타이타닉’(1998) ‘미이라’(1999) ‘미션 임파서블 2’(2000) 그리고 ‘마이너리티 리포트’(2002)에 이르기까지, 그해 흥행 순위 상위에 오른 영화들은 거의 예외 없이 다양한 색깔의 드라마들이었다. ‘귀여운 여인’(1990) 같은 예외가 있었으나 코미디는 극히 드물었다.

    우리 영화들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별들의 고향’(1974) ‘영자의 전성시대’(1975) ‘겨울여자’(1977) ‘애마부인’(1982) ‘고래사냥’(1984) ‘깊고 푸른 밤‘(1985) ‘어우동’(1986) ‘매춘’(1988) ‘서울 무지개’(1989) 등 70~80년대의 대표적 흥행작들을 떠올려보라.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1987) 등의 코미디물이 있지만 역시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다 이전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변화를 가져온 기념비적 작품이 등장했는데 그것이 바로 1992년에 발표된 로맨틱 코미디 ‘결혼 이야기’다.



    전통적으로 드라마 선호 … 1992년부터 뚜렷한 변화

    1993년의 ‘서편제 열풍’으로 잠시 주춤거리긴 했으나 이후 불어닥친 로맨틱 코미디 바람은 그간 드라마에 비해 뚜렷한 열세를 보여왔던 코미디들이 약진하는 계기가 됐다. ‘투캅스’ ‘마누라 죽이기’ ‘투캅스 2’에 이르기까지 1994년부터 3년 연속 코미디가 박스 오피스 1위를 차지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1995년 흥행 2위작이 되면서 한석규를 스타덤에 올린 ‘닥터 봉’도 코미디였다. 서편제의 해였던 1993년에도 ‘그 여자 그 남자’(2위)를 위시해 ‘가슴 달린 남자’(4위) ‘백한 번째 프로포즈’(5위) ‘사랑하고 싶은 여자, 결혼하고 싶은 여자’(6위) 등 흥행 순위 상위작들은 대부분 로맨틱 코미디였다.

    그러나 1997년을 기점으로 코미디 열풍은 한풀 꺾였다. ‘편지’와 ‘접속’ ‘8월의 크리스마스’ 등 멜로드라마로부터 일대 반격을 당한 것이다. 드라마의 우세는 ‘쉬리’와 ‘공동경비구역 JSA’가 연이어 영화 흥행 역사를 다시 쓴 1999년과 2000년에도 지속됐다. ‘쉬리’에 이어 당당히 흥행 순위 2위에 오르며 뒷날 불어닥칠 코미디 열풍의 주요 기폭제가 된 ‘주유소 습격사건’이 등장했던 1999년과는 달리, 2000년은 특히 코미디가 아사 직전까지 갔던 해였다. 코미디로 분류할 수 있을 ‘반칙왕’(2위)을 제외하면 흥행 순위 10위권 안에 코미디물은 없었다.

    방화=코미디 외화=드라마 ‘편식’

    ‘결혼 이야기’(위)와 ‘엽기적인 그녀’.

    1994~96년 반짝했던 코미디 강세가 다시 이어진 건 ‘친구’ 폭풍이 한국사회를 강타했던 2001년이었다. 전년도와 비교하면 그 양상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엽기적인 그녀’ ‘신라의 달밤‘ ‘조폭 마누라’ ‘달마야 놀자’ ‘킬러들의 수다’에 이르는, 흥행 순위 상위작들은 말할 것 없고 8, 9위의 ‘두사부일체’ ‘화산고’까지도 모두 광의의 코미디, 그것도 대개는 ‘친구’의 조폭 코드를 적극 활용한 조폭(성) 코미디들이었다. 게다가 그 전해까지만 해도 100만명을 넘은 작품은 ‘서편제’와 ‘쉬리’ ‘공동경비구역 JSA’ 세 편에 불과했건만, 2001년에만 무려 다섯 편이, 그것도 최소 30만명 이상 추월하면서 100만 고지를 넘어섰다. 같은 나라의 같은 영화 관객들이 1년 사이에 어떻게 그처럼 급격히 변모된 기호를 드러낼 수 있는지 놀라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2001년만큼은 아니어도 2002년에도 코미디 우세는 여전했다. 의외의 복병 ‘가문의 영광’이 등장해 ‘집으로…’의 돌풍을 잠재웠다. 기존의 조폭 코드에다 거부하기 힘든 가족 이데올로기를 결합시킨 이 영화는 코미디가 ‘흥행 대박’의 필요조건이란 사실도 확인시켜주었다. 영화계에서 코미디 전략을 취하지 않고는 대박의 꿈을 실현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게끔 한 것이다.

    지난해 흥행 3위작인 ‘공공의 적’이 “전국 500만명은 넘을 것”이라던 강우석 감독의 예상과는 달리 그 목표치에 한참 못 미치는 300만명 선에 그친 까닭도 실은 그 영화가 본격 코미디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형사 액션물은 ‘가문의 영광’ ‘신라의 달밤‘ ‘조폭 마누라’ 등 훨씬 큰 돈을 벌어들인 여타 영화들과 비교하면 작품성에서 단연 앞선다. 전례 없이 대규모의 배급 전략을 취했음에도 한국 영화계 파워 1인자라는 강감독의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이 진단은 5위를 마크한 ‘2009 로스트 메모리즈’에도 거의 그대로 적용된다.

    물론 공포물 ‘폰’(7위)과 멜로물 ‘연애소설’(10위) 등이 선전하긴 했지만 코미디 우세는 확연히 두드러진다. 2002년 작품 중 2003년으로 이월되며 400만명 선마저 돌파한 ‘색즉시공’에 이르면 코미디물에 대한 관객들의 편식 성향은 더욱 두드러진다. 물론 임창정의 열연이 흥행의 주된 요인으로 작용했지만 천박-영화는 자칭 ‘풍기문란 섹시 코미디’임을 표방했다-하리만치 노골적으로 섹스를 전면에 내세우며 이처럼 대박을 터뜨린 예는 영화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다.

    ‘색즉시공’의 기념비적 개가를 한국 관객의 영화 선택 성향이 드라마에서 코미디로 근본적으로 변화했다는 사실을 예시하는 지표로 해석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이 추세는 ‘이중간첩’과 ‘클래식’ 등 드라마의 흥행 부진과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반면 외국영화의 경우는 드라마 선호 경향이 더욱 강해질 듯하다. 다시 말하면 우리 영화에서는 맹목적이건 합리적이건 간에 웃음을 통한 카타르시스나 위안을, 외국영화에서는 ‘스펙터클’을 수반한 보편적 재미와 감동을 찾는 쪽으로 치달으리라는 것이다. 이 경향을 이중적ㆍ편파적ㆍ편식적이라고 비판하든, 상호보완적이며 당연한 대세라고 긍정하든 하나의 뚜렷한 흐름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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