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72

2003.02.20

눈이 빚은 눈부신 ‘국보급 풍광’이여

  • 양영훈 / 여행작가 www.travelmaker.co.kr

    입력2003-02-12 17: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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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이 빚은 눈부신  ‘국보급 풍광’이여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부석사 삼층석탑을 돌고 있는 관광객.

    눈 없는 겨울 풍경은 그야말로 ‘앙꼬 없는 찐빵’이다. 하지만 근사한 설경을 구경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눈만 풍성하게 내려준다면 도시에서도 멋진 설경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뿐. 모든 길이 빙판으로 변하고 차 안에 갇힌 채 하염없이 도로 위에 서 있다 보면 운치 있게 내린 눈은 어느덧 교통체증의 원흉이 되고 만다.

    사실 눈길은 아무리 교통량이 적은 시골길이라 해도 조심할 수밖에 없다. 부지불식중에 속도를 높이거나 급정거를 했다가는 길가 도랑이나 논둑에 처박히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눈길에서는 조바심 내지 말고 ‘설설 기는’ 게 상책이다. 눈이 많으면 길이 위험하고, 도로 사정이 좋은 날에는 아름다운 설경을 보기가 어렵다는 게 겨울여행의 딜레마다.

    하지만 이런 딜레마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운 교통수단이 하나 있다. 바로 열차다. 철길이 유실되거나 철교가 끊기거나 터널이 무너지는 자연재해만 없다면 열차는 안전하게, 그것도 정확한 시간에 목적지에 닿는다. 그런 이점 때문에 ‘눈꽃열차’의 인기는 나날이 높아가고 있다. 현재 철도청의 대표적인 테마여행 상품으로 자리잡은 ‘눈꽃 기차여행’에는 1998년에 처음 선보인 ‘환상선 눈꽃 순환열차’를 비롯해 ‘정동진·대관령 눈꽃 기차여행’ ‘무주 덕유산 눈꽃 기차여행’ ‘태백산 눈꽃·눈썰매 열차’ ‘소백산 눈꽃·부석사 기차여행’이 있다.

    소수서원 솔숲 겨울에 더 운치

    눈이 빚은 눈부신  ‘국보급 풍광’이여

    풍기역 앞의 풍기인삼시장(위). 소수서원을 찾은 사람들이 자원봉사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눈꽃열차라고 해서 눈꽃 구경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철도청의 눈꽃열차 여행상품 안내란에 ‘눈이 내리지 않는 경우나 비가 내리는 경우 겨울 눈꽃을 보지 못할 수 있으니 이용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라는 구절이 어김없이 들어가 있는 것을 보면, “왜 눈꽃을 볼 수가 없느냐”며 항의하는 사람이 없진 않은 모양이다.



    설 연휴가 시작되기 직전 소백산 눈꽃·부석사 기차여행에 나섰다. 청량리역을 출발하기 전부터 간간이 싸라기눈이 흩날렸다. 양평을 지나면서부터는 점차 눈발이 굵어지더니 원주쯤부터는 함박눈으로 바뀌었다. 차창 밖으로 ‘야백(野白·원래는 月白)’ ‘설백(雪白)’ ‘천지백(天地白)’의 근사한 설경이 끊임없이 이어지자 객실을 가득 채운 승객들이 탄성을 연발한다. 모두들 눈꽃열차의 매력과 안정성을 새삼 실감하는 듯했다. 대설 속에서도 09시 청량리발 안동행 새마을호 열차는 역시 정확한 시간에 풍기역에 도착했다. 부석사와 소수서원을 오가는 교통편은 역 앞에 미리 기다리고 있던 현지 여행사의 관광버스를 이용했다. 부석사 입구의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부석사로 향했다.

    부석사는 신라 통일기인 676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의상이 이곳에서 화엄사상을 완성하고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내면서 부석사 또한 화엄종의 종찰(宗刹)로 자리잡았다. 9세기 들어서 고승대덕(高僧大德)이 많이 배출되었고, 오늘날 이 절의 웅장한 가람 배치를 대표하는 대석단(大石壇)이 축조되었다. 그러나 많은 건물이 고려 공민왕 7년(1358)에 왜구들의 침입으로 소실되었다가 1376년에 원응스님에 의해 중건되었다.

    아무리 풍광이 수려한 명승지나 명산대찰도 자주 보면 식상해지게 마련이지만, 부석사는 열 번 스무 번을 찾아도 또 가고픈 절이다. 창건주인 의상대사와 선묘낭자의 전설은 1300여 년이 흐른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아름답게 전해오고, 의상대사의 이상세계가 조형적으로 구현되었다는 가람 배치와 간결하면서도 장중하고 단아한 무량수전(국보 제18호)은 볼 때마다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절집 자체의 분위기와 느낌도 철마다 다양하고 조석(朝夕)으로 달라진다. 더욱이 눈까지 풍성하게 내린 겨울날의 풍경은 그 자체만으로도 국보급이다.

    눈이 빚은 눈부신  ‘국보급 풍광’이여

    참나무와 산죽 우거진 부석사 숲길.소수서원 입구의 솔숲. 적당히 뒤틀리고 구부러진 노송이라 한결 멋스럽다(왼쪽 부터).

    무량수전 안에는 고려 때에 만들어진 소조여래아미타좌상(국보 제45호)이 봉안돼 있다. 흙으로 만들어진 이 여래불은 당당한 체구에 빼어난 균형미를 자랑한다. 의상대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조사당(국보 제19호)도 무량수전과 같은 시기에 지어진 건물이다. 참나무와 산죽 우거진 숲길을 지나 조사당에 오르면 간결하고 단정한 맞배지붕집이 먼저 눈에 띄고, 그 앞의 철창 안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의상대사의 지팡이였다는 선비화(僊扉花)가 있다. 조사당 내부의 벽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벽화(국보 제46호)가 그려져 있었으나 지금은 무량수전 아래쪽의 유물 전시각으로 옮겨졌다.

    이처럼 부석사에는 사람들의 눈길과 마음을 끄는 것이 한둘이 아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긴 여운을 남기는 것은 무량수전 앞마당에 홀로 서 있는 석등(국보 제17호)이 아닐까 싶다. 언뜻 소박하고 평범해 보이지만 세세히 살펴보면 조각이 매우 정밀하고 화려하다. 특히 화사석(火舍石·석등에서 불을 켜는 부분)에 새겨진 공양보살상은 수줍은 미소를 머금은 채 다소곳이 서 있는 자태가 너무나 고혹적이고 생동감 넘친다. 이 석등이 우리나라 석등 가운데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처럼 부석사에는 그 가치와 아름다움을 미처 알지 못하고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문화재와 유물이 수없이 많다. 사실 한두 번 가보고서는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끼기 어려운 곳이 부석사다.

    부석사를 뒤로 하고 소수서원으로 향했다. 부석사에 머무는 동안 그쳤던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소수서원은 입구의 솔숲이 특히 아름답다. 세한삼우(歲寒三友) 중 하나인 소나무의 청징(淸澄)한 기품과 늠름한 기상은 아무래도 눈 속에서 더욱 돋보인다. 더욱이 이곳의 소나무는 적당히 뒤틀리고 구부러진 노송이라 한결 멋스럽다. 솔숲의 운치에 빠진 나머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賜額書院)이자 최초의 사립교육기관이라는 서원은 제대로 눈여겨볼 겨를조차 없다.

    제법 쌀쌀한 날씨 속에서 온종일 돌아다녔는데도 일행들의 얼굴에서는 피곤한 기색을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눈 구경 한번 제대로 했다는 뿌듯함 때문인지 생기 있고 들뜬 표정들이다. 눈꽃열차 여행은 역시 함박눈이 쏟아져야 제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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