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65

2002.12.26

윈스턴 처칠 경이 전범?

獨 역사학자 책 통해 “공습 지시로 수많은 독일 민간인 살상 … 제네바 협약 위반”

  • 안병억/ 런던통신원 anpye@hanmail.net

    입력2002-12-18 13: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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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스턴 처칠 경이 전범?

    재건중인 드레스덴 성모 마리아 교회(왼쪽)와 시가를 문 익살스러운 표정의 윈스턴 처칠. 처칠은 최근 영국인이 뽑은 ‘가장 위대한 영국인’ 1위로 선정됐다.

    독일 드레스덴을 여행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복구작업이 한창인 성모 마리아 교회(프라우엔 키르헤)를 기억할 것이다. 독일의 귀중한 문화유산인 이 교회는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들던 1945년 2월13일 영국 공군의 공습으로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당시 영국군의 무차별 공습으로 드레스덴 시민 3만5000명이 숨졌다고 한다.

    40년 넘게 폐허로 남아 있던 성모 마리아 교회는 1997년부터 복구에 들어가 2006년께 공사가 마무리될 예정이다. 영국 재계는 독일과 영국의 화해 노력의 일환으로 복구비용 일부를 기부하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독일의 역사학자인 외르크 프리드리히가 ‘방화: 폭격당하는 독일, 1940~1945’라는 책을 출판해 적잖은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이 책은 영국 공군에 공습을 지시한 윈스턴 처칠 경을 사실상 전범이라고 규정했다. 이에 발끈한 영국은 공습을 히틀러의 선제공격에 대한 정당방위 행위라고 옹호했다. 이 문제로 영국과 독일 두 나라 사이에는 때아닌 역사전쟁이 벌어졌다.

    獨 63만명 2차대전 때 공습 사망

    윈스턴 처칠 경이 전범?

    2차대전 당시 독일군이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모습.

    외르크 프리드리히의 책에 따르면, 2차 대전 당시 영국군의 공습으로 숨진 독일인은 63만명, 독일군의 공습으로 숨진 영국인은 4만명 정도다. 프리드리히는 2차 대전 당시 공습을 지시한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가 히틀러의 영국 공격에 대한 대응책이 아닌, 독일 도시와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폭격을 명령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1차 대전 당시 처칠이 ‘다음 전쟁은 여성과 어린이, 민간인을 공격하는 전략이 효과적’이라고 말했던 점을 상기시킨다. 또 ‘민간인과 도시 공습의 문제는 긴 옷을 입을 것이냐 짧은 옷을 입을 것이냐 하는 유행 문제와 같다’고 한 처칠의 발언도 지적했다. 처칠이 공습의 도덕성을 옹호했다는 것이다. 프리드리히는 2차 대전 당시 영국 공군이 독일의 주요 도시를 공습한 것은 민간인을 죽이기 위한 의도적인 행위이며, 따라서 처칠 경은 전쟁에서의 민간인 보호를 규정한 제네바 협약을 위반한 전범이라고 결론지었다.

    프리드리히의 주장은 이제까지의 역사 서술을 뒤집는 폭탄선언이나 다름없다. 2차 대전 당시 군사시설이 아닌, 도시와 민간인 공습에 대한 지금까지의 역사 서술은 이렇다. 1940년 8월24일 영국의 군사시설을 공격하러 나선 독일 공군이 실수로 런던을 공습했다. 처칠 총리는 이 공격을 독일군의 의도적인 전략이라고 판단했다. 다음 날 영국 폭격기 40대가 베를린을 공습했다. 히틀러는 영국 공군의 공습을 백 배로 보복하겠다고 천명, 9월 말까지 런던과 중부 링컨셔 등 주요 영국 도시를 공습했다. 이때 버킹엄궁 일부도 폭격으로 파괴됐다. 특히 영국 중부의 공업도시 코벤트리의 경우, 1940년 11월14일부터 이틀에 걸친 독일 공군의 집중폭격으로 568명의 시민이 사망하고 대부분의 시가지가 파괴됐다. 이 몇 달간의 공중전은 ‘영국 전투(Battle of Britain)’라고 불린다.

    영국 공군의 비행기 수는 독일 공군에 비하면 3분의 1에 불과했다. 그러나 레이더와 우수한 조종사 덕분에 전력의 절대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독일 공군을 이길 수 있었다. 이후 1941년 12월 미국이 2차 대전에 참전하자 영국 공군은 미 공군과 함께 이듬해 3월부터 독일 도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때 함부르크와 드레스덴, 쾰른 등 대부분의 독일 도시들은 융단폭격을 당하다시피 했다. 이 공습으로 독일의 수많은 문화재들이 파괴된 것은 물론이다. 유일하게 폭격을 피한 도시가 대학도시로 유명한 하이델베르크였다. 당시 미군 지휘관 중에 하이델베르크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이 아름다운 대학도시를 공습하는 것에 반대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 하이델베르크에는 미 군사정부가 설치되었다.

    외르크 프리드리히의 ‘방화’는 독일 최대의 판매부수를 자랑하는 타블로이드 일간지 ‘빌트’에 연재됐다. 한 비평가는 이 책을 ‘독일 역사의 큰 틈을 메운 귀중한 연구’라고 평가했다. 1618년부터 30년간 당시 유럽의 주요 국가들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로 나뉘어 전쟁을 벌여 유럽대륙을 초토화한 30년 전쟁 이후, 역사상의 대파괴를 체계적으로 연구했다는 분석이다. 그리고 딱딱한 역사 서술에서 벗어나 당시 피해자들의 서술을 토대로 밤마다 공습에 대한 공포에 떨며 잠도 자지 못하고 대피했던 시민들의 상황을 실감나게 묘사한 점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영국 역사가들의 평가는 이와 사뭇 다르다. ‘베를린, 1945년 몰락’을 쓴 영국 역사가 앤서니 베포어는 이 책의 주장은 전후가 틀렸다고 지적한다. 베포어는 프리드리히가 영국 공군과 연합군의 독일 도시 공습은 히틀러의 영국 도시 공습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민간인 공습에 대한 도덕성 문제 등을 논의할 수는 있지만 처칠이 전범이라는 주장은 과장되었다는 것이다. 또 베포어는 이 책이 독일 통일 이후 기세를 떨치고 있는 독일의 극우 신나치주의자에게 좋은 무기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방화’가 이처럼 논쟁을 불러일으키자 당사자인 외르크 프리드리히는 독일 방송 ‘도이체벨레’와의 인터뷰에서 직접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다. 그는 학자의 양심으로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려고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 따라서 자신은 신나치주의자가 아니며 이들을 돕기 위해 이 책을 쓴 것이 아니라고 못박았다.

    이 책은 그동안 독일 사회에서 금기시되어왔던 역사적 문제를 본격적으로 규명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여기에서 제기된 주장은 영국 역사학자의 반박에서 볼 수 있듯이 좀더 체계적으로 다루어질 필요가 있다. 분명한 것은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처럼 이 책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지는 않고 있다는 점이다. 또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귄터 그라스가 올 초 ‘게걸음 속에서’라는 소설을 통해 1945년 1월 말 발트해에서 소련군의 어뢰공격으로 침몰, 9000명이 넘는 독일인이 숨진 여객선 ‘빌헬름구스틀로프’ 사건을 다루고 있듯이, ‘방화’ 역시 터부시해 다뤄지지 못했던 역사적 사건을 공론화했다는 의미가 크다(‘주간동아’ 325호 기사 참조).

    그동안 갖가지 방법으로 사죄와 보상을 해왔지만 아직도 ‘2차 대전을 일으킨 장본인’이라는 역사의 멍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독일. 반면 윈스턴 처칠 경은 최근 영국인이 뽑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국인으로 선정됐다.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처칠은 시가를 입에 문 채 승리의 V 사인을 그리는 모습으로 영국인들의 기억 속에 자랑스럽게 남아 있다. 이런 처칠 경이 외르크 프리드리히의 주장처럼 차후 역사의 법정에서 영국의 국민적인 영웅이 아닌 전범으로 단죄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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