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54

2002.10.10

무차별 폭로전 … 저격수들 살판났네

대북 뒷거래설·도청설·성상납설 등 온통 說 說 說 … 검증은 뒷전 ‘일단 터뜨리고 보자’

  • 김시관 기자 sk21@donga.com

    입력2002-10-04 14:44: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무차별 폭로전 … 저격수들 살판났네

    대북 4억달러 자금제공설을 터뜨린 한나라당 엄호성, 이재오, 김문수 의원과 대한생명 인수 로비설을 터뜨린 정형근 의원(오른쪽부터)이 9월27일 의원총회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한나라당 ‘김대업 정치공작 진상특위’의 한 위원은 최근 김씨와 관련한 제보를 받고 확인작업에 들어갔다. 그 결과 김씨가 구치소 생활중 변호사법을 위반한 사실과 이를 뒷받침할 만한 물증(문건)을 확보했다. 그는 9월27일, 피해자와 함께 고소장을 썼다. 구속까지 가능하다는 게 당 소속 한 율사의 판단이다. 한나라당은 폭로 시기를 조율, 병풍(兵風) 파동의 반전을 꾀할 예정이다.

    한나라당 당직자 L씨는 9월 초부터 정몽준 의원과 관련한 첩보·정보 수집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퇴직한 구 현대그룹 임원과 국민당 당직자, 심지어 삼성 등 재벌기업은 물론 월드컵조직위원회와 축구협회 등 정의원의 발길이 머문 곳은 한 곳도 빠짐없이 샅샅이 뒤졌고 이는 ‘정몽준 X파일’로 연결됐다. 9월17일 정의원은 대선 출정식에서 “생모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1978년에 한 번 만났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한나라당 이규택 원내총무는 “생모를 한 번 만났다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맞받았다. ‘작은 국정원’으로 불리는 한나라당 정보팀들의 정보수집 능력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연말 대선을 80여일 앞둔 정치권에 네거티브 폭로전이 한창이다. 9월25일 대북 뒷거래설(엄호성 의원), 24일 국정원 감청자료 공개(정형근 의원), 22일 국정원 정치개입(원희룡 의원) 등 한나라당의 폭로는 무차별적으로 이뤄졌다. 심지어 23일에는 홍준표 의원이 국회의원들에 대한 연예인들의 성상납 의혹까지 제기, 때아닌 색풍(色風)까지 몰고 왔다. 한나라당 저격수로 활동중인 한 의원은 “이미 검증 과정을 거친 몇몇 제보 내용은 조만간 공개적으로 거론할 것”이라고 말한다. 공적자금과 관련한 외화도피, 대통령 친인척 관련 비리, 여권실세들의 민원 및 이권개입 의혹 등과 관련한 것이라는 게 그의 귀띔이다. 이러한 폭로는 숨겨졌던 부패와 비리를 공개한다는 점에서 순기능적인 측면이 있다. 반면 구체적 증거가 부족할 경우 면책특권을 이용한 한건주의식 치고 빠지기라는 혹평도 뒤따른다.

    9월23일 국회 법사위의 서울고검·지검에 대한 국감을 앞둔 한나라당 안테나에 “민주당이 모종의 폭로를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가 잡혔다. 신기남, 송영길 의원 등 민주당 저격수들의 이동 현황도 확인됐다. 국감을 진두지휘하고 있던 김영일 사무총장 등 당직자들은 즉각 한나라당의 대표 저격수 홍준표 의원의 긴급 수혈을 결정했다.

    “큰 거 한 건 땐 당 지도부 신임 쑥쑥”



    무차별 폭로전 … 저격수들 살판났네

    국회 법사위 소속 여야 저격수인 한나라당 원희룡 의원(왼쪽)과 민주당 신기남 의원

    국감 당일 양당 저격수들은 질의 순서를 놓고 1차 신경전을 벌였다. 신의원의 공격 내용을 파악한 뒤 반격에 나서겠다며 홍의원이 질의 순서를 신의원 뒤로 돌린 것. 확인 결과 별다른 게 없자 홍의원측은 질의 순서를 원래대로 돌렸고, 양당 저격수들은 준비한 ‘작품’을 선보였다. 홍의원이 선제공격을 날렸다.

    “검찰의 병풍수사는 민주당 천용택 의원과 설훈 의원이 박영관 서울지검 특수1부장, 김대웅 전 서울지검장, 김대업씨 등과 공모해 만든 공작 수사다.”

    반격에 나선 신기남 의원의 타깃도 역시 병풍이었다.

    “이회창 후보의 장남 정연씨가 불법으로 병역을 면제받으려 최소한 세 차례 이상 금품 로비 시도를 했다.”

    메가톤급 폭로였지만 파장은 크지 않았다. 제시된 내용이 빈약했기 때문이다. 현장을 지켜봤던 한 검찰 관계자는 “아니면 말고 식의 무책임한 폭로”라고 지적했다.

    한건주의식 폭로는 정치의 질을 떨어뜨릴 때가 많다. 정치를 희화화한다는 평가도 받는다. 그럼에도 의원들은 폭로정치에 집착한다. 왜 그럴까. 한나라당 A급 저격수의 한 측근은 “부정부패와 비리에 대한 감시는 국회의 원초적 기능”이라고 강조한다. 고려대 함성득 교수(대통령학)도 “검찰의 중립성 훼손 등 사회감시기능이 취약해지면서 그 대안으로 폭로정치가 양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정치권 일각에서는 폭로의 배경을 보다 현실적 시각에서 찾기도 한다. 대형 의혹사건을 폭로할 경우 개인적 반대급부가 뒤따른다는 것이다.

    “한 건 터뜨리면 당 지도부로부터 신임이 달라진다. 하향식 공천문화 속에서 당 지도부의 신임은 정치생명과 직결된다. 지역구에서도 ‘잘했다’는 격려 전화가 이어진다.” 한나라당 K씨의 설명.

    9월25일 국회 정무위의 금융감독원 국정감사장에서 4억 달러 대북 비밀지원설을 폭로, 여야의 극한대립을 몰고 온 엄호성 의원은 다음날 당 지도부로부터 “수고했다”는 격려성 전화를 받았다. 동료의원들도 “홈런을 쳤다”며 축하의 말을 건넸다. 27일 의총에 참석한 이회창 후보는 연신 싱글벙글했고 참석 의원들의 얼굴에도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의총 분위기가 이처럼 화기애애한 데 대해 당직자 K의원은 “대북 뒷거래설로 병풍을 날려보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뿐만 아니라 한나라당은 김대중 대통령이 추진한 햇볕정책의 근간과 정당성을 흔들고 현대를 공격, 정몽준 후보까지 견제하는 ‘1타(打)3득(得)’의 효과도 거두었다고 본다. 대선을 앞둔 민감한 시기의 ‘한 건’은 대선전략과 직결되는 경우가 많다. 경쟁 후보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려 치명타를 가하는 폭로는 그만큼 파괴력이 크다. 때문에 여야 지도부가 저격수를 전진배치, 분위기를 부추기는 경우도 많다.

    때때로 저격수끼리 서로 ‘작품(폭로)’ 공개를 놓고 경쟁을 벌이기도 한다. 대북 뒷거래설, 국정원 도청설 및 정치개입 문건, 성상납 등은 불과 2~3일의 시차를 두고 불거졌다.

    이에 대해 이회장 후보의 한 특보는 “손발이 안 맞은 것”이라며 “모두 이슈화가 가능한데도 한꺼번에 쏟아내 실탄을 소비했다”고 비판했다. 한나라당 지도부도 이런 문제점을 인식, 엄의원의 대북 뒷거래설 폭로 이후 소속의원들에게 “당분간 다른 이슈는 공개하지 말라”고 자제를 요청했다. 전력을 대북 뒷거래설에 쏟아 붓겠다는 의지에 따른 것이다.

    ‘네거티브’ 공세는 첩보 및 정보가 생명이다. 한나라당은 그 가운데 상당부분을 제보에 의지한다. 민원국의 한 관계자는 “최근 들어 제보가 물밀듯이 들어온다”고 말한다. 대변인실 민원실 대표실 총장실은 물론 각 의원실에도 제보가 쏟아진다는 것. 제보자의 신분도 다양하며 그 가운데 사정기관(검찰 경찰 국가정보원 국세청 등)을 비롯한 각 부처 공무원들의 제보가 특히 ‘폭발력’이 크다고 한다. 최근 한나라당이 공개한 의혹사건 중 정부기관의 고위직이 아니면 알 수 없는 내용이나 각종 자료 등이 들어 있는 것도 정부부처 관련자들의 조력을 받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제보된 정보의 상당부분은 정형근 의원이 분석 가공, 작품화한다는 후문이다.(박스기사 참조)

    무차별 폭로전 … 저격수들 살판났네

    한나라당이 폭로한 대북 비밀지원설에 관련된 현대상선의 대형 컨테이너선(위). 2000년 6월 북한 방문을 마친 뒤 공항에서 작별인사를 하고 있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일각에서는 한나라당의 정보력을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속을 들여다보면 의외로 고급 정보가 많지 않다는 것. 헛발질과 불발탄이 많은 이유도 여기서 찾는다. 한나라당도 이런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저격수로 활동하는 K의원의 설명.

    “옛날(YS 정부)과 달리 DJ 정부는 좀처럼 문서를 만들지 않는다. 접수되는 첩보·정보도 대부분 구전(口傳)이라 증거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

    K의원은 최근 김대업씨를 통해 유명해진 보이스펜(만년필형 녹음기) 등을 통한 녹취 폭로가 빈발한 것도 이 같은 추세에 대응한 것으로 보고 있다.

    민주당도 첩보·정보를 통한 폭로로 위기를 벗어날 때가 많다. 외부 제보에 의존하는 것도 비슷하다. 김대업씨가 제기한 정연씨 병역비리의혹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한나라당 이후보 가족의 호화빌라 문제도 인근 부동산업자의 제보가 출발점이었다. 이정연씨 부인의 원정 출산, 최규선씨의 이회창 후보 20만 달러 제공설 등도 같은 과정을 거친 폭로물이다. 한나라당은 정보기관 등 정부조직이 민주당에 정보를 유출하고 있다고 의혹을 제기한다. 그러나 민주당은 오히려 볼멘소리다. “집권 초기에는 제법 있었지만 요즘은 정부 쪽 정보가 없다”며 여당 프리미엄이 없음을 강조한다.

    이번 대선 과정에서 폭로정치가 그 어느 때보다 기승을 부릴 것이라는 게 정치권의 대체적 시각이다. 따라서 정치는 없고 난투극만 있는 정국상황이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 정치권의 한 인사는 “폭로는 자유지만 ‘입증’의 의무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최소한의 ‘폭로 윤리학’을 강조한다. 그래야만 저격수들의 총격전으로 유혈이 낭자할 대선정국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