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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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끝 아라파트 봄날은 올까

이스라엘 강공책에 정치생명 최대 위기… 내년 1월 선거 승리로 부활 야심

  • 김재명/ 분쟁지역 전문기자 kimsphoto@yahoo.com

    입력2002-10-04 13: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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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벼랑끝 아라파트 봄날은 올까

    6월18일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팔레스타인측의 자살폭탄 테러 현장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지난해부터 9월28일을 ‘봉기의 날’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인티파다(봉기)를 통해 국제사회에 팔레스타인의 고난을 각인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에겐 지난 2년이 고난의 세월이었다. 그의 숙적 아리엘 샤론 이스라엘 수상이 ‘아라파트 제거’를 목표로 지금껏 강공책을 펴오고 있기 때문이다.

    6월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의 정치 중심도시 라말라의 한 이슬람사원에서 아라파트를 만났을 때 필자가 받은 첫인상은 그의 피부가 하얗다는 것이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피부는 조금 어두운 색이다. 아라파트의 측근 나빌 아부 루데이네(공보담당 보좌역)는 “원래 피부가 남들보다 하얗기도 하지만, 지난해 12월 이래 줄곧 라말라 집무실에 갇혀 지낸 탓”이라고 말했다. 그날 모처럼 아라파트가 이슬람사원으로 바깥나들이를 하자, 많은 팔레스타인 민중들이 한 손을 들고 “아라파트!”를 연호하며 지지를 나타냈다.

    샤론 목표는 아라파트 제거

    벼랑끝 아라파트 봄날은 올까

    이슬람 과격 무장단체인 하마스의 지도자 셰이크 아메드 야신

    올해 73세인 아라파트는 1960년대부터 이스라엘 정보부 모사드의 암살 위협 아래 레바논과 요르단, 그리고 북아프리카를 떠돌았다. 68년 팔레스타인을 대표하는 정치기구인 PLO 의장에 오른 그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유엔의 구호물자를 타기 위해 줄을 서 있는 한, 세계는 팔레스타인에게 존경심을 갖지 않을 것”이라며 PLO를 무장투쟁 조직으로 발전시켰다.

    카키색 군복에 두건을 한 아라파트가 고단한 망명객의 처지를 벗어난 것은 90년대부터. 그는 93년 오슬로평화협정의 조인 당사자로 노벨평화상을 받고, 94년 7월 팔레스타인으로 금의환향했다. 그때가 아라파트의 전성기였던 셈이다. 그러나 현재 아라파트는 ‘위기의 남자’다. 이번에는 그 정도가 심해 벼랑 끝에 내몰렸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듯하다. 아라파트의 이 같은 위기는 2년 전 인티파다가 벌어진 뒤부터 계속됐지만 최근 들어 큰 고비를 맞고 있는 듯하다.



    9월18일과 19일 이스라엘 지역에서 자살폭탄 테러가 잇따르자, 이스라엘의 강경파 아리엘 샤론 수상은 ‘시간문제(Matter of time)’라고 이름 붙인 포위공격 작전을 지시했다. 이스라엘군 탱크들은 ‘무카타(Muqata)’라고 부르는 팔레스타인 청사들을 잇따라 파괴한 뒤 아라파트 집무실 건물 1동만을 남긴 채 청사를 포위하고 있다. 아라파트 수반과 측근들은 3개의 방에 갇혀 고립된 채 이스라엘군의 폭파 위협을 받고 있다. 야세르 아베드 라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전 공보장관은 서방언론들에게 “아라파트의 생명이 사방에서 위협을 받고 있다”며 “즉각 아라파트를 구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샤론의 목표는 ‘아라파트 제거’로 단순 명쾌하다. 아라파트의 ‘물리적 목숨’이 아니라 ‘정치적 생명줄’을 끊겠다는 것이다. 만일 아라파트가 팔레스타인의 정치 수도인 라말라를 떠나 가자(Gaza)로든, 외국으로든 떠나기만 한다면, 그는 서안지구에 다시 발을 들여놓지 못할 것 같다. 아라파트의 측근 나빌 아부 루데이네는 필자에게 “샤론이 원하는 것은 자치정부를 파괴하는 것”이라며 “이스라엘의 최종 목표는 요르단강 서안 전체를 재점령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동안 이스라엘 샤론 내각 각료들은 아라파트를 두고 입씨름을 벌여왔다. 추방이냐, 고립이냐를 놓고 견해가 팽팽히 맞선 것으로 알려졌다. 샤론이 속한 집권 리쿠드당은 아라파트 추방 쪽이고, 그와 연립내각을 구성하고 있는 노동당 각료들은 고립 쪽이다. 현재로서는 강제추방보다는 고립 쪽이 힘을 얻고 있는 상황이다. 아리엘 샤론 총리 주재로 열린 긴급 각의에서 노동당 출신인 시몬 페레스 외무장관과 비냐민 벤 엘리저 국방장관은 ‘고립 논리’를 밀어붙여 추방론자들의 입을 다물게 했다. 아라파트와 외부세계를 차단함으로써 외부로부터 고립시킨다는 전략이다.

    9·11 이후 부시는 테러와의 전쟁을 ‘부시 독트린’으로 삼고 아프간을 넘어 이라크로 진격할 태세다. 샤론은 “우리도 아라파트와 이스라엘판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공언하면서 9·11 이후 아라파트를 더욱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다. 샤론은 부시 미 대통령으로부터 아라파트의 라말라 집무실을 공격해도 좋다는 ‘푸른 신호등’ 사인을 이미 받아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벼랑끝 아라파트 봄날은 올까

    팔레스타인에 대해 초강경 자세를 고수하고 있는 아리엘 샤론 이스라엘 수상

    역설적이지만, 아라파트에게 위기는 기회로도 작용할 수 있다. 아라파트는 올해 들어 팔레스타인 사회 내부로부터 비판을 받아왔다. 5월 가자지구에서 만났던 하마스 정치위원회 간부 압델 아지즈 란티시는 “혁명가 시절의 각오는 잊어버리고 가죽 소파에 익숙해진 타협파”라고 비판했다. 9월 초에 열렸던 팔레스타인 자치의회 총회에선 신임 내각에 대한 인준조차 받지 못해 내각 총사태라는 전례 없는 일을 겪기도 했다. 사정이 이런 가운데 자신의 집무실 대부분이 파괴되는 수모를 겪은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군의 포위 공격이 강해지면서 아라파트의 정치적 입지가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 동정 여론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사회의 동정 여론도 아라파트에겐 큰 힘이다.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이스라엘군의 팔레스타인 청사 파괴 행위에 대한 소감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나는 질렸다(I was dismayed)”고 말했다. 유엔 안보리는 9월24일 이스라엘의 강공책을 비난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미국은 기권)

    그러나 부시 미 행정부의 확실한 지지를 받고 있다고 판단하는 샤론은 “그런 유엔 결의가 어디 한두 번 있었느냐”며 무시하고 있다. 이를 두고 “동갑인 아라파트에 대한 샤론의 개인적 경쟁심이 아라파트로 하여금 일생일대의 수모를 겪도록 작용하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샤론의 아라파트 제거론은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라파트는 인동초(忍冬草)와 같은 존재로 초대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인물이다. 이스라엘 강경파 샤론은 그런 모습의 아라파트를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아라파트를 몰아세우다간 하마스 득세라는 부메랑이 샤론의 정치적 숨통을 끊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라파트가 제거되면 하마스를 비롯한 강경세력이 아라파트 세력을 제치고 팔레스타인을 장악할 수 있다. 하마스는 장기간에 걸친 아라파트의 행정 공백과 그 참모들의 부패 의혹으로 현재 팔레스타인 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럴 경우 이들의 저항으로 ‘대폭발(big bang)’이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물론 군사적으로 우세한 이스라엘군의 무력으로 이들을 제압할 수는 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사회 내부에는 죽음을 무릅쓰고 이스라엘에 맞서겠다는 생각을 지닌 젊은이들이 너무나 많다. 유혈극은 끝없이 진행될 것이고 이스라엘은 지난날의 남아프리카공화국처럼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강경파들은 아라파트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다 다루기 쉬운 인물을 지도자로 내세우면 된다는 것이다. 제럴드 스타인버드 교수(바르 일란대학·정치학)는 이렇게 주장했다. “중동 유혈투쟁은 낮은 단계의 투쟁에서 전면전(full-scale war)으로 번져왔다. 이제 아라파트가 없다면 혼란이 올 것이란 경고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 새로운 팔레스타인 지도자가 이스라엘과 협상을 해야 한다.”

    하지만 스타인버그 교수의 주장은 일방적인 희망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아라파트는 생존술의 귀재로 일컬어진다. 그는 내년 봄을 기다리고 있다. 1월로 예정된 선거에서 재집권에 성공한 뒤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대통령이라는 목표를 위해 다시 기지개를 켤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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