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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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 소년 초동 수사 헤매다 11년 흘렀다”

담당형사들 수색 실패 아쉬움과 회한 … 허위제보 뒤쫓기·단순가출 오판 수사력 낭비 결정적 실수

  •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입력2002-10-04 13: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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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구리 소년 초동  수사 헤매다 11년 흘렀다”

    9월27일 대구시 달서구 와룡산 동남쪽 개구리 소년 유골 발견 장소에서 소년들의 유류품을 확인하고 있는 경찰과 유족들.

    1991년 3월26일 개구리를 잡으러 간다며 집을 나간 후 실종된 대구 성서 개구리 소년 5명이 꼭 11년 6개월 만에 앙상한 유골로 발견됐다. 강산이 변할 만큼 긴 세월이 흘렀지만 유족과 시민들의 관심사는 역시 이들 소년들의 사인(死因). 정확한 물적 증거가 발견되지 않는 상황에서 타살과 관련한 추측성 보도가 난무하면서 경찰은 수사 방향을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아이들의 유골이 발견된 뒤 가장 큰 곤욕을 치르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실종 당시 사건 수사를 맡았던 형사들이다. 사건 발생 당일인 91년 3월26일부터 11년간 실종 소년들의 가족들과 ‘동거동락’하며 아이들을 찾아 전국 각지를 헤맸던 담당형사들은 소년들의 유골이 정작 실종 당시의 집에서 3.5km 떨어진 대구 달서구 성서지역 와룡산 동남편에서 발견되자 적잖이 당황한 표정. 이들은 지난 11년간 연인원 32만명의 수색 인원을 지휘하며 아이들을 찾기 위해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고, 실제로 사건현장 주변까지 접근한 형사도 있었다. 9월26일 사체 발굴 이틀 후 새롭게 구성된 수사본부에 다시 차출된 형사들은 유족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극히 말을 아끼는 분위기였다.

    그렇다면 그 많은 수색에도 불구하고 정작 집 인근에 묻혀 있던 개구리 소년들을 경찰이 발견하지 못한 내막은 뭘까.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며 손사래를 치는 당시 담당형사들을 어렵사리 만나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수색 인력의 적기 운용 실패, 끝없는 허위제보와 근거 없는 미신에 휘둘린 비과학적 수사, 이에 따른 초동수사상의 오판 등 형사들이 풀어놓은 ‘수사 실패담’ 속에는 당시 초동수사에 대한 아쉬움과 회한이 묻어났다.

    실종 7개월 후에야 전면 수색

    “사건 초기 수색 인력이 조금만 많았더라도 아이들이 묻힌 와룡산 동남쪽도 수색을 했을 텐데 경찰서 단위의 형사 20여명과 전의경 30명만으로는 수색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급한 대로 아이들이 도롱뇽 알을 주우러 갔다는 와룡산 서남쪽 불미골과 인근 선원지에 대한 수색밖에 못했습니다. 결국 반대편만 열심히 찾은 셈이지요.”



    당시 수사본부 형사들을 실무에서 지휘했던 대구 달서경찰서 형사반장 김모 경위는 초창기 수사 인력 부족을 수색 실패의 가장 큰 이유로 꼽았다. 실종 소년 수사본부가 경찰서 단위에서 대구지방경찰청 단위로 승격한 시점은 실종 7개월 후인 91년 10월24일. 지방경찰청 차장이 수사본부장이 되고 나서야 대구지역 전체 경찰병력과 군병력 등 수천명을 동원해 본격적인 산악 수색에 나설 수 있었다는 게 김반장의 후일담. 김반장은 “지방청 차장이 수사본부장이 된 후에야 각 경찰서의 유기적 협조가 가능했다. 하지만 실종 7개월 후 와룡산 동남쪽을 수색했을 때는 이미 낙엽과 흙이 유골 발견 지점을 덮어버려 육안 수색으로 아이들을 발견하기는 어려운 상황이 됐었다”고 말했다.

    당시 가족들과 함께 발견 지점 인근을 가보았다는 박모 형사는 “실종 한 달쯤 지나 일단의 무속인과 함께 유골 발견 지점 인근을 지나갔지만 인원이 부족해 정밀한 수색은 할 수 없었다”며 “연일 이어지는 제보에 대한 확인 수사와 그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느라 정작 기획수사를 하거나 수색에 열중할 여유가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실종 초기 산악 수색에 실패한 수사본부는 단순가출이나 납치사건에 수사의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엇갈리는 목격자의 진술과 쏟아지는 허위제보 속에서 등잔 밑은 자연히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소년들에게 현상금이 걸리고, 실종사건을 틈타 자신들의 민원을 해결하려는 몰상식한 시민의 제보는 수사를 더욱 미궁에 빠뜨렸다.

    “실종신고 사흘 후부터 구미, 부산에서 아이들을 봤다는 신고가 들어와 형사들이 지방으로 급파되기 시작했고, 수사와 수색 인원은 더욱 부족해졌습니다. 특히 부산에서 5명의 소년이 구걸을 하고 있다거나 커피를 판다는 등의 제보가 집중되면서 이후에는 앵벌이 조직을 찾는 데 수사력이 집중됐지요.” 수사본부의 우모 형사는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앵벌이 제보가 그치자 그 다음부터는 납치신고가 줄을 이었다. 부산, 경남지역의 새우잡이 배와 멍텅구리 배에 소년들이 납치돼 있다는 제보가 바로 그것. 심지어 자신이 아이들을 유괴했다며 몸값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형사들은 허위제보를 쫓아 부산, 경남지역 등을 돌아다니느라 정작 대구 인근지역을 수색할 시간이 없었다. 우형사는 “남해지역에 있는 섬들은 물론이고 무인도까지 다 찾고 다녔으니 더 말해서 무엇하겠냐”며 혀를 찼다. 92년 5월에는 서울에서 아이들을 보았다는 신고가 집중돼 형사 대부분이 상경했지만 결과는 역시 허탕. 이 모두가 한 방송사의 소년 찾기 캠페인 생방송이 불러온 일이었다. 방송중 “소년들이 서울의 깡패에게 붙잡혀 있다”는 제보가 들어와 수사했지만 장난전화로 드러났고, 자신의 아이를 실종 소년인 것처럼 위장해 대구의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게 한 주부가 즉심으로 넘겨지는 일도 있었다. 박형사는 “이런 상황이 92년 말까지 계속됐고, 허위신고가 잠잠해질 때쯤 수사본부에 차출됐던 형사들이 자신이 속한 경찰서로 원대복귀하기 시작했다”며 “92년 12월에는 새우잡이 배에 팔려 갔던 아이들을 죽여 마산의 한 야산에 묻어놓았다는 신고가 들어와 형사들이 급파됐지만 거짓말로 밝혀졌다”고 전했다.

    “전국 공조수사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채무자가 아이를 데려갔다고 허위신고를 하는 사람이 없나, 토지형질변경을 위해 땅을 파놓고는 아이들이 거기에 묻혀 있는 줄 알았다고 하는 사람이 없나 웃지 못할 일이 많았습니다.” 형사들이 말하는 허위신고에 의한 수사력 낭비 사례는 끝이 없다.

    “개구리 소년 초동  수사 헤매다 11년 흘렀다”

    대구 개구리 소년. 왼쪽부터 조호연, 김영규, 박찬인, 김종식, 우철원군.

    허위신고의 백미는 역시 92년 5월 아이들이 북한에 의해 납치됐다는 모 주간지의 오보 사건과 92년 8월에 있었던 경북 칠곡군 나환자촌에 암매장됐다는 제보로 인한 소동. 김반장은 특히 “칠곡군 나환자촌 사건의 경우 ‘나환자들이 아이들의 간을 빼먹고 암매장했다’는 등 제보 내용이 사회적으로 소외된 나환자들의 분노를 폭발케 하는 것이어서 정작 수색도 못하고, 당시 취재기자와 신문사 간부들이 붙잡혀 폭행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었다”며 “지금 생각해보면 언론과 경찰이 얼마나 이성을 잃고 있었는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라고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형사들의 수사력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힌 사람들은 점술가와 심령술사, 심리학자들이었다. 96년 1월 “개구리 소년들 중 한 명인 김종식군의 집에 개구리 소년들이 매장됐다”고 주장해 전국을 떠들썩하게 한 한국과학기술원 김모 박사(범죄심리학) 사건은 밖으로 드러난 사건 중 일부일 뿐 ‘말 꺼내기조차 부끄러운’ 이야기도 많았다. 우형사는 “자칭 심령술사라는 현역 소위가 나타나 실종 소년들의 부모들에게 기를 불어넣으면 실종 소년들이 묻힌 위치를 알 수 있다고 해 가족들과 함께 대구 인근 야산을 밤새워 헤매고 다닌 일이 있다”며 “그냥 듣고 넘기려고 해도 언론에 그 이야기가 나오면 형사들이 사건을 소홀히 다룬다는 문책이 내려오니 어쩔 수 있었겠느냐”고 어려움을 호소했다.

    “경주 왕릉과 교도소 부근에 소년이 묻혀 있다고 주장하는 점쟁이부터 고속도로 다리 교각 밑 구멍 안이나 우물 안에 있다는 심령술사까지 말도 못하게 많았습니다. 특히 심령술사를 자처하는 50사단 소령이라는 사람이 대구 외곽 도로 밑바닥에 아이들이 묻혀 있다고 주장해 시민들 몰래 야밤에 공사를 하는 것처럼 위장하고 도로를 파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우형사는 소년들에 대한 현상금 액수가 늘어가는 만큼 이런 제보도 늘어났다고 증언했다.

    모험심이 많고 활달했던 소년들의 성격으로 미뤄 사건 초기 단순가출 쪽으로 수사력을 집중했던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박형사는 “사건 초기 실종소년들 중 한 명인 우천원군의 일기장에 ‘두목이 되어 모험과 탐험을 하고 싶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는 언론의 보도에 따라 단순가출로 단정하고 아이들이 실종 초기 대구를 빠져나갔으리라고 생각한 게 결정적인 실수였다. 후에 확인해보니 그런 일기장은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당시에도 유족들은 단순가출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형사들과 다툼이 많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지금 사고사든 타살이든 단순가출은 아닌 것으로 밝혀진 만큼 유족들에게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다시 수사본부가 꾸려진 만큼 새로운 각오로 열심히 수사해 나가겠다는 것 외에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들은 유족들에 대한 미안함을 접어둔 채 정확한 사인을 밝혀내기 위해 새로운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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