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54

2002.10.10

“아시아를 놀라게 하갔시오”

북 선수단 4강 목표로 ‘두문불출’ 훈련 몰두 … 계순희·리명훈 가는 곳마다 사인공세 ‘인기 짱’

  •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입력2002-10-04 10: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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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아를 놀라게 하갔시오”

    9월29일 부산아시아경기대회 개막식에서 올림픽 유도 금메달리스트 하형주(오른쪽)와 함께 성화 최종주자로 나선 계순희 선수(왼쪽). 이날 계순희 선수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내비쳤다.

    9월27일 오후 5시쯤 북한 여자유도의 ‘영웅’ 계순희 선수(22)가 해운대구 반여1동 부산아시아경기대회 선수촌의 병원에 나타나 병원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이변이 없는 한 가장 확실한 금메달리스트로 꼽히는 선수 중 한 명인 계순희의 컨디션에 이상이 생긴 게 아니냐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계순희는 진료를 받지 않았다. 유도팀을 이끌고 있는 김경수 서기장은 “내가 눈이 아파 병원에 오려는데 순희가 따라왔을 뿐이다”며 주변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병원에서 나온 계순희는 6시쯤 선수촌 웨이트트레이닝센터에서 ‘한증(사우나의 북한말)’을 하고 나와 젖은 머리에 눈을 반짝이며 입구에서 동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수 대부분 언론 접촉 꺼려 … 말보단 미소로 일관

    그에게 다가가 질문을 던졌다. “애인은 있느냐” “부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유도를 잘하는 비결이 있느냐”…. 아무리 말을 붙여봐도 그는 얼굴을 붉히며 웃기만 할 뿐이었다. 이렇게 ‘내숭’을 떨다가도 경기장에 들어서면 강단 있는 선수로 바뀌고, “한증실에 들어가면 폴짝폴짝 뛴다”(자원봉사자 손일곤씨의 말)는 게 신기할 정도다.

    북한 선수단은 30일 현재까지 일체의 공식적인 인터뷰를 허락하지 않고 있고, 이들의 요청으로 남측 경찰과 국정원 직원 등으로 이뤄진 경호원들이 선수단과 숙소에 언론의 접근을 통제하고 있다. 옆에 있던 레슬링 황보성 선수(66kg급)가 오히려 답답했던지 “기런 정보도 기밀이라 기래요”라고 웃으며 말을 받아넘겼다. 황선수는 기자가 “북한 선수들은 스포츠에 이념적 색채를 갖고 있는 듯하다”고 지적하자 “이념 같은 거 없시오”라며 “하고 싶어 운동하는 거이고, 기왕 하는 거 잘하고 싶은 게지요”라고 말했다.



    “아시아를 놀라게 하갔시오”

    선수촌 숙소에서 베란다 밖을 내다보고 있는 북한 선수들(왼쪽 사진). 한 자원봉사자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는 계순희 선수.

    계순희는 가는 곳마다 기자들과 팬들을 몰고 다닐 정도로 북한 선수단 가운데 가장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선수다. 그는 가까이서 보면 텔레비전이나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작고 귀엽다. 155cm 정도의 키에, 상냥한 웃음과 다소곳한 태도가 눈길을 끄는 수줍음 많은 처녀다.

    하지만 세계대회에 많이 출전한 탓인지 그는 다른 선수들보다는 한결 여유가 있어 보인다. 그는 팬들의 사인공세도 외면하지 않고 웃으며 자신의 이름 위에 ‘우리 민족 제일’이라는 문구를 적어준다.

    그는 북한 여자유도의 영웅을 넘어 이번 아시아경기대회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29일 개막식에서 올림픽 유도 금메달리스트인 하형주와 함께 성화 최종주자로 나서 ‘통일의 불’을 붙였기 때문. 분단 반세기 만에 한반도에서 남북한 선수들이 손을 잡고 동시입장하는 것에 감격했던 것일까. 당당했던 계순희는 눈물을 내비쳤다.

    “아시아를 놀라게 하갔시오”

    9월24일 오후 울산 동천체육관에서 강문수 남한 남자탁구 대표팀 감독(왼쪽)과 이형일 북한 여자탁구 코치가 만나 반갑게 악수하고 있다(윗쪽 사진). 9월24일 남북 체조선수들도 반가운 만남을 가졌다.

    계순희는 불과 16세였던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여자 48kg급 결승에서 80연승 기록을 세우고 있던 일본의 유도 영웅 다무라 료코를 꺾고 우승,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떠오른 북한 유도의 간판. 52kg급으로 체급을 올려 출전한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는 동메달에 그쳤지만 지난해 독일 뮌헨 세계유도선수권대회 52kg급에서는 다시 정상을 차지했다. 따라서 이번 대회에서도 98년 방콕아시아경기대회에 이어 무난히 2연패를 달성할 것으로 기대된다. 계순희의 금메달 획득 가능성에 대해 북한 배영철 물리치료사는 “금메달 따러 왔지, 왜 왔갔소”라며 강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이번 대회에서 계순희 선수 못지않게 화제를 몰고 다니는 북한 선수는 세계 최장신(2m35) 농구 스타 리명훈(35). 26일 금정체육관에서 실시된 비공개 훈련에 몰래 들어가 관전한 결과 리선수는 움직임은 다소 느렸지만 위력적인 골 밑 움직임과 덩크슛 등을 선보여 실전에서도 ‘고공 농구’의 진수를 보여줄 것으로 기대됐다. 역시 그의 위력은 막강했다. 29일 치러진 남자농구 예선C조 아랍에미리트전에선 풀타임을 소화하며 13점, 17리바운드를 챙겼다.

    리선수는 큰 키 때문에 코트 밖에서 더 화제를 뿌리고 다녔다. 조직위는 북한의 항의를 받고 뒤늦게 리선수를 위해 28인승 버스의 앞좌석을 개조해 리명훈이 발을 뻗을 수 있도록 개조했지만 리선수는 일어날 때마다 짐칸과 앞쪽 상단의 텔레비전박스에 머리를 부딪혔다고 한다.

    선수촌 외곽에 있는 웨이트트레이닝장을 관리하는 자원봉사자 양남철씨(32)는 “리선수는 샤워할 때마다 샤워꼭지에 머리를 부딪혀 그가 들어서면 특별히 주의를 준다”면서 “샤워꼭지에서 나오는 물을 보통선수들은 머리부터 받게 되는데 리선수는 어깨 높이로 받는다”고 말했다.

    “아시아를 놀라게 하갔시오”

    26일 오후 금정체육관에서 훈련을 마친 리명훈이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 경찰 곁을 지나가고 있다.

    리명훈 큰 키 탓 이리 쾅 저리 쿵 ‘머리 수난’

    이들 외에도 이번 대회에 참가한 북한 선수단에는 여자권투의 하선비를 제외한 ‘올해의 10대 선수’가 모두 포함돼 있어 관심을 끈다. 올해의 10대 선수는 북측 체육기자단이 올해 경기 성적을 토대로 선정한 가장 우수한 선수들. 여자유도의 계순희와 리경옥, 여자탁구의 김현희와 김윤미, 여자축구의 조성옥, 리금숙, 진별희, 레슬링의 강영균과 사격의 박남수 등이다.

    또한 과거 10대 선수에 오른 선수도 많다. 농구선수 리명훈과 ‘북한의 마이클 조던’으로 불리는 박천종, 여자역도의 간판 리성희, 남자탁구의 노장 김성희, 배길수의 후계자로 꼽히는 체조 김현일, 사격의 김명희와 김정수, 시드니올림픽 복싱 동메달리스트 김은철 등이 그들이다.

    이번 대회는 북한의 참가로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지금껏 남북한 체육교류의 대표적 성과물로 꼽히는 91년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단일팀 구성이나 세계청소년축구 단일팀 출전, 그리고 2000년 시드니올림픽 동시입장 등은 모두 외국에서 이뤄진 일이었다. 따라서 이번 대회는 남북화해 분위기를 돋우는 데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아시아를 놀라게 하갔시오”

    9월26일 계순희 선수(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부산 국민체육진흥센터 유도연습장에서 벤치를 지켜 컨디션에 이상이 있는 게 아니냐는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윗쪽 사진). 27일 오후 선수촌 내 웨이트트레이닝센터를 찾았던 북한 선수들이 빈자리가 없자 돌아 나오고 있다.

    실제 북한 선수단 입국 이후 연습장 곳곳에서 남북 화해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다. 28일 오전 사직 체조체육관에서는 같은 시간에 훈련장을 사용하는 한국과 북한 선수들이 생수통에 든 ‘사탕물’을 주고받아 관심을 모았다. 설탕과 물을 5대 2의 비율로 섞어 걸쭉하게 만든 이 사탕물은 평행봉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바르는 것. 북한 선수들은 그동안 소금물을 봉에 발라왔지만 이 사탕물을 보고 관심을 보여 남한 선수들이 이를 제공했다.

    26일 경남 창원사격장 내 클레이 경기장에서는 남북한 선수들이 오전 내내 같은 대기구역에서 이야기꽃을 피워 연습도 시종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뤄졌다. 인민체육인 칭호를 받은 북한 여자스키트의 에이스 박정란은 지난해 7월 아시아클레이선수권대회에서 만났던 한국팀 곽유현(상무)과 1년여 만에 재회해 기쁨을 나눴다.

    북측 선수들의 선수촌 생활은 다른 선수단과는 조금 다르다. 이들은 가까운 곳에 가더라도 여러 명씩 짝을 지어 움직인다. 대부분 숙소에서 잘 나오지 않고 선수촌 내 초등학교에 마련된 휴식시설도 거의 이용하지 않고 있다. 이곳에는 디스코테크 노래연습장 PC방 영화관 이·미용실 쇼핑센터 등이 자리잡고 있어 특히 일본이나 동남아시아 선수들이 많이 찾고 있다.

    도착한 지 4일 만인 27일 오후 5시쯤 돼서야 사격팀 선수 6명이 오락실에 들른 게 처음이다. 선수들은 오락실 내 시설 이용이 무료라는 데 큰 만족감을 표시했고 사격게임 오토바이타기 등을 하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북한 선수들에게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 곳은 웨이트트레이닝장.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곳 관계자에 따르면 일부 북한 농구선수들은 하루에도 두세 번씩 이곳의 사우나 시설을 찾는단다. 27일 오후 5시30분께 선수단 2진으로 도착한 박철호 권투코치가 선수들을 이끌고 와서는 자원봉사자에게 물었다.

    “힘운동 오데서 합네까?”

    ‘힘운동’이란 웨이트트레이닝을 말한다. 2층 트레이닝장에서 ‘힘운동’을 한 선수들은 ‘한증’(사우나)을 하러 지하로 내려가고, ‘한증’을 하면서 ‘밀어내기’(빨래)를 하기도 한다.

    선수촌의 음식은 대부분 북한 선수들의 입에 잘 맞는다고 리동권 조정감독은 말했다. 그는 “어떤 이는 북쪽에서 깍두기나 김치 등을 싸오기도 했다”며 “종목에 따라 보양식도 달라지지만 김치와 된장이 최고의 보양식”이라고 말했다.

    도착한 지 여러 날 지났지만 북한 선수들은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있다. 도착 첫날에는 밤 12시 넘게까지 대부분의 숙소에 불이 켜져 있었다. 선수촌 파출소 관계자는 “북한 선수단은 새벽까지 교대로 불침번을 서고 있다”면서 “어떤 이는 새벽 4시에도 잠들지 않는다”고 북한 숙소 분위기를 전했다.

    이번 대회는 조직위측의 운영 미숙, 북한 선수들의 지나친 취재거부 등으로 초반부터 잡음이 불거져 나왔다. 그러나 마이니치신문 호리 미키오 기자의 말처럼 “북한 선수들의 참가 자체만으로도 이미 절반의 성공을 거둔 셈”이다.

    북한은 이번 대회에서 4강 고지에 오르겠다는 강한 의지를 밝혔다. 27일 조정경기장에서 만난 북한 리동권 감독은 “아시아를 놀라게 하갔시오”라고 힘주어 말했다. 북한 선수단의 선전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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